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21 13:18최종 업데이트 23.09.21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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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직후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 10번 출구에 붙어 있던 피해자 추모 글귀 ⓒ 이슬기

 
"과연 그가 여성이 아니었다면 만나주지 않는다고 죽임을 당했을까?"
"직장 내 성폭력에 맞서 싸운 당신의 용기와 고통과 외로움을 기억하겠습니다. 행동하는 애도를 하겠습니다."


2022년 9월 14일, 서울의 지하철 신당역 화장실에서 여성 역무원이 살해됐다. 스토킹 가해자인 서울교통공사 입사 동기 31세 남성 전주환에 의해서였다. 당시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던 대통령이 '폐지'를 천명한 여성가족부의 출입기자이던 나는 사건 발생 닷새 뒤 신당역을 찾았다가 이 같은 추모 글귀들을 만났다.


피해자 유족에 따르면 전주환이 여자 화장실에 설치한 불법 촬영 카메라를 피해자가 최초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고, 이후 전주환의 협박과 스토킹이 이어졌다. 혼자 힘겹게 고독한 싸움을 벌였던 고인을, 사람들은 피해자이자 활동가로 기억하며 '행동하는 애도'를 다짐하고 있었다.

사건 발생 1년… 달라진 게 없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1주기를 맞은 14일 저녁 서울 신당역 10번 출구에 마련된 추모공간을 찾은 시민이 추모 메시지를 적고 있다. ⓒ 연합뉴스

 
사건 발생 후 1년, 나름의 노력들이 있었다. 지난 7월부터 스토킹 피해자의 지원과 보호를 명시한 스토킹방지법이 시행됐다. 스토킹처벌법이 개정돼 반의사 불벌 조항이 폐지되기도 했다. 이러한 제도적 보완들에도 불구하고 아직 여성들은 달라진 게 없다고 느낀다. 왜 그럴까.

스토킹 처벌법이 시행된 2021년 10월부터 매년 스토킹 신고 건수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지난해 스토킹 범죄 신고 건수는 2만 9565건. 전년 대비 2배 이상 증가한 숫자이며, 통계가 집계된 이래 가장 높은 수치다.(더불어민주당 임호선 의원실) 올해는 7월까지만도 1만 8993건이 접수돼, 연말에는 3만건을 훌쩍 넘길 것으로 예측된다. 처벌법 시행 이후 가해자들을 처벌하려는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커진 한편, 수사 당국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일상은 스토킹 때문에 계속해서 안전하지 못하다. 특히나 '젠더 기반 폭력'이라는 스토킹 범죄의 특성으로, 계속해서 여성들은 피해에 내몰리고 있다. 지난해 스토킹 가해자 성별이 남성 8131명, 여성 1868명(더불어민주당 권인숙 의원실)인 것만 봐도 스토킹은 명백히 '젠더 기반 폭력'이다. 신당역 사건 피해자에게 범죄 발생 장소였던 '직장'은 여전한 위험 지대다. 설문에 따르면 여성 직장인 10명 중 1명(11%)은 직장에서 '원치 않는 구애'를 경험했다. 남성(3.4%)의 3배가 넘는다.(직장갑질119)

전주환을 경찰에 고소까지 했던 피해자가 직장에는 알리지 못했던 저간의 사정처럼, 오늘날 한국의 여성 직장인들은 회사가 나의 성범죄 피해를 보호해 주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을 안고 산다. 직장갑질119의 설문에 따르면 여성 직장인의 64%는 '회사가 보호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응답했고, 87%는 '국가가 보호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의 생각은 막연한 불안이기보다 현실에 가깝다. 폭증한 신고 건수에 턱없이 모자라는 구속률, 겨우 10%를 상회하는 수준인 긴급응급조치(경찰 직권으로 '접근 금지' 등을 명하는 것) 집행률이 이를 입증한다. 구속률은 오히려 후퇴하기까지 했다. 지난해 스토킹 범죄 피의자 구속률은 3.3%로, 전년도 7%였던 것과 비교하면 반 이상 줄었다(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실). 전주환도 영장 기각으로,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던 중 선고일을 하루 앞두고 범행을 저질렀다. 사건 직후 전주환을 구속하지 않은 재판부에 대한 분노가 들끓었으나, 1년이 지난 지금 현실은 제자리이긴커녕 역행하고 있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경찰 직권의 긴급응급조치나 법원 심의를 거친 잠정조치로 '접근 금지' 처분을 받고도 위반하는 사례도 많다. 경찰청에 따르면 스토킹처벌법이 시행된 2021년 10월부터 올해 7월까지 결정된 긴급응급조치 위반율은 11%다. 같은 기간 잠정조치 위반율도 8%에 달한다. 또 하나의 직장 내 스토킹 사례인 고 이은총씨 사건도 가해자가 법원의 접근 금지 명령을 어기고 피해자의 집 앞까지 찾아가 벌인 범죄였다. 이씨는 6살 딸과 어머니 앞에서 무참히 살해당했다.

솜방망이 처벌도 여전하다. 스토킹 단일 범죄로 기소돼 실형을 선고받는 비율은 5.5%에 그친다. 대부분 집행유예(33%), 공소기각(32%), 벌금형(27%)에 그쳤다.(한나라 사법정책연구원 연구위원) 그나마 다행한 것은 최근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스토킹 범죄에 대한 양형기준을 신설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양형기준이 없어 재판부에 따라 형량이 들쭉날쭉하고 집행유예 등 가벼운 처벌에 그친다는 비판을 이제야 사법부가 받아들인 셈이다.

신당역 사건, 젠더 기반 폭력이자 산업 재해
 

현정희 공공운수노조 위원장이 11일 오전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1주기 모니터링 보고서 발표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피해자가 고통을 받는 동안 경찰에 가해자를 신고하고 재판까지 진행하는 동안 정작 회사에 알리지 않은 이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현정희 공공운수노조 위원장)

지난 11일에 있었던 신당역 사건 1주기 기자회견에서 나온 발언이다. 직장 내 스토킹 피해자들은 괴롭힘을 당하고도 참거나 모르는 척(67.5%)하거나 회사를 그만두는(30%) 등 피해 사실을 회사에 알리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직장갑질119) 결과적으로는 회사의 대응 체계와 피해자 보호에 대한 불신 탓이다.

더 나아가 2차 가해에 대한 우려도 있다. 스토킹을 '사적 구애' 정도로 보는 시선, '웬만하면 받아주라'며 '여자가 유난 떤다'는 인식, 피해자가 빌미를 제공했을 것이라는 여성혐오적 시각 등이 엄존하기 때문이다. 신당역 사건 발생 당시 문제가 됐던 "피해자가 전주환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아 폭력적으로 대응했다"는 서울시의원의 발언이야말로 그 같은 사회적 인식을 그대로 노출한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은 젠더 기반 폭력임과 동시에 산업 재해였다. 피해자는 여성이어서, 그 회사의 노동자여서 살해당했다. 신당역 사건은 사회와 기업이 예방하고, 대처해야 하는 구조적인 문제이자 현실의 과제였다. 그러나 사회 차원의 대책 함께 직장 내 대책도 아직 느슨하기만 하다. 스토킹방지법 상에 사업주 역할은 '근무 장소를 변경할 수 있다' 정도에만 그친다. 범죄 발생 시 제1조처인 '피해자 가해자 분리'가 의무 조항도 아닌 것이다.

고인의 유족들은 1년이 지난 지금도 시민들의 탄원서를 모으며 법원에 엄벌을 촉구하고 있다. 가해자가 엄벌을 받는 것이야말로 피해자의 넋을 위로하는 길이라 믿으면서. 더 나아가서는 전주환 개인뿐 아니라 스토킹 범죄 자체의 예방과 엄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하는 애도'다. 1년 전 신당역에서 만난 또 하나의 글귀가 가슴을 후벼판다. '여성은 살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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