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15 12:04최종 업데이트 22.11.15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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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0년 12월 21일 송진우(오른쪽 두번째), 양준혁(오른쪽) 등 자유계약선수로 공시된 프로야구 선수협 선수들이 경실련 강당에서 시민단체와 대책논의를 위한 연석회의를 마치고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향후 행동방향을 밝히고 있다. ⓒ 연합뉴스


1988년 초에는 최동원을 중심으로, 2000년 초에는 양준혁을 중심으로 프로야구 선수들의 결사 시도가 이루어졌고 그렇게 시작된 역사는 숱한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오늘날의 프로야구선수협의회로 이어졌다. 그런데 그 두 번의 시도에서 공통적인 계기로 작용했던 것 중의 하나가 트레이드였고, 그 두 번의 시도에 맞서 구단들이 내놓았던 대응 방안 역시 트레이드였다.

대전 유성호텔에서 모인 142명의 선수들이 프로야구선수협의회 창립총회를 열었던 1988년 9월 13일, 그 단체의 고문을 맡은 최동원의 아버지 최윤식씨는 기자들에게 '구단들이 선수를 내보낼 때 선수협의회의 승인을 받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구단이 일방적으로 선수를 방출하거나 트레이드할 수 없게 하기 위해 선수들의 힘을 모을 필요가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한국야구위원회(KBO)와 구단들은 '선수협의회에 참여한 선수들과는 재계약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고수해 선수들의 백기 투항을 받아냈고, 롯데 자이언츠를 상징하는 선수였던 최동원은 삼성으로 트레이드되는 무형의 징계를 당해야 했다.

1999년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된 데 반발해 은퇴까지 결심했던 양준혁은 선수협의회 재건에 나섰고, '현대판 노비문서의 속박을 벗어나려면 선수들이 뭉쳐야 한다'며 동료 선수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KBO와 구단들은 이번에도 '선수협의회 배후에 불온한 세력이 있다'는 음모론과 색깔론까지 제기하며 방해했고 박용오 KBO 총재는 '선수협의회가 생긴다면 차라리 프로야구를 없애버리겠다'는 극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정부에서 중재에 나선 끝에 KBO도 선수협의회를 인정해야 했지만, 구단들은 주도적인 역할을 한 양준혁, 마해영, 심정수, 강병규, 최익성 등을 트레이드하는 '보복'을 가했다.

트레이드, 선수들이 떠올린 '노비거래'
 

부산의 우승을 이끈 인천 야구의 적자 1983년 장명부와 함께 삼미 돌풍을 이끌었던 에이스 임호균은 시즌 후 트레이드되자 구단주를 찾아가 거칠게 항의했다. 1984년 그는 최동원과 함께 롯데 우승을 이끌었고, 그를 보낸 삼미는 다시 꼴찌로 주저앉았다. ⓒ 롯데 자이언츠


트레이드란 구단들이 선수를 거래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선수가 구단의 소유는 아니지만 그 선수를 보유할 권리는 구단이 소유한 것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KBO에 가입된 프로야구단들은 드래프트에서 특정한 구단이 지명한 선수에 대한 독점적인 보유권을 서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수들은 일정한 조건을 충족시켜 자유계약선수의 자격을 얻기 전까지는 자신을 지명한 구단 외의 구단과 입단 교섭을 할 수 없으며,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신에 대한 보유권을 가진 구단과 계약하느냐, 아니면 은퇴하느냐일 뿐이다.

그래서 트레이드는 간혹 골칫거리가 된 선수를 괴롭히거나 처분하는 데 활용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각 구단들이 보유한 전력 중 남는 것을 활용해 모자란 부분을 채우는 방법이다. 그래서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선수에게도 보다 나은 출전 기회를 얻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삼성 라이온즈의 창단 멤버였던 경북고 출신 유격수 서정환은 오대석에게 밀려 출전하지 못하는 날이 늘어나자 다른 팀으로 보내줄 것을 간청한 끝에 그해 겨울에 유니폼을 갈아입고 해태의 주전 유격수가 되면서 '1호 트레이드'의 역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트레이드란 대개 선수보다는 구단의 필요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고, 선수로서는 함께 먹고 자고 땀 흘리던 동료들을 떠나 다른 팀으로 옮긴다는 것이 대개 불편하고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트레이드란 기본적으로 선수의 입장에서 달갑지 않은 일이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사건이 된다.

1983년 겨울 TV를 보다가 자신이 삼미 슈퍼스타즈에서 롯데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인천의 에이스 투수 임호균은 격분해서 구단주를 찾아가 항의하기도 했다.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했던 김진영 감독마저 미처 만류하지 못하고 쫓아가서 숨죽인 채 지켜만 봐야 했을 정도의 분노였다. 임호균은 이듬해 롯데 유니폼을 입고 친정팀 삼미와의 경기에 나서 완투승을 거둔 다음 경기를 지켜보던 삼미의 김현철 구단주를 향해 손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여기 나를 보라고 손짓을 했지. 나를 보낸다고 했을 때 구단주에게 분명히 얘기했었거든. 누가 정말 이 팀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누가 정말 이 팀에 필요한 사람이었는지 똑똑히 알게 해주겠다고. 그래서 삼미랑 만날 때는 더 이를 악물고 던졌지. 내 말을 증명해야 했으니까." - 임호균

동봉철과 최익성의 서글픔
 

'강한 2번'의 개척자 동봉철 1990년대 전반기 삼성에서 '강한 2번 타자'의 전형을 제시한 동봉철은 1996년부터 1999년 사이에 해마다 한 번 씩 트레이드 대상이 되면서 시들어갔다. ⓒ 삼성 라이온즈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구단들 사이에서 거래의 대상이 된 선수들은 대개 감정적인 격동을 겪곤 한다. 그래서 자신을 떠나보낸 팀과 다시 대면할 때 임호균처럼 더욱 분발하는 이들도 있지만, 반대로 흔들리는 이들도 있다. 예컨대 1990년대 초중반 '강한 2번 타자'의 상징이었던 삼성의 동봉철이 그랬다.

"처음 트레이드됐을 때 너무 놀랐어요. 저는 제가 삼성에서 뼈를 묻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서울도 아니고 광주로 가라고 하니까… 그런데 그렇게 해태 유니폼을 입고 처음으로 삼성이랑 만났는데, 저는 너무 떨리더라고요. 다리가 막 흔들려서 타석에 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였죠. 막상 삼성 유니폼을 마주하니까 감정적으로 많이 흔들렸던 것 같아요." - 동봉철

팀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많은 노력 끝에 그런 사람이 됐다고 믿고 있던 선수에게 트레이드 통보는 흔히 '버려졌다'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버림받았다'는 느낌은 자괴감으로 이어지거나, 반대로 자신을 버린 것이 실수였음을 깨닫게 하고 말겠다는 오기로 이어지거나, 혹은 두 가지 모두로 나타나곤 했다.

그렇게 힘들고 괴로운 일이기 때문인지, 트레이드는 대개 전격적으로 결정되고 단행되곤 했다. 그래서 임호균 외에도 많은 이들이 언론 보도를 보고, 혹은 기자의 확인 전화를 받고서야 자신이 트레이드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자신이 가야 할 구단 직원의 연락을 받고서야 알게 된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트레이드가 결정된 당일에 상대 팀으로 출근해야 했고, 심지어는 그날 그 팀의 유니폼을 입고 출전을 해야 하기도 했다. 무려 7개 구단에서 뛰어야 했던 최익성에게는 그래서 트레이드가 일종의 정체성이 되었고, 은퇴 후 '저니맨'이라는 이름의 독립구단을 만들기도 했다.

"저는 하도 트레이드를 많이 당하다 보니까 여러 도시를 다녔는데, 어느 팀에 가면 거기 홈구장 근처로 이사를 하잖아요. 하지만 프로야구는 매일 경기를 하니까, 월요일에 간신히 시간이 좀 나서 어디에 무슨 식당이 있고, 어디에 세탁소가 있고, 천천히 알아 가게 된단 말이죠. 그런데 몇 달 있다가 또 다른 데로 트레이드가 되면 아직 낯선 곳에서 또 낯선 곳으로 가게 돼요.

한 번은 저녁에 돌아와서 빨래를 하려고, 옷들을 물에 담가 불려둔 채 경기를 하러 나갔다가 곧바로 트레이드가 돼서 다른 도시로 가게 된 적이 있어요. 그래서 몇 달 지나서 원래 살던 방에 가봤더니 빨래가 다 썩었더라고요." - 최익성


'은퇴 불사' 단행한 강기웅의 분노
 

천재 2루수 강기웅 유격수 류중일과 함께 한국 야구 역사상 최강의 키스톤콤비를 이루었던 천재 2루수 강기웅. 자신의 몸에 푸른 피가 흐른다고 말하던 그는 라이벌 현대로 트레이드가 결정되자 미련 없이 옷을 벗었다. ⓒ 삼성 라이온즈

 
그런 무리한, 혹은 무례한 결정에도 선수들이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역시 그것 외에 선수 생활을 이어갈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보유권을 가진 구단을 떠나는 것은 불가능하며, 보유권이 옮겨지면 그에 따라 옮기지 않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것을 거부할 유일한 방법은 선수 생활을 포기하는 것인데, 그런 길을 실제로 택한 이도 있었다. 바로 1990년대 초중반 한국을 대표하는 2루수였던 삼성 라이온즈의 강기웅이다.

1995년 경기중 부상을 당한 뒤로 부진이 이어지자 1996년 말 트레이드되었는데, 더구나 가야 할 팀이 삼성 시절 가장 치열하게 부딪혀왔던 라이벌 현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그는 옷을 벗고 말았다. 트레이드를 거부하며 '은퇴 불사'를 외쳤던 선수들은 많았지만 실제로 그것을 단행한 것은 강기웅이 처음이었다.

강기웅의 사례는 삼성과 현대 두 구단을 당혹하게 했을 뿐 아니라 모든 구단들을 긴장하게 했다. 그것은 트레이드가 선수에게 은퇴보다도 싫은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린 사건이었으며, 동시에 선수들이 늘 구단 결정대로 따르는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계기였기 때문이다.

강기웅의 분노는 2년 뒤 해태로 트레이드된 팀 후배 양준혁의 분노로 이어져 선수협의회를 재건하는 계기가 됐고, 그렇게 모인 목소리는 2001년 공정거래위원회가 '구단의 일방적인 트레이드 권한'을 포함한 KBO 규약의 8개 조항에 관해 시정 명령을 내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에 따라 KBO 역시 구단들이 트레이드 대상이 되는 선수와 사전 협의 절차를 거치도록 규약을 개정해야 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트레이드 과정에서 구단과 협의할 수 있었던 선수는 극히 드물었고, 대부분은 여전히 언론 보도를 통해서, 기자의 질문을 받고서야 처음으로, 혹은 상대 구단 직원의 환영한다는 연락을 받고서야 자신의 소속 구단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20년이 흐른 2021년에 문화체육관광부가 '트레이드 때 선수와 협의하도록 하는' 내용을 포함시킨 프로스포츠 표준계약서를 발표했을 때 프로야구계 안팎에서 '진일보'라는, 새삼스러워서 민망한 평가가 다시 나왔을 정도였다.
   
영리한 트레이드, 예를 갖춘 트레이드

그렇다면 구단들은 어떻게 2001년 공정거래위원회의 시정명령에 따라 KBO가 개정한 규약마저 지키지 않고 일방적인 트레이드를 계속해올 수 있었을까? 왜 2021년의 표준계약서 역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낙관적인 기대를 하는 이들이 적을까?

아마도 상시 감독하며 문제를 시정할 의지를 가진 제3의 힘이 없다면, 여전히 구단의 절대적인 보유권 아래 있는 선수가 규약 혹은 표준계약서 위반을 지적하며 문제를 제기하기는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

선수와 구단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가 시정되지 않는 한 규약과 제도의 개선만으로는 큰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노동자가 파는 것이 그의 인격이 아닌 노동력일 뿐이듯, 프로야구단이 보유한 것도 선수와 계약할 독점적인 기회일 뿐 그 선수 자체는 아니다.

오늘날 노동자를 소유물로 착각하는 기업들이 생산적인 성과를 낼 수 없는 것처럼, 선수를 자산이나 매물로만 인식하는 프로야구단도 충분한 잠재력을 끌어내기 어렵다는 점은 되새겨질 필요가 있다.

그래서 선수들의 마음을 모으고 그 잠재력을 모두 끌어내 강팀이 되고자 한다면, 그래서 선수를 존중하고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로서의 구단이 되고자 한다면, '영리한 트레이드' 못지않게 '예를 다 하는 트레이드'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트레이드 과정에서 충분히 협의하면 더욱 좋겠지만, 부득이하다면 최소한 결정된 뒤에라도 몸과 마음을 정리할 며칠의 시간 정도는 주어질 필요가 있다. 그래서 동료나 팬들과 작별할 여유와 생활 기반을 옮기고 준비할 시간 정도는 보장해주어야 한다. 떠난 사람은 떠난 것으로 그만일지 몰라도, 떠나보내는 모습은 남은 이들 마음에 길게 남는 법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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