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17 13:44최종 업데이트 23.11.17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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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23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신촌장례식장에 마련된 전두환의 빈소. ⓒ 연합뉴스 [공동취재]

 
전두환의 유해가 임진강을 낀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장산리에 안장될 예정이다. 16일자 언론 보도에 따르면 장지는 휴전선 인근 약 100m 고지에 조성된다고 한다. 이곳은 개성시와 인접한 도라산전망대로부터 직선 6km 정도 된다. 육안으로 개성시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그의 유해가 옮겨지는 것이다.
 
<전두환 회고록> 제3권 '글을 마치며'에서 전두환은 "지내놓고 돌아보니 조국이 걸어온 길도 그랬고, 나의 삶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나라의 처지가 어렵고 세월이 힘겨웠던 만큼 위기를 수습하고 국정을 바로잡아야 할 책임을 떠맡은 나의 일하는 방식이 거칠었던 것 같다"며 자신의 삶을 돌아봤다.
 
그는 "나는 오직 역사적 진실이 그 모습 그대로 드러나기를 바랄 뿐"이라며 "그러한 진실의 순간이 멀지 않았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그런 뒤, "문득 내 가슴속에 평생을 지녀온 염원과 작은 소망이 남아 있음을 느낀다"며 자신의 소원을 이렇게 밝혔다.
 
"저 반민족적·반역사적·반문명적 집단인 김일성 왕조가 무너지고 조국이 통일되는 감격을 맞이하는 일이다. 그날이 가까왔음을 느낀다. 건강한 눈으로, 맑은 정신으로 통일을 이룬 빛나는 조국의 모습을 보고 싶다. 그 전에 내 생이 끝난다면, 북녘 땅이 바라다 보이는 전방의 어느 고지에 백골로라도 남아 있으면서 기어이 통일의 그날을 맞고 싶다."
 

2021년 11월 2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을 마친 전두환의 유해가 연희동 집으로 옮겨지고 있다. ⓒ 연합뉴스

 
그동안 전두환 유족은 재작년 11월 23일 사망한 그의 장지를 구하지 못했다. 그래서 화장 뒤인 그달 27일 연희동 자택에 유골을 안치했다.
 
전두환은 내란죄 등으로 유죄 선고를 받았기 때문에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없다. 유족과 측근들은 본인의 뜻을 거론하며 전방의 땅을 희망했지만 그동안 별 진척을 이루지 못했다.
 
이순자씨가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지 이틀 뒤인 지난해 5월 12일에 조선·중앙·동아 세 신문에 '전두환 유해, 6개월째 자택에 안치 중이라는데' 등등의 기사가 실렸다. 휴전선 부근을 희망한다는 이순자 측의 메시지도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때도 변화는 없었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다가, 파주 장산리에 안치한다는 보도가 나오게 된 것이다.

<삼국유사> 기이 편은 경북 월성군에 있었던 감은사를 거론하면서, "문무왕은 왜병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창건했지만, 마치지 못하고 붕어해 바다의 용이 되었다"라고 적힌 책자가 감은사에 있었다고 소개한다.
 
감은사에 있었다는 이 책자에는 그의 유골을 본인의 유언에 따라 대왕암에 보관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삼국유사>는 말한다. 살아생전에 통일을 목격하지 못하면 내 유골을 전방 고지에 묻어달라는 전두환의 유언과 비슷한 서사 구조를 <삼국유사>에서 읽을 수 있다.

'남침' '수공'... 북한 위협 과장하며 국민 속인 전두환
 

전두환 정권은 북한이 금강산댐을 통해 '수공'을 펼쳐서, 서울을 물바다로 만든다는 주장을 했다.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직선제 개헌투쟁과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전두환 정권의 입지가 좁아지던 1986년 10월, 전두환이 연출하는 깜짝 놀랄 만한 사기극이 등장했다.
 
그해 10월 21일, 북한은 금강산댐(임남댐) 건설에 착공한다고 발표했다. 이로부터 9일이 지난 10월 30일, 이규효 건설부 장관은 대북 성명문을 통해 공사 중단을 촉구했다. 건설부 장관은 이 댐으로 인해 서울까지 물바다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날 발행된 <매일경제> 톱기사 등에서 확인되듯이, 건설부 장관은 "이 댐이 붕괴될 경우 물이 급류를 형성, 화천 방향으로 유입되고 화천·춘천·의암·청평·팔당댐 등 한강 수계의 5개 댐이 순식간에 차례로 파괴되면서 한강 하류 전역을 엄습, 강원·경기·서울 등 한반도 허리 부분이 상상을 초월하는 재해를 입게 된다"라고 예고했다.
 
집권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의 이춘구 사무총장은 한층 자극적인 표현을 썼다. 30일 자 <동아일보> 2면 우하단에 따르면, 그는 "만일 댐이 폭발되면 1백여 m의 물기둥이 수도권을 휩쓸어 그야말로 수소탄 이상으로 수도권을 파괴시킬 것"이라며 "북측의 수공 작전에 완벽한 대응책을 세울 수 없다면 남는 것은 전쟁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라고 공포감을 조성했다.
 
민정당 사무총장은 '수소탄', '수공' 같은 표현을 써가며 위기감을 확산시켰다. 민주화 요구와 직선제 개헌을 피해 나가고자 이런 일까지 벌였던 것이다.
 
'금강산댐 높이 215m'라는 정부의 발표로 인해 국민들이 얼마나 놀랐는지는 국민성금 규모에서도 단적으로 나타난다. 1987년 9월 16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평화의댐 범국민추진위원회의 설명에 따르면 성금 액수는 676억 172만 2879원이다. 이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이 금액은 그 뒤 계속 늘어났다.
 
1986년 3월 5일자 <매일경제> 14면 좌상단에 보도된 경제기획원 발표에 따르면, 1985년 연말에 짜장면은 평균 630원, 짬뽕은 864원, 설렁탕은 1514원이었다. 평화의댐으로 북한의 물 공격을 막아야 한다는 전두환 정권의 거짓 선전에 속아 국민들이 헌금한 금액의 당시 가치를 추정케 하는 지표다.
 
이처럼 전두환은 최전방을 소재로 대국민 사기극을 연출했다. 안보 위기를 조장하고 대규모 국민성금도 거뒀다. 1993년 5월 6일 국회 본회의 대정부질문 때 여당인 민주자유당(민자당)의 김운환 의원은 "국민을 기만한 사기극이었던 평화의댐 진상을 밝히고 국민성금 7백 19억 원의 사용처를 밝히라"고 촉구했다. 6년이나 흐른 뒤에도 성금 사용처가 여전히 불투명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1993년 8월 17일에 감사원은 안기부가 항공 촬영 등을 통해 "2백 15m의 금강산댐 건설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분석자료"를 갖고 있었다고 밝혔다. "안기부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금강산댐 정보를 고의적으로 조작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증거"라고 감사원은 지적했다(18일자 <한겨레> 톱기사).
 
1986년 10월 당시의 국가안전기획부장은 전두환의 최측근인 장세동이다. 종래의 중앙정보부는 1981년 1월 1일부터 국가안전기획부로 개칭됐고, 장세동은 1985년 2월부터 1987년 5월까지 안기부장을 역임했다.
 
1993년 당시의 감사원은 1986년에 안기부 직원들이 정확한 내용을 보고했는데도 장세동 안기부장 선에서 정보가 조작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최전방을 소재로 한 이같은 조작극의 정점에 전두환이 있었다. 그랬던 전두환이 최전방에 누워 호국의 신 같은 이미지를 연출한다면, 이보다 부조리한 역사교육도 없을 것이다.
 
전방 지역을 소재로 한 전두환의 사기극은 이외에도 더 있었다. 그는 1979년 12·12 쿠데타 뒤에 북한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침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조성하며 1980년 5·17 쿠데타를 일으키고 5·18 광주 학살도 자행했다.
 
<전두환 회고록> 제1권에서 전두환은 김영선 중앙정보부 제2차장의 첩보 보고를 받은 직후를 회상하면서 "5월 15일부터 20일 사이에 남침을 하기로 결정했다는 구체적 날짜까지 명기된 첩보여서, 북한의 정체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나는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 5·17 쿠데타와 5·18 광주 학살을 합리화했던 것이다.
 
이처럼 최전방을 소재로 국민을 속이며 사기극을 연출했던 전두환이다. 그런 그가 통일을 맞이하겠다며 최전방에 눕는 것은 죽어서까지 세상을 농락하는 것이다. 그의 유해가 파주시 문산읍 장산리에 묻히는 것은 국민들을 두고두고 불쾌하게 만들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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