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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가려졌던 석탄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 현실을 드러낸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의 사망사고가 벌써 4년 전 일이다. 매년 2000여 명이 산업재해로 사망하고 있지만, 김용균의 이름은 잊히지 않고 있다. 오히려 사고 때마다, 새로운 법과 제도가 이야기될 때마다 다시 호명된다.

그의 동료들은 4년이 지난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올해 김용균재단에서 펴낸 책 <김용균, 김용균들>의 주인공이기도 한 김용균의 동료들, 이인구씨와 이태성씨를 지난 11월 9일 만났다.

이인구씨는 김용균과 마지막까지 함께 일한 동료다. 김용균의 시신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태성씨는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의 죽음을 가장 먼저 알린 사람으로, 발전 비정규직 노동자다. 지금은 공공운수노조 발전 비정규직 전체 대표자회의 간사로 일하고 있다.

인터뷰는 이인구씨가 군산에 만든 추모공간에서 이뤄졌다. 건물 외벽엔 김용균재단을 소개하는 그림을 그려 넣은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다. 공간 내부에는 김용균, 김태규, 문중원, 문송면 등 그가 김용균 투쟁을 면서 알게 된 산재 사망 노동자들의 사진과 세월호 희생자들의 이름표가 걸려 있다.

"용균이와의 약속"
 
아직 트라우마 치료 중인 이인구 씨는 “시위나 집회 할 때 가서 뒤에 가서 서 있어주고 같이 행동하고 그게 저한테는 몸 건강해야 할 중요한 이유”라고 말했다.
 아직 트라우마 치료 중인 이인구 씨는 “시위나 집회 할 때 가서 뒤에 가서 서 있어주고 같이 행동하고 그게 저한테는 몸 건강해야 할 중요한 이유”라고 말했다.
ⓒ 장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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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구 : "지난해 7월 대전에서 군산으로 옮겼어요. 여기가 원래 제 고향이거든요. 옮기면서 제가 편하게 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어요. 여기 있으면 마음이 편해요.

처음에는 용균이 사진 갖다 놨는데, 세월호는 우리가 (김용균 장례 투쟁 당시) 광화문 분향소 있을 때 옆에서 만날 봤으니까 그 이름들이 안 잊히고요. 문중원(경마 기수) 농성할 때 갑자기 거기 발전기가 고장 났다고 해서, 발전 비정규직 천막에서 발전기 빌려줬는데요. 그러고 나니 우리가 너무 추워서 거기 가서 커피 얻어먹고 그랬죠.

태규(청년 건설노동자)는 '다시는(산재피해가족네트워크)'에서 그 어머니랑 누나랑 만나서 얘기 듣고 알게 됐고요. 문송면은 몰랐는데, 우리 상담 선생님이 어느 날 얘기해주시더라고요. 고등학교도 못 간 나이에 서울에서 수은중독으로 사망한, 문송면이라는 사람이 있다고. 얼마나 안쓰러워요. 근데 또 이 문송면이 태안 사람이더라고요. 그러면서 이 아이들이 다 내 친구가 된 거죠. 혼자 여기서 애들 쳐다보고 있고, 말도 걸고 그래요. 나 오늘 서울 갔다 왔다, 1인 시위했다고 얘기하기도 하고요."

이인구씨의 공간엔 이들의 사진뿐 아니라, 지난 4년간 모아온 유인물, 손피켓, 사진, 리본 등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가장 최근 <김용균, 김용균들> 북토크 유인물까지도 서랍에 정리돼 있다. 이를 발견한 이태성씨가 눈물을 글썽였다.

이태성 : "이런 것까지 다 가지고 계시는구나. (이인구) 과장님이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도 들어요. 저보다도 더 힘드실 텐데. 저도 트라우마가 남아 있거든요. 그런데 처음 발견하시고 수습될 때까지 자리 지키셨던 과장님은 더 힘드시겠지요. 저는 그래도 밖에서 계속 사람들 만나고 싸우는데, 과장님은 여기 계시는 시간이 너무 기니까, 걱정도 되고 그래요. 그래도 과장님도 김용균을 기억하면서 버티시는 것처럼, 저도 용균이와의 약속을 생각하면서 4년을 사는 것 같아요."

이태성씨 역시 여전히 '김용균의 동료'로의 삶을 살고 있다. 사고 직후 위험의 외주화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는데, 4년 사이 석탄화력발전소에서 가장 큰 이슈는 이제 정규직화도 아니고 안전한 작업환경도 아니게 됐다. 발전소 폐쇄 과정에서 발생한 고용불안이, 남아 있는 김용균의 동료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됐다.

이태성 : "최근 삼천포, 보령, 호남 발전소까지 폐쇄되면서 이제 체감되는 거죠. 동료들에게도 불안이 와 닿는 거예요. (지난해 10월) 삼천포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이직 준비하다가 불안감 속에서 자살하는 사건까지 있었잖아요.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전선을 만들어야 하는데, 아직 뚜렷한 결과물을 만들지 못하고 있어서 아쉽죠. 교대제 변경 같은, 현재 인력을 크게 줄이지 않고도 산업 전환을 할 수 있는 방안들이 있고, 그건 정부와 자본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그래도 얼마 전 드디어 발전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투쟁을 시작했거든요.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불안감 속에 벌써 많은 발전소 노동자들이 일을 그만두고 있다. 하지만 당장 전기를 생산해야 하니, 남은 노동자들에게는 특근과 대근이 많아지고, 노동강도가 훨씬 높아졌다고 한다. 현장에서 일하는 동료들은 연장수당이 많아지는 데도 좋다고 하지 못 할 정도로 일이 힘들다고 하소연한다고 한다.

염려... "SPL 산재, 용균이 사고랑 똑같더라고요"

이태성·이인구씨는 이런 상황 때문에 다시 사고가 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다. 안 그래도 산재 보도를 보면 어김없이 사고 당시 기억이 떠오른다. 얼마 전 SPC 하청 공장인 SPL에서 발생한 사망사고도 그랬다.

이인구 : "뉴스 보는데, 용균이 사고랑 완전히 똑같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한참 괴로웠어요. 2인 1조로 일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잖아요. 노동자들이 기계 문제 있다고 얘기 했는데도 묵살하고, 펜스가 있어서 몸을 들이밀지 않게 돼 있어야 하는데 그런 조치가 안 돼 있어서 몸을 들이밀고 일하다가 끼어서 발생한 사고고요. 용균이 때 사고 난 컨베이어 하나만 놔두고 청소하고 바로 일 시켰던 것처럼, 커튼 쳐놓고 바로 노동자들 일 시킨 것도 그렇고요."
 
“용균이와의 약속을 생각하면서 4년을 살고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공공운수노조 발전비정규직 전체대표자회의 간사 이태성 씨
 “용균이와의 약속을 생각하면서 4년을 살고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공공운수노조 발전비정규직 전체대표자회의 간사 이태성 씨
ⓒ 장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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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성 : "저희가 용균이 사고 때 '피 묻은 전기'라고 말했었는데, 이번에 시민들이 '피묻은 빵' 먹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또 결국 SPC의 지시 하에서 일하는 하청에서 벌어진 사고라는 것도 똑같고요. SPL 지회장님이 말하는 걸 들었는데, 결국 속도 때문이라고 하더라고요. 반죽을 빨리해야 하니 붙는 게 많고 그래서 위험하게 일할 수밖에 없었다고. 저희 사고도 마찬가지였거든요."

언제든 그날의 기억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고, 늘 '김용균의 동료'임을 자각하고 사는 이들에게 책 <김용균, 김용균들>은 특별하기도 했다.

이인구 : "제가 이 책 사서 나눠준 게 30권은 넘어요. 돌려서 읽으라고, 학교 선생님들도 드리고, 제가 봉사활동 하며 만나는 학생들이나 젊은 사람들에게도 주고요. 주면서 안전에 관해서도 얘기하고 그래요.

그런 일을 계속하고 싶어요. 군산에서도 사거리나 삼거리에 가서 안전에 대한 피켓 들고 선전하고 그런 일이요. 제가 선전전 할 용기는 서울에서 배워가지고 왔어요(웃음). 사람들 만나기 싫고 힘들 때도, 가서 선전물 나눠주고 1인 시위하는 거는 했어요."

이태성 : "용균이 죽고 3년 뒤에야 책이 나왔는데, 이게 중요한 시점에서 나온 것 같아요. 3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장에서 죽어가는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있다는 점 그리고 우리가 왜 이 김용균의 죽음, 노동자들의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지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3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동료로서 고통받는 과장님의 모습, 그리고 또 싸워가는 노동자, 동료의 모습 그리고 또 유가족인 어머니가 어떻게 변해서 이 죽음을 맞이하고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지가 책 안에 담겨 있어서 좋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분들도 책 많이 읽으시면 좋겠어요."

인터뷰하면서 산업재해라는 것이 정말 많은 사람에게 오래도록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이인구씨는 지금도 불현듯 사고 당일, 저 아래 새카맣게 몰려와서도 제대로 수습도 못 하고 우왕좌왕하던 회사 관리자들을 봤던 때의 분노가 다시 떠오른다고 했다. 이태성씨는 사고 이후, 회사가 안전교육을 한답시고, 사고 현장 사진이 적나라하게 담긴 보고서를 다른 노동자들에게 보여줘서 사고와 전혀 관계없던 노동자 중 일부도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이인구 : "나 힘들어요. 힘들어요. 제가 원래 굉장히 명랑한 성격이고, 회사에서도 젊은 친구들하고 지내는 것도 좋아하고 그랬어요. 지금도 걔네들이, 지금 거기서 떠나간 애들도 눈에 선해요. 다들 고생 많이 했거든요. 그 친구들이 용균이 행사 때라도 와 줬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이태성 : "저는 머릿속으로는 이제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진짜 많이 했어요. '잊자, 잊자, 잊어야 한다, 대신 가슴에 용균이한테 못 했던 내 마음을 싸움으로 해서 그렇게 살아가자'고 생각은 했는데, 이게 시간이 지나도 안 지워지는 거예요. 그게 너무 힘들어요. 언론에 나온 죽음들 보면 그게 또 너무 힘든 거죠. 그 사람들도 다 사연이 있을 테니까."

같이 살면서 싸우는 삶
 
이인구 씨가 꾸민 공간에는 김용균 뿐 아니라 문중원, 김태규, 문송면 등 산재사망 노동자들의 사진이 놓여 있다
 이인구 씨가 꾸민 공간에는 김용균 뿐 아니라 문중원, 김태규, 문송면 등 산재사망 노동자들의 사진이 놓여 있다
ⓒ 장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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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동시에 이들은 책 <김용균, 김용균들>의 부제 '싸울 때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처럼, 김용균에 대한 기억을 억지로 불러내는 게 아니라, 그냥 같이 살면서 싸우는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김용균이 잊히지 않고 기억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태성 : "용균이가 '일하다가 죽지 않고 차별받지 않게'를 외치는 노동 현장의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는 또 용균이같은 이런 노동자를 안 만났으면 좋겠어요. 현장 노동자들이 그걸 기억하면서 앞으로의 싸움을 같이해 나갔으면 좋겠어요."

이인구 : "용균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우리 노동자들한테 안전에 대한 작은 표징, 상징이 됐으면 좋겠어요. '안전 제일' 이렇게 새겨지듯이, 스티커 같은 데 용균이 모습이 늘 조그맣게 드러났으면 좋겠어요."

이인구씨는 "시위나 집회할 때 가서 뒤에 가서 서 있어 주고 같이 행동하고 그게 저한테는 몸 건강해야 할 중요한 원인"이라고 말했다. 김용균을 안고 싸우며 살아가겠다는 그들의 선택이 너무 힘들지 않도록, 그들이 김용균의 곁을 선택했듯, 우리도 그들의 곁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책 <김용균, 김용균들> 표지.
 책 <김용균, 김용균들> 표지.
ⓒ 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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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 최민 님이 작성했습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지 일터 12월호에도 실립니다.


김용균, 김용균들 - 싸울 때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

권미정, 림보, 희음 (지은이), 사단법인 김용균재단 (기획), 오월의봄(2022)


태그:#김용균, #석탄화력, #산업재해, #중대재해, #트라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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