잠도 잘 못자는데 '정상'? 망할 기계 같으니라구

[주장] 원격진료, 웃는 건 환자들 아닌 대기업

등록 2014.03.07 15:03수정 2014.03.07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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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030년, 통일된 대박 대한민국의 어느 도서지역. 도시의 갑갑함을 버리고 섬 생활을 택한 지 5년의 시간이 흘렀다. 은퇴 후 얼마나 기대했던 자연 속 생활이던가. 나이가 환갑을 넘어서고, 건강에 조금 신경이 쓰일 뿐이지 혼자 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건강도 사실은 헬스케어 단말기를 통해 매일 매일의 데이터를 전송하고, 그에 대한 원격처방을 받으므로 큰 이상은 없다. 아니, 지금까지는 없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혈액 샘플을 채취하고, 소변의 일부를 단말기에 쏟아 붓고, 기계가 시키는 여러 가지의 일들을 시행한다. 혈압 측정, 혈당 측정, 맥박, 체온, 안구검사까지 모든 측정을 마치는 데 채 10여 분이 안 걸린다. 큰 아들이 12개월 할부로 사다준 최신식 고가장비답게 빠르고 정확하다. 그리고 다시 10여 분이 흐르면 모니터에 나의 전담 주치의가 나타난다.

이 친구는 늘상 바쁘다. 잠깐 나타나서 늘상 같은 톤의 목소리로 "편찮으신 데는 없으세요?"라는 늘상 같은 질문을 던지고, "네"라는 내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늘 검사 수치는 모두 정상이시네요.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세요"라는 모 제약회사의 광고멘트와 같은 억양의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화상진료를 통해 나 같은 환자 아닌 환자들을 한두 명 보는 것도 아닐테고, 의사 양반들 바쁜 거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적은 식사와 운동으로 나름 건강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고, 헬스케어 단말기를 통해 나타나는 각종 수치들 또한 지극히 정상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밤잠을 설친다. 물론 원인은 내가 잘 안다. 하지만, 번개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나의 주치의에게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다.

며칠째 신경이 쓰여 잠을 못 이루고 나니, 몸살 기운도 있는 것 같고 해서, 오늘은 단말기의 증상 입력란에 이렇게 적어 넣었다.

'신경 쓸 일이 있어, 요즘 통 잠을 못자고 있으니, 수면제 좀 처방해 주시오.'


잠시 후, 단말기의 출력기를 통해, 간단한 답장이 왔다.

'세상 일, 신경 쓴다고 마음 먹은 대로 되겠습니까? 맘 편히 생각하고 푹 쉬세요. 감기 조심하세요.'

망할 기계 같으니라구.

이럴 때면, 얼마 전까지 막걸리잔을 함께 기울이다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대면의원의 이 원장이 생각난다. 화상 진료와 원격 진료가 세상의 일대 변혁을 일으켜도, 묵묵히 이 시골에서 환자들 대면하며, 손잡아주고, 이야기 들어주던 마지막 내 친구였다.

이 원장이 살아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찾아가서 속 시원하게 원인을 말하고, 그의 현명한 답변을 기다릴텐데.

"이 원장! 내가 요즘 잠을 도통 잘 수가 없어. 사실은 말이야. 자꾸 박 할매가 눈에 밟혀…."

이런 얘기를 어찌 모니터에다 대고, 늘상 바쁜 주치의에게 할 것이며, 증상 입력란에 적어 넣겠냐는 말이다. 깡통 같은 기계의 입에서 출력되는 용지에는 '지극히 정상'이라는 말만 적혀있을 뿐인데…(하략)…- 미발표 소설, 제목 <박 할매의 양 다리>

원격진료-화상진료 도입, 환자 마음 달랠 수 있을까 

이 글은 100%허구다. 그렇지만,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가 아닐까? 오늘 아침 뉴스를 검색하다가 문득 공중보건의 선생님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관련 기사 : 공중보건의의 고백 "원격의료, 정말 걱정입니다"). 원격진료의 문제점에 대해서, 공중보건의들이 릴레이 기고를 하는 기사였다. 기사를 읽으며 십여년 전, 나의 공보의 생활이 떠올랐다.

나는 공중보건의 생활을 1년차 때는 섬에서, 나머지 2년은 해안가에서 근무하였다. 시골 인심이 그러하듯, 치료를 마치고 각종 해산물들과 텃밭에서 가꾼 채소들을 가져다 주시던 지역 주민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하루에 보는 환자의 수가 10명 이내였으므로, 이런 저런 사는 얘기를 나누곤 했는데, 그네들의 삶속에서 질병의 원인을 찾아 내는 경우가 많았다.

의사들에게는 여러가지 진단 방법이 존재한다. 시진, 문진, 촉진, 청진 등등 환자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기계를 통한 수치들과 화상을 통한 겉핥기 식의 문진이 과연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까? 환자의 증상은 일정 부분 해소할지 모르나, 환자의 마음까지 달래는 것은 역부족이다.

원격진료와 화상진료가 도입되면 웃게 될 누군가를 떠올려본다. 그네들은 의료의 불모지인 도서 산간지역에 사는 순박한 주민들이 아니라, 헬스케어 단말기나 의료정보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팔아먹는 대기업들이 아닐까?

이미 인터넷상에 이런 기사가 올라온다.

"원격 진료 관련 가장 많은 특허를 확보한 기업은 삼성전자(106건)와 SK텔레콤(93건)으로 나타났다. 기존 IT 인프라와 신기술 접목으로 차세대 먹거리를 사전에 준비했다는 의미다."

당사자에게는 생명과 직결된 의료가 누군가에게는 먹거리로 이해되는 세상, 우리는 현재 그러한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 참으로 소설 같은 세상이다.
#원격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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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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