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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 유족 인터뷰
ⓒ 제주4.3범국민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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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합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 그때 다 돌아가시고, 우리 두 형제는 뿔뿔이 흩어지고. 어릴 때 부산에서 생고생을 하고. 근데 난 그것도 모르고 먹고살겠다고 군인이 돼서 나라에 한평생을 바쳤어. 베트남 전까지 갔다 왔는데, 알고 보니 불구대천 불효자가 돼 버렸어."

제주4.3 다랑쉬굴 유족인 고광헌씨는 만 4살 때 4.3을 겪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부모님과 친척 어른들이 토벌대에 희생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어릴 적 형님이 없었다면 얼어 죽었을 일도 겪고, 일찍이 섬을 떠나 부산에서 갖은 고생을 하기도 했다네요. 의지할 곳 없고 형과도 떨어졌다는 젊은이가 먹고살기 위해 선택한 곳이 군대였다고 합니다.

1992년 제주 다랑쉬굴 유해가 발굴됐습니다. 군경에 의해 희생된 억울한 피해자들이었죠. 당시 김영삼 정부는 6개월이나 발표를 미루다 정부 합동으로 유해 발굴을 발표하고 대대적인 기자회견도 했다고 합니다.

고광헌씨도 그 발굴 장소를 찾았다고 하는데요. 남은 친척들의 귀띔으로 10구가 넘는 유해 중 부모님이 포함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답니다. 제주4.3 당시 워낙 어렸기에 친척 어른들은 부모님 유해가 발굴되기까지 어떻게 부모님이 돌아가셨는지, 제주4.3에서 제주도민들이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제대로 얘기해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서너 시간 만나 식사도 하고 이야기도 나눠본 고광헌씨는 소위 군인정신이 몸에 밴 분이었습니다. 시간 약속을 칼 같이 지키시는 건 기본. 밤새도록 버리고 쓰기를 반복했다는 손 원고 속 글씨도 반듯하게 정렬돼 있었습니다.

그런 고광헌씨가 다랑쉬굴 학살의 진상을 알고선 그 길로 군을 사직하려고 했답니다. 국가와 정부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었겠죠. 또 제주4.3 당시 군경과 이승만 정권이 학살을 벌이고 부모님을 죽게 한 것도 모르고 그런 국가에 평생 충성해 온 세월이 야속하고 억울했다고 합니다.

4.3 유족 증언과 1029 참사의 기억
 
지난 2일 만나 인터뷰한 제주4.3유족 고광헌 선생님.
 지난 2일 만나 인터뷰한 제주4.3유족 고광헌 선생님.
ⓒ 하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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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2018년 제주4.3 70주년부터 서울에서 제주4.3을 알리는 일을 도와드리고 있는데요. 올해 하반기 행사를 앞두고 있어 며칠 전 1세대 유족 두 분을 만나고 왔답니다. 1939년생, 1945년생이신 1세대 유족분들이셨습니다.

제주4.3 당시 군과 경찰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그러니까 부모를 잃고 엄청 고생하셨지만 그래도 살아남아 일가를 이루며 자식들을 키우고 지금도 건강하게 살아오신 존경할 만한 분들이셨습니다.

감히 상상조차 쉽지 않은 경험이셨을 겁니다. 국가와 정부가, 군과 경찰이 부모와 친척을 참살하는 걸 겨우 9살, 5살에 전해 듣고, 이후 그 부모 없는 인생을 살며 모진 고생을 겪는 삶은 그 누가 반길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이제 지나간 삶이라며 담담히, 웃으며, 때로는 울컥하며 이야기해 주시는 모습을 지켜보며 가슴이 답답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가의, 정부의 역할을, 의무와 책임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1029 참사, 이태원 참사로 자식들을, 부모를, 친척과 친구들을 잃은 이들의 마음이 어떨지 상상도 가지 않습니다. 저조차 아침마다 눈을 뜨면 한숨부터 나오니까요. 그런 가운데 만난 4.3 1세대 유족의 과거 기억을 마주하는 일은 꽤나 울컥하고 비통한 마음을 들게 했습니다. 네, 참사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더랍니다. 

제주4.3의 진상을 알아 가려는 노력이 시작된 게 학살이 벌어진 지 거의 50년 만의 일입니다. 20세기 중반의 아주 먼 일이지요. 가끔 중고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4.3을 알리는 일도 하곤 하는데요. 이 말은 잊지 않고 반복하곤 합니다. 비극적인 역사를 반복하지 말자고, 그래서 4.3을 기억해야 한다고, 4.3은 대한민국의 역사라고 말이지요.

이태원 참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기억하고 역사로 기록하는 일은 남은 사람들의 몫일 겁니다. 적극적으로, 광범위하게 참여해야 하는 일이고 몫인 셈이죠. 할 수 있는 만큼 온 힘을 다해 추모하고 애도해야겠습니다. 그만큼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질 사람들에게 책임을 지워야겠지요. 분노하고 싸워야 하겠지요. 그게 살아남은 이들의 몫이고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일 것 같습니다.

오래 기억하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추모 시민촛불 포스터.
 이태원 참사 희생자 추모 시민촛불 포스터.
ⓒ 촛불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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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그땐 억울해도 억울하다고 말할 데도 없었어요. 젊은 사람들은 토벌대에 당하고, 또 토벌대 도와줬다고 의심받은 사람들, 우리 외할아버지 같은 사람들은 군에 당하고. 그때 나라가 무슨 소용이 있었어요."

역시나 광주로, 서울로 올라와 갖은 고생을 하셨다던 김숙자씨는 아버지를 잃고, 삼촌을 잃고, 집이 불타버리는 상황을 떠올리면 억울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나라가 국민을 버리는 상황 앞에서 9살 꼬마였던 김숙자씨는 어디 억울하다고 하소연도 못 했다고 합니다.

지난 1주일 동안 정부가, 국가가 애도를 강요했습니다. 그러면서 각종 문화 행사나 공연, 정부 행사나 지역 축제들이 줄줄이 취소됐습니다. 심지어 올 연말 백화점 크리스마스 점등도 일찍이 취소됐다고 하더군요. 그런 강제된 애도가 과연 국민들에게 얼마나 공감을 끌어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반면 4일 광화문 분향소를 찾은 한 유족 어머니는 윤석열 대통령과 오세훈 서울 시장 명의의 조화를 내동댕이치며 "지켜주지도 못 했으면서 조화를 왜 보내냐"고 울부짖었더군요. 또 본인을 막아서는 경찰관들에겐 "그날도 이렇게 막았으면 됐을 것 아니냐"며 하소연을 했고요.

장례식 풍경과 마찬가지로 추모와 애도는 예와 성을 다해 각자의 방식으로 전하면 될 일입니다. 또 애도와 추모는 기억하는 행위와 맞닿아 있습니다. 제주4.3도 그랬습니다. 당시 어떤 비극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그 기억을 먼저 직접 경험했거나 간접경험했던 이들이 널리 전파하고 공유해야겠지요.

5일, 증언 인터뷰에 나섰던 유족분들을 모시고 4.3과 친구들 이야기 콘서트 '혼디가게 4380'을 진행하려고 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제주4.3이 기본적으로 기억하고 추모하는 성격을 갖추고 있는데요. 국민적 애도 분위기 속에서 행사를 치루는 것이 맞는지 고민 또 고민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럴 때일수록 함께 모여 추모하고 슬픔과 아픔을 나누는 것이, 참사 희생자들과 그로 인해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 모두에게 애도를 보내는 일 자체가 대한민국 국민의 일원으로서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제주4.3의 정신이 평화와 인권을 가리키고 있기도 하고요. 마침 5일 서울 광화문에서 1029 참사 추모대회가 예정돼 있더군요. 진상을 규명하는데 동참하면서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제주4.3 유족들이 증언하고, 웃고 울며 70년이 넘도록 이야기하는 것처럼요.
 
'혼디가게 4380' 포스터.
 '혼디가게 4380' 포스터.
ⓒ 제주4.3범국민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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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이태원참사, #제주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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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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