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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연구와 선양이 활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역사의 그림자로 남은 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힌 인물들이 많습니다.

무강(武剛) 문일민(文一民:1894~1968)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평남도청 투탄 의거·이승만 탄핵 주도·프랑스 영사 암살 시도·중앙청 할복 의거 등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문일민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문일민이라는 또 한 명의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기 위해 <무강 문일민 평전>을 연재합니다. [기자말]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울려퍼지기 시작한 '대한독립만세' 소리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거족적인 3.1혁명의 시작이었다. 평양도 예외는 아니었다. 26세의 청년 문일민은 만세 시위의 대열에 합류했다.

이 무렵 그는 평양 애국청년단(愛國靑年團)이라는 단체에도 가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해당 조직이 어떤 단체인지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다만 3.1혁명 이후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애국청년단이라는 이름의 단체들이 우후죽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평양 지역의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독립운동 조직의 하나였던 것으로 추정될 따름이다.

독립군이 되기 위해 신흥무관학교로 가다

청년 문일민은 3.1혁명의 뜨거운 열기를 경험하면서 비로소 조국의 독립을 위해 무언가 해야겠노라 결심한 듯하다. 그해 7월 서간도로 망명하여 독립군 양성을 위한 사관학교인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입학했던 것이다. 실제로 3.1혁명 이후 국내의 많은 청년들이 독립의 꿈을 안고 신흥무관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경술국치 후 서간도로 망명한 이회영(李會榮) 6형제와 이동녕(李東寧)·이상룡(李相龍) 등이 1911년에 지린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 싼위안푸(三源浦)에 설립한 신흥무관학교는 1912년 통화현(通化縣) 하니허(哈泥河) 시절을 거쳐 1919년 3.1운동 이후 류허현 꾸샨즈(孤山子)로 본교를 옮기고 하니허와 콰이당마오즈(快當帽子)에 각각 분교를 세우는 등 독립군 양성의 요람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신흥무관학교는 1910년대 내내 운영되었으며 이곳을 거쳐 간 학생들의 수는 2천수백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졸업 후 각종 전투에 참여하여 자신들이 갈고 닦은 재주를 뽐냈다.

그중 일부는 서간도 지역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합류하여 의용대를 이끌고 국내와 서간도 일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는가 하면, 다른 일부는 북간도 지역 무장독립운동단체인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합류하여 1920년 청산리 전역 등에서 크게 활약했다.

문일민은 자신이 다닌 신흥무관학교의 위치를 통화현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류허현 꾸샨즈의 본교가 아닌 통화현 하니허 분교 혹은 콰이당마오즈 분교에 다녔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흥무관학교 콰이당마오즈(快當帽子) 분교 터
 신흥무관학교 콰이당마오즈(快當帽子) 분교 터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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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는 하사관반(3개월), 장교반(6개월), 특별훈련(1개월: 일반 韓民)으로 나뉘어 교육이 이뤄졌으며 학과와 수련목표는 학과 교육 10%, 교련 20%, 민족정신 50%, 건설 20%의 비중으로 운영됐다. 생도들은 매일 14시간(오전 7시~오후 8시) 동안 혹독한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이 무렵 신흥무관학교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지청천(池靑天)·김경천(金擎天), 조선보병대 출신의 김승빈(金承彬), 중국 윈난육군강무당 출신인 배천택(裵天澤)·이범석(李範奭) 등 최신식 군사기술을 보유한 군인들이 대거 참여해 교관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재학생들은 당대 최신의 군사지식과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이 무렵 하니허 분교에 입학한 이들 중에는 훗날 공산주의 혁명에 투신했던 독립운동가 김산(金山)도 있었다. 김산은 훗날 신흥무관학교 생도 시절의 생활에 대해 아래와 같이 회고한 바 있다.

"학교는 산속에 있었으며 18개의 교실로 나뉘어 있었는데, 눈에 잘 띄지 않게 산허리를 따라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18세에서 30세까지의 학생들이 100명 가까이 입학하였다. (…중략…) 학과는 새벽 4시에 시작하여, 취침은 저녁 9시에 하였다. 우리들은 군대전술을 공부하였고 총기를 가지고 훈련을 받았다. 그렇지만 가장 엄격하게 요구하였던 것은 게릴라 전술을 위해 산을 재빨리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강철 같은 근육을 가지고 있었고 오래전부터 등산에 단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도움을 받아야만 간신히 그들을 뒤따라갈 수 있었다. 우리는 등에 돌을 지고 걷는 훈련을 하였다. 그래서 아무 것도 지지 않았을 때에는 아주 경쾌하게 달릴 수 있었다." - 님 웨일즈, 『아리랑』, 동녘, 2005, 131쪽.

비슷한 시기 입교한 문일민 역시 김산과 동일한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간도 지역 무장독립운동단체에서 활약

문일민은 신흥무관학교에서 혹독한 군사 교육을 수료함으로써 마침내 독립군으로 거듭났다. 이후 서간도 일대의 무장 단체들에 배속되어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그에게 주어진 첫 번째 임무는 한족회(韓族會) 중앙본부의 특명을 받아 평양에 잠입, 애국청년회(愛國靑年會)의 연락과 조직 등을 강화하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는 임무를 완수하고 무사히 만주로 귀환했다.

귀환한 문일민은 그해 12월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에 가입했다. 대한청년단연합회는 1919년 11월~12월 사이에 안동현(安東縣)에서 안병찬(安秉瓚)·김승만(金承萬)·김시점(金時漸)·오동진(吳東振)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단체로 당시 만주 및 국내에 산재한 청년단체들이 서로 활동 목적이 달라 충돌할 수 있으므로 활동을 하나로 통일하기 위한 취지로 만들어졌다.

연합회는 기관지 발행을 통한 선전 활동과 함께 별동대를 두어 적(敵) 기관 파괴·주구(走狗) 토벌·군자금 모집 등에 힘썼다. 문일민 역시 별동대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1920년 1월 13일자 『독립신문』에 게재된「대한청년단연합회 취지서」. 각 단체들이 임의로 활동할 경우 서로 충돌을 피하기 어려우므로 통일적 행동을 위해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조직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1920년 1월 13일자 『독립신문』에 게재된「대한청년단연합회 취지서」. 각 단체들이 임의로 활동할 경우 서로 충돌을 피하기 어려우므로 통일적 행동을 위해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조직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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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동대는 1920년 음력 정월경(양력 2~3월경)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으로 개편되는데 단장은 이탁(李鐸), 부단장은 오동진이 맡았다. 

광복단은 서간도 지역 독립운동단체인 한족회·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대한청년단연합회 세 단체 연합의 통일적 행동기관으로서 기존처럼 모험대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문일민 역시 별동대가 광복단으로 개편되면서 자연스레 광복단원이 된 것 같다.

문일민은 생전에 자신의 독립운동에 대한 회고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 따라서 대한청년단연합회 별동대원·대한광복단원으로서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임무를 수행했는지도 현재로써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문일민이 속해 있던 단체들이 수행했던 임무들의 성격에 비춰봤을 때, 그 역시 의열투쟁의 최전선에서 활약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을 따름이다.

- 4부에서 계속 -

[참고문헌] 
1)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 대한민국공훈사발간위원회, 1991.
2) 京畿道 第三部, <金榮哲 경찰신문조서>·<金聖澤 경찰신문조서>, 1920.8.22.
3) 김승학, <韓國獨立史>, 독립문화사, 1966.
4) 김영범, <의열투쟁 I–1920년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5) 님 웨일즈, <아리랑>, 동녘, 2005.
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7, 1976.
7) <大韓靑年團聯合會 趣志書>, <독립신문>, 1920.1.13.
8) 문일민, <韓國獨立運動史>, 애국동지원호회, 1956.
9) <문일민 이력서>
10) 박환, <신흥무관학교>, 선인, 2021.
11) 반병률,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12) 서중석, <후기 新興武官學校>, <역사학보> 169, 역사학회, 2001.
13) 채근식, <武裝獨立運動祕史>, 대한민국 공보처, 1985.
14) 平壤覆審法院 刑事部, <吳東振事件判決>, 1932.6.21.
15) 한철수, <나의 길>, 송산출판사, 1984.
16) 흥사단, <제239단우 文逸民>, 1930.5.13.
17) <韓國近現代史人名錄>6, 여강출판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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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한국근대사 전공) / 취미로 전통활쏘기를 수련하고 있습니다.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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