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신데렐라는, 왕자님과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서양동화 <신데렐라>의 결말이다. 인생역전의 상징처럼 인식되는 신데렐라 스토리, 그런데 현실속의 신데렐라는 뒤바뀐 운명이 마냥 행복하기만 했을까.
 
조선 25대 국왕 철종(哲宗) 이원범(재위 1849~1864)은 한국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의 주인공이다. 혈통상 왕족이지만 왕위 계승 서열 따위는 고사하고 종친이나 양반 대우도 못 받던 가난한 시골 청년에서 어느날 갑자기 일약 일국의 국왕 자리에 오른 것은, 세계사를 통틀어도 전례를 찾기 드문 놀라운 사례다.
 
신데렐라보다도 더욱 드라마틱한 인생역전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정작 이후 철종의 인생은 동화처럼 낭만적이지는 못했다. 안타깝게도 역사에서 철종의 이름은 조선의 멸망을 초래한 '세도정치' 시대의 들러리이자, 존재감 없는 암군 정도로만 회자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왕이 되었지만 정작 본인의 삶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던 철종의 운명은 어디서부터 꼬인 것일까.
 
조선의 새로운 왕이 된 젊은 나무꾼
 
  tvN 역사예능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역사예능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12월 7일 방송된 tvN 역사예능 <벌거벗은 한국사> 33회에서는 '강화도 나무꾼은 어떻게 조선의 왕이 되었나' 편을 통하여 철종의 인생과 조선 말기의 혼란을 조명했다.
 
1849년 6월 7일, 조용하던 섬마을 강화의 나루터에 어느날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화려한 복색을 한 신하들과 관군이 찾는 것은 바로 한 젊은 나무꾼이었다. 갑자기 등장한 관군에 놀란 나무꾼은 두려운 마음에 달아나려고 했으나 바로 뒤를 쫓아온 관군들에게 포위된다.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나무꾼 앞에 다가온 인물은 바로 조선의 영의정이었다.
 
그는 나무꾼의 이름을 확인하더니 돌연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4번 절을 하며 비로소 사정을 밝힌다. 바로 나무꾼이 조선의 새로운 왕이 되었으며, 사람들은 그를 모시기 위하여 한양에서 파견된 대신들과 군사들이었던 것. 그야말로 영화에서 나올 법한 스토리이지만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당시 조선 24대왕 헌종은 1849년 불과 23세의 나이에 후계자도 남기지 못 하고 요절했다. 이로써 17대 효종 시대부터 이어진 왕실의 직계 혈통은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다. 조정은 후계자 문제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조선 왕조는 후기로 갈수록 점점 왕손이 귀해지면서 몇 대를 거슬러 올라가도 왕위를 이을 만한 인물을 찾기가 어려웠던 것. 결국 왕실족보를 샅샅이 뒤진 끝에 겨우 찾아낸 인물이 바로 19살의 이원범이었다.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또다른 후손으로, 이원범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였다.
 
본래 이원범은 정상적이라면 조선의 왕위 계승 서열에 절대 거론조차 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이원범의 할아버지인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 그리고 이원범의 큰 형인 이원경은 각각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왕족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유배를 가게 된다. 이원범 역시 이 두 차례의 유배 사건으로 강화도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것. 말하자면 왕족이기 이전에 '역적의 가문'이었던 셈이다. 
 
조선 말기 천주교 최양엽 신부가 프랑스 신부에게 보낸 기록에 따르면, 이원범은 강화도에서 살면서 친적 집의 종노릇을 하거나 값싼 일꾼 노릇을 하면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심지어 주인에게 채찍을 매일같이 맞을 만큼 비참한 삶을 견뎌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더구나 이원범은 왕실의 족보상 선왕 헌종의 아버지 효명세자와 같은 항렬로, 헌종에게는 삼촌뻘에 해당했다. 철저한 유교 질서로 운영되는 국가인 조선에서 삼촌이 죽은 조카의 제사를 챙기고 절을 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 것. 조선 역사에서 철종 이전에 선왕보다 높은 항렬의 인물이 후계자가 된 경우는, 쿠데타로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집권한 세조 단 한 명 뿐이었다. 이원범의 왕위 등극이 얼마나 비정상적인 사례였고, 그만큼 조선 왕실의 사정이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닐 만큼 다급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역적의 가문'에서 나온 왕

역적집안과 높은 항렬이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이원범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뒤에 강력한 배후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바로 조선 후기 세도정치(勢道政治)로 국정을 장악한 안동 김씨 가문이다.
 
성군이었던 정조는 말년에 건강이 위태로워지자 어린 세자를 보호해줄 친위 세력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측근이었던 김조순과 사돈을 맺고 세자의 장인으로 삼는다. 정조 사후 순조 시대에 이르러 김조순의 가문인 안동 김씨는 권력을 장악하고 최대의 척신세력으로 부상하니 이때부터가 세도정치의 시작이다. 설상가상 조선 왕실은 순조와 효명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헌종이 8세에 즉위하자 김조순의 딸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며 안동 김씨의 세도는 더욱 막강해졌다.
 
헌종마저 요절하면서 안동 김씨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한시바삐 새로운 왕을 구해야 했고, 그렇게 낙점된 것이 이원범이었다. 안동 김씨는 역적의 가문인 이원범의 정통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원범을 은언군의 후손이 아닌 '순조의 아들'로 편입시켰다. 이로써 순조의 왕비이자 안동 김씨 가문인 순원왕후가 다시 한 번 수렴청정에 나설 수 있는 근거까지 마련했다. 한 왕비가 수렴청정을 두 번이나 수행한 것도 조선 왕조에서 순원왕후가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1849년 6월 9일, 이원범은 마침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철종이다. 며칠 전까지 비천한 삶을 살아가던 강화도령이 하루아침에 만인지상의 지존 자리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후계자 수업도, 학문을 닦을 기회도 없었던 철종에게 갑자기 주어진 왕위는 기쁨보다 막막함 그 자체였다.
 
실록에 따르면 철종은 "일찍이 통감 두 권과 소학 1, 2권을 읽었으나 근년에는 읽은 것이 없다"고 자신의 교육 수준을 고백하며 신하들을 경악하게 했다.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교 교과 과정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수준이다. 국왕의 학문적 소양을 강조하던 유교국가 조선에서는 왕의 자질까지도 의심받을 수 있는 심각한 약점이었다.
 
또한 순원왕후와 안동 김씨 정권은 철종의 정통성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하여 비정상적인 행태도 서슴지 않았다. 역적으로 기록된 철종의 가문을 사면했고 첩이었던 철종의 어머니 염씨의 신분을 상승시켰다. 심지어 일성록(왕의 일기)과 승정원일기등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국가기록에서 철종의 선조들에 관련된 부정적인 기록들은 모두 찾아내 제거하라는 극단적인 지시까지 내리기도 했다.
 
말하자면 왕실 차원에서 공공연하게 신분세탁과 기록 조작에 나선 것이다. 왕실의 법도가 땅에 무너진 상황이었지만 철종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순원왕후가 시키는 대로 묵묵히 공부하는 것밖에 없었다.
 
철종을 꼭두각시로 이용한 안동 김씨
 
  tvN 역사예능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역사예능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순원왕후는 철종 즉위 1년이 지나자 중전을 들일 것을 권하고 전국에 금혼령을 내린다. 철종은 유배생활로 인하여 아직 혼인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왕손이 귀한 조선 왕실로서는 후계구도를 위해서라도 빨리 왕비를 들이는 것이 시급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중전 간택이 진행되는 동안 철종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진다. 사실 철종에게는 잊지 못할 첫사랑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봉이, 역적의 가문이었던 철종은 강화도 나무꾼 시절, 천민의 딸인 봉이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다는 강화도의 청하동 약수터에는 지금도 두 사람의 풋풋했던 첫사랑의 흔적이 남아있다.
 
하지만 철종이 뜻하지 않게 왕위에 오르게 되며 봉이와는 재회를 기약할 시간도 없이 생이별을 해야 했다. 한 야사에 따르면 안동 김씨 가문이 봉이를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처럼 철종 시대에 유독 이런저란 야사가 많은 이유는, 과거에 비하여 그만큼 백성들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될 만큼 왕실의 위상과 권위가 약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철종의 왕비로 간택된 것이 최근 드라마를 통하여 많이 알려진 철인왕후(哲仁王后)다. 하지만 철종은 자신의 아내를 선택하는 일조차 마음대로 관여할 수 없었고, 안동 김씨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저 철종을 꼭두각시로 이용하려고 했다.
 
당시 세도정치의 폐단이 길어지면서 조선은 '삼정문란'이라는 국가적 혼란에 직면하게 된다. 조선의 시스템을 지탱하는 전정(田政, 토지에 기반한 세금제도)·군정(軍政, 군포를 내면 병역을 면제해주는 제도)·환정(還政,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기에 환수하던 제도) 등, 삼정이 무너지면서 백성들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곳곳에는 탐관오리가 득세햇고 죽은 사람에게까지 세금을 매기는 백골징포나, 환곡으로 대여할 곡식에 모래를 섞어 양을 줄이는 등 각종 부정부패가 성행했다.
 
그 중심에는 집권세력인 안동 김씨가 있었다. 소수 가문이 나라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비정상적인 구조가 장기화 되면서 부패와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국가는 그 기능을 잃어갔다. 조선시대 야사들을 다룬 '매천야록'에서는 안동 김씨 가문에서 뇌물을 받기 위하여 따로 만든 가옥만 12채나 되었고, 그 앞에는 날마다 뇌물을 실은 수레바퀴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철종은 유배 생활을 통하여 가난한 백성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군주였다. 그러나 순원왕후와 안동 김씨가 장악한 조정에서 섬처럼 고립된 철종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강화도령' 철종

조정에서 이러한 철종의 초라한 위상을 조롱하는 의미에서 나온 표현이 바로 그 유명한 '강화도령'이다. 본래는 죄인 신분으로 강화도에 살았던 철종을 조롱하면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리고 이 별명을 만든 사람들은 안동 김씨였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하여 철종을 왕으로 세우기는 했지만, 정작 그들은 철종을 진정한 왕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1851년 12월, 허수아비 왕으로 지내던 철종에게도 반격의 기회가 찾아온다. 순원왕후가 3년간의 수렴청정을 거두고 철종이 친정에 나서게 된 것.

실록에는 철종이 "현재 삼정이 고달퍼서 민생이 고달프고 초췌해졌다. 슬프다. 우리 적자(백성)는 무엇으로 생계를 꾸리겠는가"라고 안타까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철종이 삼정의 문란이라는 민감한 현안을 대놓고 지적했다는 것은 곧 그 주체인 안동 김씨를 겨냥한 것이고, 이제부터라도 왕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해보겠다는 결의의 표현으로 해석된다.
 
철종은 세도정치에 저항하다가 유배를 당한 이들을 사면하며 안동김씨가 대적할 세력을 구축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최고 국정기관인 비변사는 안동 김씨가 철저히 장악하고 있었고, 철종의 개혁정책을 번번이 무산시켰다. 또한 철종이 외숙부로 믿고 의지하며 측근으로 중용하려 했던 염종수라는 인물은, 철종의 외가인 용담 염씨의 족보와 비석까지 위조한 희대의 사기꾼으로 드러났다. 염종수는 참수되었지만 큰 충격을 받은 철종은 가뜩이나 허약하던 국왕의 권위가 무너지며 더욱 고립되는 상황을 초래했다.
 
철종 13년인 1862년 2월에는 각종 수탈에 못 이긴 농민들이 관아를 습격하는 임술 농민봉기 사건까지 일어난다. 임술에서 시작된 농민들의 분노는 전국으로 번져갔고 철종은 '삼정이정청'이라는 기관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요구를 수용하고 삼정의 개혁을 지시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철종은 수많은 폐단을 초래한 환곡제를 폐지하고 토지세를 거두려고 했으나, 땅을 가진 양반들이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그 부담은 고스란히 또다시 백성들의 몫으로 넘겨졌다. 세도 가문의 거센 저항 앞에 철종의 개혁은 또다시 불발됐다.

1863년 무력한 현실 앞에 모든 의욕을 잃은 철종은, 진정한 국왕이 되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끝에 승하하고 만다. 그의 나이 불과 서른 셋, 후계자도 남기지 못한 쓸쓸한 죽음이었다. 일부 야사에서는 선대인 헌종에 이어 안동 김씨에 의한 독살 음모론이 거론되기도 했다.

강화도 유배 시절만 해도 비록 생활은 곤궁했을지언정 큰 병 없이 건강했던 철종은, 오히려 즉위 이후 이듬해부터 설사, 구토, 식체 등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국왕이라는 자리가 주는 극심한 스트레스가 그의 삶과 건강을 빼앗아간 것이다. 그리고 시대의 폐단을 극복할 골든타임을 놓친 조선은 돌이킬 수 없는 망국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강화도 나무꾼에서 하루아침에 왕이 된 철종, 하지만 세도가문에 짓눌려 평생 꼭두각시 왕으로 살아야 했던 그의 삶은 진정한 의미의 인생역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겉보기에 화려한 신분상승과 높은 지위가 반드시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철종은 어쩌면 차라리 가난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소박한 행복을 꿈꿀 수 있었던 강화도 시절을 마음 한 구석에서 평생 그리워했던 것은 아닐까.
벌거벗은한국사 철종 세도정치 안동김씨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