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소나무, 여기 가면 볼 수 있어요

너와에 생명 불어넣은 작가 윤석남의 '나는 소나무가 아닙니다' 전

등록 2013.10.16 10:31수정 2013.10.16 13:22
0
원고료로 응원
a

그린룸 윤석남 개인전 '나는 소나무가 아닙니다' 설치 작품(2013) ⓒ 박건


[기사 보강 : 16일 낮 1시 23분]

6만 개의 구슬이 바닥에 뿌려졌다. 육중한 소나무로 만든 탁자가 놓여있고 벽에는 한지를 오려 그린 그림이 빼곡하다. 모두 녹색이다. 모서리 벽에 큰 거울을 세워 숲의 시각적 효과를 보다 깊게 늘려놨다. 바닥·벽·공간 전체가 푸른 숲 이미지로 설치됐다. 예술과 주술이 섞인 숲이 침묵을 깨고 말문을 열었다. '나는 소나무가 아닙니다' 윤석남 개인전 제목이다.


제목의 뜻은 선문답처럼 포괄적이다. 무엇이라 예단하고 규정하는 인간 중심의 시각이 마뜩잖다. 4대강이 그랬고 돌아가는 시국도 삶과 멀리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자연과 생명, 여성과 현실에 대한 애정을 역설로 담아낸 뜻으로 들린다.

"사람들은 뭐 하나 발견했다 하면 자신의 편리에 의해서 함부로 이름 붙이고, 임의로 이름을 정하곤 하잖아요. 그런데, 소나무 자신 입장으로 본다면 소나무가 소나무이고 싶겠습니까? 사람들은 편리에 의해서 카테고리화하고 이름을 붙이지만 내가 소나무라면 화날 것 같아요. 물어보지도 않고 이름을 정해버리니까…. 이 전시를 통해 생태 이야기를 하되 인간이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인간중심화된 상황을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봐줄지 모르겠어요.(웃음)"

a

윤석남 작가 설치작품 화이트 룸 <어머니의 뜰> 옆에 선 작가 ⓒ 박건


지난 9일, 삼청로에 있는 학고재 갤러리를 찾았다. 갤러리 가장 큰 방 전체를 숲으로 만들고 관객이 그 속을 거닐면 작품과 어우러지는 효과를 살린 설치 작품이다. 이를 위해 스태프와 함께 동분서주하는 윤석남 작가를 만났다. 74세임에도 불구하고 날렵하고 유연한 움직임으로 작품 설치를 연출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숲이나 나무의 요정이라 부르고 싶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수식은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라고 불리는 것만큼 쑥스러운 듯 손사래를 친다.

"나는 아직도 활동가이지 여성주의 미술운동의 영향력과 결실을 뜻하는 대모란 말이 낯설어요. 온당하지도 않고요."

이번 전시는 화이트룸, 너와 작품, 그린 룸, 세 개의 방으로 연출돼 있다. 전시장을 들어서면 바로 화이트룸이다. '어머니의 뜰'을 담아낸 설치 작품이다. 은빛 투명구슬이 바닥에 깔려있고 연꽃이 나무조각으로 피어있다. 벽에는 한지로 형상을 도려낸 작품들이 전면에 붙어있다. 바람이 분다며 소리라도 낼 것 같다. 여기에 담은 형상과 공들인 시간은 어머니에 대한 일상의 추억이요, 일생에 대한 영원과 기원을 담고 있다. 숙연한 빛이 감도는 작업이다.


너와에 숨을 불어넣다

a

학고재에 걸린 윤석남의 너와 그림들 나는소나무가아니다 윤석남 작품전에 걸린 너와 작품을 학고재미술관 스텝이 작품들을 배치하고 점검하고 있다 ⓒ 박건


a

윤석남 작가의 너와 작품 '헐'(왼쪽) '처음부터 혼자 였어요'(오른쪽) ⓒ 박건


새로 선보이는 재료로는 너와가 있다. 나무가 흔한 산간지방에서는 송진이 많은 암소나무를 잘라 지붕으로 올려 썼다. 아귀가 딱 맞지 않아 밑에서 보면 틈새로 하늘이 보이기도 했다. 틈새 많은 지붕치고는 그다지 춥지 않은 게 매력이다. 겨울에는 눈이 쌓여 보온막이 되고 여름에는 바람길이 돼 집안을 시원하게 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80편의 너와 조각이 실려왔다. 윤석남은 입이 딱 벌어지고 두 팔 벌려 맞아들였다. '아! 이 아이들을 어찌할꼬….' 여성주의 미술가에게 너와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a

너와38- 나에게 운명을 말하지마 윤석남 ⓒ 박건

오래 세월 침묵으로 뒤집어 쓴 때를 씻어내고 말렸다. 결을 살피고 다듬고 온기를 불어넣었다. 설렘에 밤잠을 설치기도 하고, 신명이 돋아 덩실덩실 춤을 추듯 작업을 했다. 그 가운데 45점을 새롭게 살려낸 것이다.

윤석남 작가는 '그린룸'을 구상하면서 치유를 경험했다면, 너와 작업을 통해 수많은 여성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렸다고 한다. 너와의 결은 살이 되고, 옹이는 입이 되고, 골은 가슴이 되었다. 그 위에 간결한 먹선은 표정이 돼 숨통을 틔었다.

작품의 제목 역시 눈여겨 볼만하다. '처음부터 혼자 였어요', '어머나, 예쁜 저 소리!', '내 소리가 들리시나요?', '너는 늘 분홍색을 좋아했단다, 나도 너와 같았지',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연두색은 슬프다', '나 여기 없소', '달이 가는 대로' 등등.

윤석남은 어머니와 여성 그리고 생태문제를 쉽고 친절한 어법으로 풀어내고 있다. 재료가 가지는 특성을 감각적으로 살려내 바닥과 벽·공간을 아우르며 대중들과 어떻게 하면 보다 가까이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그것은 현대 미술이 가지고 있는 어려움과 비틀임에 대한 거부감이 깔려 있기도 하다.

미술 문외한이더라도 미술이 삶과 함께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는 배려심을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필요하다면 민예적이거나 공예적인 기법도 마다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폄하하거나 멸시받았을 손길과 마음씨를 의도적으로 존중하려는 의지가 담겨있다.

손가락은 퇴행성관절염으로 가위질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 그럼에도 딸과 함께 1500여 장의 종이를 오려 만든 그림을 공들여 만드는 까닭은 여성 특유의 심성을 미술 속에 꺼뜨리지 않고 이어 가려는 뚝심이 깔려있다. 관객들이 그린룸에 들어와 소나무 탁자에 앉아 쉬었다 가게 하는 까닭도 머리보다 온몸으로 소통하고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보다 쉽고 친절하게 허물려는 작가의 포용력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잠깐, 구슬을 주의해야 한다. 구슬은 욕망이다. 윤석남 작가는 여성의 일생을 역사와 현실로 조망하는 방 연작을 해왔다. '그린룸'의 초록 구슬은 숲과 풀을 연상시키지만 함부로 짓밟다간 자빠지고 다친다. 예전에 발표했던 '핑크룸'의 구슬은 행복이 아니라 불안이요,' 불루룸'의 푸름은 부활이요 희망이었다. '화이트 룸' 역시 산 자는 갈 수 없는 '영혼의 뜰'이다. 윤석남의 구슬은 영롱하게 빛을 발하지만 인습과 통념을 뒤엎는 반전의 구슬이다.

"매일 희열을 느껴... 미술 없으면 어찌 살았을까"

a

그린룸 윤석남 작 학고재 ⓒ 박건


윤석남 작가의 작업은 계속된다. 대중과의 또 다른 소통을 꾀하기 위해 전시 기간에 맞춰 아트북 윤석남 편도 출간된다. 나이가 들면 정리하고 회고 하기 쉬운데 윤석남 작가는 여기서 안주하지 않는다. 여성과 생태 환경에 대한 작업은 삶이 다하도록 펼쳐질 것 같다. 한때의 여성주의 미술가가 아니라 앞으로도 독특하고 친근한 이야기가 기다려지는 이유다. 2015년 서울과 제주에서 전시 일정이 벌써 잡혀있다.

"저는 매일 매일 희열을 느낍니다. 집에서 살림만 하라고 했다면 도망을 갔을 거예요. 아니, '살림만'으로부터 미술 작업으로 도망온 것일 수도 있지요. 모든 일상의 일들을 잊고, 몰입하는 매일의 순간에 보람과 희열을 느낍니다. 미술이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싶어요. 저는 내 몸이 허락하는 한 작업을 계속하고 싶어요. 작업을 위해서 아침에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합니다. 늙었으니 작업을 멈춰야지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습니다. 닥치면 닥치는 것이겠지요. 가끔 친구들이 '이제 그만해, 푹 쉬지 뭘 한다고 그래?'라는 말을 해요. 그럼 '너나 쉬어라'고 속으로 되받아칩니다.(웃음)"

a

한국현대미술선17 윤석남 아트북 앞뒤표지 여성주의 미술가 윤석남 작품집이 헥사곤출판사에서 발간된다. ⓒ 박건


윤석남 작가는 누구?
1939년 만주 봉천에서 출생
1984년 프랫 인스티튜드 그래픽센터, 뉴욕
         아트 스튜던트 리그, 뉴욕
현재, 서울에서 거주 하며 화성에서 작업

1975년 시인 박두진에게 붓글씨사사(4년간)
1982년 첫 개인전(미술회관)
1983년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수학   
1984년 뉴욕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수학
1986년 '반에서 하나로' 기념비적인 전시
1987년 '여성과 현실'전
1993년 '어머니의 눈' HerstoryⅡ 전시회
1994년 '여성, 그 다름과 힘'전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특별전 참가
1996년 제8회 이중섭미술상 수상
1997년 국무총리상 수상. '빛의 파종'전
1998년 타이베이비엔날레 '염원의 장'전
1999년 '인권선언 50주년 기념'전
2000년 광주비엔날레 '인+간'전
2001년 '가족'전(서울시립미술관)
2002년 제2회 여성미술제(서울여성플라자)
2003년 개인전 '늘어나다'(일민미술관)
2004년 윤석남개인전(열린화랑, 부산)
2005년 '광복 60주년, 한국미술 100년'전
2006년 '여성, 일, 미술'전(이대박물관)
2008년 윤석남'1,025 개인전'(아르코미술관)
2011년 핑크룸 5 .(인천 아트플랫폼)
2013년 나는 소나무가 아닙니다(서울 학고재갤러리)
작품소장: 국립현대미술관, 퀸즈랜드 아트갤러리, 토리노 벨란미술협회, 후쿠오카미술관, 도쿠지마 현립미술관 등등

덧붙이는 글 윤석남 개인전 <나는 소나무가 아닙니다>은 학고재갤러리 본관에서 2013년 11월 24일까지 열린다. 전시 관련 문의는 02-720-1524~6으로 하면 된다.
#윤석남 #학고재 #나는 소나무가 아니다 #박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감정위원 가슴 벌벌 떨게 만든 전설의 고문서
  2. 2 "김건희 여사 접견 대기자들, 명품백 들고 서 있었다"
  3. 3 유시춘 탈탈 턴 고양지청의 경악할 특활비 오남용 실체
  4. 4 윤 대통령이 자화자찬 한 외교, 실상은 이렇다
  5. 5 그래픽 디자이너 찾습니다... "기본소득당 공고 맞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