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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5일, 걷기 연습을 시작하라는 말을 의사에게서 들을 수 있을지 긴장하는 마음으로 앰뷸런스를 타고 수술 병원을 향했다. 의사는 마치 예수처럼 "일어나 걸으라"는 말을 나에게 해주었다.

기쁜 마음으로 돌아와서 신발을 신으려니 발의 감각이 무뎌져서 그런지 신발을 신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간병사님의 부축을 받으며 보행기를 잡고 일어서려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걸으라 했다고 바로 걷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어쩌면 당연한 사실을 알게 됐다.

샤워실과 화장실을 가는 것도 당장 할 수 있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서 있으면 발에 피가 몰려 탱탱하게 붓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침대를 벗어나 신발을 신고 땅을 딛고 서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찼다. 
 
두 달간 침대와 일체되어 지내다 그것을 벗어나서 바라보는 기분이 묘했다. 허물을 벗은 느낌이랄까?
▲ 침대를 벗어나다 두 달간 침대와 일체되어 지내다 그것을 벗어나서 바라보는 기분이 묘했다. 허물을 벗은 느낌이랄까?
ⓒ 이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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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은 맞은편 침대까지 걸어보려 했는데, 한쪽 발을 떼기에는 아직 다리 힘이 부족했다. 보행기를 잡고 일어서는 연습부터 시작했고, 다음날은 침대에서 휠체어로 옮겨 앉는 데 성공했다.

이제 침대를 떠나 병원의 복도도 구경하고, 1층 마당에 나가 바람도 쐤다. 며칠 후에는 휠체어에서 목욕의자로 옮겨 앉을 몸과 마음의 준비가 된 것 같아 시도를 해보았다. 내 몸으로 떨어지는 샤워기의 물을 맞는 감격스런 상쾌함이라니~!

이렇게 움직이게 되자 1층에 내려가서 면회도 가능해졌다. 내가 침대에서 움직이지 못할 때 서울에서 친구가 일 때문에 제주에 내려왔었다. 면회가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짬을 내어 먹을 것을 사들고 왔다.

그리고, 혹시 창문으로 마당에 있는 자기를 내다볼 수 있겠냐고 했는데 당연히 불가능했다.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전화 통화만 하고, 수박 등 먹을 거리들을 맛있고 고맙게 잘 먹었다. 
 
며칠 전 침대에서 움직이지 못할 때 친구가 와서 창문으로라도 나를 볼 수 있을까 전화했던 병원 마당에 나왔다. 살랑대는 바람, 푸른 나무와 하늘이 감미로웠다.
▲ 나를 맞아준 풍경과 바람 며칠 전 침대에서 움직이지 못할 때 친구가 와서 창문으로라도 나를 볼 수 있을까 전화했던 병원 마당에 나왔다. 살랑대는 바람, 푸른 나무와 하늘이 감미로웠다.
ⓒ 이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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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어찌 사고 소식을 알게 된 친구들이 시간을 내어 면회를 오고, 먹을 거리, 영양제, 책, 돈 등 응원의 마음을 담은 많은 것들을 보내왔다. 그런 따뜻한 응원들 속에서 내 몸과 마음은 조금씩 꾸준히 아물어갔다.

수술하던 날 나를 봤던 언니는 두 달 만에 휠체어에 앉아 웃으며 수다 떠는 나를 보며 정말 기적 같다고 했다. 앞으로 두 달 후엔 또 기적을 보여주겠다고 큰소리쳤다. 예를 들면, 물구나무서기라든가 덤블링이라든가~

이렇게 침대를 벗어나기 시작하자 움직이는 매 순간이 불안했다. 아기가 뭔가를 짚고 일어서기 시작할 때 그것을 보는 부모 마음이 그럴 것 같았다. 다리 힘이 부족하니 나도 모르게 있는 힘껏 보행기를 부여잡았다.

내 몸을 지키기 위해 온 몸이 애쓰고 있었다. 불안과 긴장이 이어지다보니 '그냥' '터덜터덜' '털썩' 같은 말들이 너무도 그리운 말들이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터덜터덜 걷다가 지치면 털썩 주저앉을 수 있었던 과거의 일상이 그리웠다.

휠체어 초보자로서 움직이다보면, 엘리베이터의 작은 홈이나 낮은 문턱, 눈에 띄지도 않는 바닥의 굴곡에도 휠체어가 덜컹거렸고, 그 충격이 몸에 전달되었다. 골절 부위를 연결시켜놓은 나사가 강한 게 아니라는 말을 의사가 몇 번 했던 터라 걱정이 되었다. 이 덜컹거림 때문에 수술 부위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 하는.

며칠의 경력이 쌓여가면서 휠체어에 방석도 깔고, 충격이 있을 만한 곳이 보이면 미리 팔을 팔걸이에 올려서 충격을 줄이는 등 조금씩 노련해져갔다. 꾸준히 나아져가고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먼 상황에서, 가끔씩 비상상황에 대한 상상을 하게 되곤 했다. 만약 불이 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평생을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은 이런 공포와 불안들을 어떻게 소화해내며 살아갈까 같은 생각들이 이어졌다.

언젠가 TV를 통해 장애인들의 출근길 지하철 시위 소식이 전해졌다. 여러분과 똑같이 이동하고 교육받고 노동에 참여하기 위해 시위에 나섰다고 그들은 말했다. 작년부터 시작됐다는 출근길 지하철 시위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시민들의 발을 볼모로 잡는 이기적 행위다, 불법으로 얻는 건 처벌뿐이다 등등 자신들을 향한 분노의 말들이 쏟아지는데도 그들은 왜 그렇게 오랫동안 시위에 나서고 있을까?

휠체어를 타야 하는 몸이 되고 보니 미장애인(누구든 사고나 질병 때문에 언제든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비장애인 대신 미장애인이라는 단어를 쓴다는데, 정말 공감가는 말이다)들에게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 사소한 것들이 그들의 이동을 어렵게 하거나 불가능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조금 더 깨닫게 되었다.

오래 전에 뉴욕에 간 적이 있었다. 서울만큼이나 복잡하게 느껴졌다. 버스를 타고 가던 중에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버스를 탔다. 복잡한 중에서도 기사는 당연히 휠체어가 올라와서 안전하게 자리 잡을 때까지 도왔고, 승객들은 당연히 기다렸고, 장애인 역시 당연히 버스를 이용했다. 한국에선 '당연하지' 않은 광경이어선지 기억에 오래 남아있다.

요즘은 예전보다 나아졌겠지만, 한국이었다면 어디선가 불만의 소리가 나오거나 기사가 화를 냈을 법한 장면이었던 것 같다. 아니 그게 예상되어 장애인 스스로 집밖을 나오지 않는 선택을 하는 경우가 대다수이고, 그래서 내가 그런 장면을 볼 기회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약자들과 함께 사는 것을 삶에서 자연스럽게 배우기보다는 그들이 가능한 눈에 띄지 않기를, 그래서 우리를 귀찮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회에 가까운 듯하다. 나 역시도 그런 잔인한 무관심을 배우고 익혀 왔다고 생각한다.

냉정한 사회에서 따뜻한 사람이 된다는 건 쉽지만은 않은 일인 것 같다. 하지만, 서로를 향한 연민과 애정만이 우리의 삶을 살만하게 해주는 명약이라 믿기에, 그 약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태그:#휠체어, #장애인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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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겨울밭, 붉은 동백의 아우성, 눈쌓인 백록담,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소리와 포말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제주의 겨울을 살고있다. 그리고 조금씩 사랑이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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