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영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 영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영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 영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이 기사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사람은 홀로 죽지 않는다. <인생의 역사>에서 신형철 평론가는 분인(分人)이란 개념을 소개한다. 우리는 여러 사람을 똑같은 '나'로 만나는 게 아니라 상대에 따라 바뀌는 '나'의 집합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 사람의 죽음은 당사자의 죽음뿐 아니라 그를 통해 생긴 나의 분인까지 잃는 일이다. 블랙 팬서를 연기한 채드윅 보즈먼의 죽음 또한 개인의 죽음일 수 없으며 그를 CG나 대역으로 살려내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상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역시 트찰라를 잃은 분인들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와칸다의 국왕이자 블랙 팬서인 트찰라(채드윅 보즈먼)가 불치의 병으로 갑작스레 서거한다.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은 비브라늄을 얻기 위해 와칸다를 압박한다. 한편 마야 문명의 후예이자 해저왕국 탈로칸의 국왕 네이머(테노치 우에르타 메히아)는 바다에서 벌어지는 강대국의 비브라늄 탐색에 위협을 느끼고 와칸다에 동맹이 되거나 전쟁을 각오하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슈리(레티티아 라이트), 라몬다 여왕(안젤라 바셋), 오코예(다나이 구리라), 음바쿠(윈스턴 듀크), 나키아(루피타 뇽오)는 와칸다를 지키기 위한 싸움을 준비한다.
 
ㅍ 영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 ㅍ 영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 영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시리즈의 정치성을 계승하는 <와칸다 포에버>

<와칸다 포에버>는 <블랙 팬서>의 속편이다. 이를 강조하는 까닭은 MCU에서 <블랙 팬서> 시리즈가 갖는 독특한 포지션 때문이다. 이 시리즈는 일단 슈퍼히어로 장르로 묶을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정의하기에는 더 큰 함의를 내포한다. 어벤져스에서 블랙 위도우는 기민한 첩보활동 중에도 (희미한) 멜로와 젠더 이슈를 팀에서 도맡았다. 유일한 여성 멤버였던 탓이다. <블랙 팬서> 시리즈에는 많은 여성이 등장해 역할을 나누어 가진다. 여왕, 공주, 왕실근위대, 과학자를 한 사람이 떠맡을 필요가 없다.

여성 캐릭터의 역할은 분산됐지만 <블랙 팬서> 시리즈가 흑인과 흑인 커뮤니티를 중심에 놓은 유일한 슈퍼 히어로 시리즈라는 위치는 바뀌지 않는다.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고려할 때 원하든 원치 않든 정치적인 작품일 수밖에 없다. <와칸다 포에버>는 마틴 루서 킹의 온건주의 노선과 맬컴 X의 급진주의 노선을 다루었던 전작을 계승하듯 또 다른 소수자 커뮤니티와의 충돌을 통해 시리즈의 방향성을 명확하게 제시한다.

<와칸다 포에버>에서 와칸다가 대립하는 네이머는 과거에는 스페인의 침략으로 고향을 잃었고 현재는 자원을 침탈당할 위기에 처한 해저 왕국 탈로칸의 왕이다. 그는 왕국에 닥칠 위기의 선제적 방어를 위해 와칸다에 정치적 요청을 한다. 영화에서 표현된 것처럼 이는 사적 이익 추구나 비상식적이고 비도덕적인 요구가 아니라 자신의 왕국을 지키려는 뚜렷한 명분을 갖고 있다. 비록 히어로와 충돌하는 양상이지만 이 뚜렷한 명분이 네이머를 빌런이 아니라 안티히어로로 정의하는 근거가 된다.

문제는 네이머의 요구에 응답할 와칸다. 정확히는 2대 블랙 팬서가 될 슈리가 정치적 명분과 행동력이 네이머와 대립각을 세울 만큼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MCU의 고질적인 단점으로 지적되는 건 빌런의 희미한 존재감인데 <블랙 팬서> 시리즈에서는 유독 반대의 상황이 나타난다. 와칸다는 비브라늄을 토대로 위대한 문명을 이룩했지만, 그 문명을 유지하는 전통은 히어로의 발목을 잡는다. 주인공인 트찰라와 슈리가 블랙 팬서로 거듭나는 과정은 세계관 내에서 꾸준히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탓이다.
 
영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영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 영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영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 고광일

 
토니 스타크를 뛰어넘는 첨단과학 문명을 가진 사회에서 부족 연합체의 왕을 뽑기 위해 육탄전을 벌인다는 설정까지도 지덕체를 갖춘 철인을 바란다는 설정으로 어찌어찌 이해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도전 자격이 왕족과 부족장에게만 주어진다는 것만큼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굳건한 충성심과 출중한 무예로 왕실근위대장에 오른 오코예, 총명함과 덕성을 갖춘 왕국 최고의 스파이라는 나키아는 블랙 팬서에 도전할 자격조차 얻지 못한다.

<와칸다 포에버>에서는 전작에서 정권을 뒤집고 트찰라를 죽음 직전까지 내몰 만큼 중대사로 다뤄졌던 왕위계승식마저 생략됐다. 흑인해방을 위해 살인을 일삼는 킬몽거가 왕위에 오를 수 있던 것도 트찰라와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며 명분을 세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블랙 팬서의 힘을 일시적으로 지운 뒤에도 음바쿠나 오코예를 이길 만큼 슈리가 강하다는 연출은 극중에서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슈리가 아무리 하트 허브를 복원한 천재 과학자에 초인적인 신체 능력을 가졌더라도 그가 와칸다를 이끌 왕이 되어야 한다는 증명은 될 수 없다.

단단한 명분을 세우지 못한 슈리의 내면과 와칸다의 행보는 당연히 갈팡질팡이다. 슈리는 쿠쿨칸의 선물에서 추출한 식물의 DNA 구조를 통해 하트 허브를 복원하고 즙을 마신 후 선조들의 세계로 향한다. 아버지나 오빠를 만날 것이란 예상과 달리 슈리는 킬몽거를 만나 초인적인 힘을 얻는다. 고결한 이념보다 실용적인 목적을 위한다는 둘의 방향성이 같아서다.

어느 방향이든 좋다. 와칸다 국민들은 몰라도 선조들이 슈리를 인정했다는 의미가 되니까. 허나 쿠쿨칸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최후에 일격을 순간 슈리는 갑자기 라몬다 여왕의 메시지를 받아들여 그를 살려준다. 오빠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온 세상을 불태우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탈로칸을 침공하던 슈리가 고작 한번의 회상으로 적을 포용하는 건 고결한 성장이 아니라 일시적 변덕에 가까워 보인다.
 
영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영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 영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영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 영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공백으로 남은 MCU 페이즈4의 결말

물론 <와칸다 포에버>의 미덕도 있다. 흑인과 타인종의 대립을 주제로 삼은 건 동시대의 문제를 다루는 <블랙 팬서> 시리즈의 정신을 계승한 게 맞다. YLM(Yellow Lives Matter)를 소리치는 이들의 의뭉스러운 의도를 차지하더라도 BLM(Black Lives Matter)만큼 YLM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다. 한 집단을 절대적 약자라고 피상적으로 해석하기보다 내부에서도 노선에 따라 정치적 입장이 바뀐다는 입체적 모습이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더 늘려주기도 한다.

그래서 다시 한번 수많은 분인의 죽음을 가져온 채드윅 보즈먼의 갑작스러운 퇴장이 아쉽게 느껴진다. 대체로 시리즈의 1편이 영웅의 탄생을 다루고 2편이 영웅이 성장을 보여주는 걸 감안했을 때 채드윅의 블랙 팬서는 쿠쿨칸과 대등하면서 치열한 대립 관계를 보여줬을 것이다. (여전히 명분 문제가 남지만) 이제 막 와칸다의 미래를 짊어진 슈리가 감당하기에 탈로칸 왕국의 존망을 무려 400년을 고뇌해 온 쿠쿨칸은 너무 벅찬 상대였다.

<씨네21> 김혜리 기자는 <묘사하는 마음>에서 '시리즈물의 결말은 해피엔딩이 아니라 정의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때의 정의는 '권선징악이 아니라 관객이 사랑한 캐릭터를 존중하고 복선과 사건을 책임지며, 작품의 주제 의식과 스타일이 바람직한 종합에 다다라야 한다'는 것이다. <와칸다 포에버>는 MCU 페이즈4의 마지막 작품으로 MCU가 그리는 정의를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MCU가 페이즈4에서 그리려던 정의는 무엇이었을까. 아마 서서히 드러나는 멀티버스의 위기를 대비하는 순간이자 5년간의 블립으로 생긴 상실감과 혼란을 어루만지며 동시에 위대한 시대를 이끌어온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 블랙 위도우를 떠나보낸 애도의 시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주인공을 잃은 <와칸다 포에버>는 그런 애도의 연장선이자 정점이었겠지만 넓고 깊은 채드윅 보즈먼의 공백은 와칸다에 산더미 같은 비브라늄 광맥으로도 채울 길 없이 아득하기만 하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영화 와칸다포에버 블랙팬서 라이언쿠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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