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아마겟돈 타임> 스틸컷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아마겟돈 타임> 스틸컷

▲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아마겟돈 타임> 스틸컷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아마겟돈 타임>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 이 글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제임스 그레이 감독이 영화 <애드 아스트라>를 연출한다는 소식이 처음 들려왔을 때 조금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가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SF 장르에 손을 뻗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언젠가 한번쯤은 할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시기가 빠르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범죄물과 멜로, 드라마는 물론 어드벤처의 향이 묻어 있는 전기 영화까지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온 그에게 두려움이란 조금도 없어 보였다.

거침없이 나아가는 그의 모습에 우려의 목소리가 조금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다재다능함은 누군가에게 흥미이기도 했지만 불안의 요소이기도 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감독 스스로는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영화를 통해 다양한 외면의 모습을 보여줬던 것과 달리 그 안에서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언제나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극을 이끌어 가는 인물의 내면과 심연, 그 복잡한 마음과 서로 끊임없이 주고받으며 변화하고 움직이게끔 만드는 관계에 대한 고찰이다.

우주로 향했던 제임스 그레이 감독이 다시 눈길을 돌린 곳은 1980년대의 뉴욕 퀸스, 다시 말해 지구다. 다시 지구로 돌아온 감독은 폴 그라프(뱅크스 레페타 분)라는 소년을 중심으로 시대가 안고 있었던 차별과 계급, 인간 내면에 놓여 있는 유약함과 같은 다소 어두운 부분을 우회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번에도 역시 그의 작품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인물 사이의 관계와 그 관계 안에 숨어있는 다양한 감정을 증폭시켜 전달하는 대화다. 영화의 중요 장면마다 놓여있는 작품 속 대화 신들은 각각이 하나의 다른 주제를 내포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다른 작품과는 다른 무게감을 지닌다.

02.

우크라이나 유대계 가정에서 자란 창의적이고 예민한 폴은 그림 그리기에 특별한 재능을 가진 소년이다. 다소 망상적이며 현실로부터 일탈을 꿈꾸는, 아직 철들지 못한 모습이 있기는 하지만 진심으로 예술가가 되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가정 내의 부모는 물론, 학교의 선생님까지 그의 창의성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고 칭찬해주고자 하지 않는다. 수업 과제와는 전혀 무관한 상상력을 펼치고 때에 어울리지 않는 장난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그의 재능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봐도 무관하다.

이와 관련하여 감독은 처음부터 하나의 장치를 영화의 가장 바깥쪽에 위치시킨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로널드 레이건과 부를 쌓으며 영향력을 키워나가는 트럼프 가문에 (퀸스 지역은 트럼프 가문이 주택 사업을 시작하며 영향력을 가진 중심지에 속한다.) 대한 이야기다. 이는 유대인 출신으로 오랜 시간 박해 받고 차별 받아온 가정 문화와 상응하며 영화 전체의 톤을 낮춤과 동시에 영화 전체의 요소를 보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유도한다. 폴의 부모가 자식들의 교육에 있어 창의성이나 자율성보다는 엄격한 규칙과 미래가 보장되는, 소위 돈을 벌 수 있는, 자신이 미래에 의지할 수 있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근거가 된다.

여기에서 한 발 벗어나 있는 인물이 바로 할아버지 애런(안소니 홉킨스 분)이다. 폴의 꿈을 인정해주고 진심 어린 사랑으로 유일한 친구가 되어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 역시 자신의 어머니가 유대인 출신으로 박해 받으며 온갖 고초 끝에 미국 땅에 다다른 사실을 알고 있다. 자신 역시 이름만으로 차별 당한 세월을 지나왔기에 사상적으로는 보수적인 영역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일면에는 자신의 아이들이 어디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자신의 꿈을 스스로 개척하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그렇게 살아오지 못한 자신의 세월에 대한 약간의 보상 심리라고 할 수도 있겠다. 폴에게 물감을 사다 준 유일한 인물도 바로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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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아마겟돈 타임> 스틸컷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아마겟돈 타임>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3.

영화 전반에 걸쳐 두드러지게 제시되는 문제는 크게 두 가지다. 인종 차별에 대한 문제와 권력층과 비권력층 사이의 사회적 대우 문제다. 사립학교를 다니는 형 테드(라이언 셀 분)와 달리 공립학교를 다니며 사귀게 되는 폴의 친구 조니 데이비스(제일린 웹 분)가 이 영화에서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임스 그레이 감독은 1980년대를 중심으로 그 이전과 이후, 어쩌면 지금까지도 곳곳에 만연한 사회적 문제를 규모는 축소시키면서 조금 더 명확한 예시로 작품 속에 그려내기 위해 몇 가지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그 중심에 폴과 조니 두 사람이 놓여 있다. 두 사람은 부와 권력을 갖고 있는 집안과 그렇지 못한 집안, 인종 차별의 문제에 있어 인정받고 인정받지 못하는 인종을 압축적으로 대표하는 인물이다.

앞서 설명한 사회적 배경을 등에 지고 있는 부모의 시선에서 봤을 때 지금 공립 학교가 갖는 문제점은 할머니의 대사를 통해 이미 제시되고 있다. 학급별 인원 수도 통제가 되지 않고 있고, 여기 저기서 아이들을 모두 데려오는 바람에 흑인들도 같은 반에서 수업을 듣고 있다는 부분이다. 이 대사에서 이미 폴과 조니의 만남은 잘못된 결말로 향하게 될 것이라는 복선이 주어지고 있는 셈이고, 실제로 영화는 두 사람의 만남으로 인해 점점 더 큰 문제를 만들어 가게 된다.

조니가 학교에 가져온 마약을 두 사람이 함께 나눠 피는 것이 그 시작점이다. 못마땅하기는 하지만 그나마 폴이 사립학교를 다니며 형보다는 조금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던 엄마 에스더(앤 헤서웨이 분)도 이 사건으로 마음이 완전히 돌아서고 만다. 그 전까지만 해도 폴이 다니던 학교의 학부모회의 회장 일을 도맡고, 지역 교육위원회의 선거에 나가고자 했던 그녀였기에 이 사건은 더욱 치명적이었다. 물론 폴의 가족이 가지는 부와 권력의 범주 속에는 엄마 에스더가 가지고 있던 교내에서의 영향력도 포함된다. 단순히 이 사건 이후에 두 사람을 대하는 학교 측의 태도만 보더라도 완전히 다름을 쉽게 알 수 있으니 말이다. 권력의 유무, 인종의 차이 양쪽의 문제에서 모두.

04.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두 사람 사이에서 권력과 인종의 차이로 유발된 사회적 문제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할아버지 애런과 폴, 아버지 어빙(제레미 스트롱 분)과 폴 사이에서는 각각 세대 차이와 가정 폭력과 관련한 이슈가 그려지고 있다. 이는 반대로 사회적 차별이 구조화할 수 있는 부유한 세력과 백인 인종에 해당하는 집안과 인물이 모두 도덕적이고 시대를 앞서가는 그룹이라는 환상을 영화 속에서 깨뜨리는 요소가 된다.

먼저 세대 차이에 대한 이야기는 영국의 리버풀이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그려진다. 할아버지 애런의 입장에서는 이 도시가 우크라이나 태생인 그의 어머니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폭력을 당한 이후 목숨을 걸고 탈출해 미국에 당도하기 직전에 다다른 도시다. 역사적으로 유대인 커뮤니티가 받아온 억압과 어머니의 아픈 세월이 남겨진 공간인 셈이다. 하지만 폴에게 있어 리버풀은 그저 비틀즈로 대변되는 도시일 뿐이다. 실제로 리버풀은 비틀즈의 고향이기도 하다. 두 사람 사이의 세대 간격은 겨우 3세대, 시간으로 따지자면 70~80년에 불과하지만 하나의 도시를 통해 떠올리는 기억이 이렇게 다른 것이다.

한편 폴의 마약 흡연 사실이 아버지 어빙에게 알려진 직후의 장면을 유심히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폴은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사색이 된 얼굴로 2층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문을 잠그고 욕실 바닥에 쪼그려 눈물을 흘릴 정도로 커다란 공포에 휩싸인다.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엄마에게 '내가 마약이 나쁜 것인지 어떻게 알겠느냐'고 큰소리를 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이전까지 점잖고 친구같이 보이던 어빙 역시 폴의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폴이 숨어든 화장실로 달려가 문을 박살내고 벨트를 풀어 폴을 향해 있는 힘껏 내려치기 시작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두 사람을 통해 제시되는 두 이야기의 결은 분명히 다르다. 하지만 이 두 이야기는 자칫 다른 작품에서도 계속되어 왔던 사회적 문제의 동어 반복을 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장면들이다. 결과적으로 마약 사건으로 인해 애런 역시 마음을 돌리면서 폴은 강제로 사립 학교 전학을 당하게 되지만 말이다.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아마겟돈 타임> 스틸컷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아마겟돈 타임> 스틸컷

▲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아마겟돈 타임> 스틸컷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아마겟돈 타임>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5.

앞서 할아버지 애런에 대해 '한 발 벗어나 있는 인물'이라는 표현을 한 바 있다. 이 표현은 단지 다른 성인 그룹과 달리 폴의 꿈을 지지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 역시 후반부에 들어 이를 다시 한번 강조하며 메시지를 담아내고자 하는 시도를 한다. 폴과 애런이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는 공원에서의 장면이다. 학교에서의 생활로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 사립 학교에서 친구들이 흑인을 대상으로 '니그로(흑인을 비하하는 단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폄하할 때 폴이 자신은 그냥 가만히 있는다고 대답하자 애런은 욕설을 섞어가며 절대로 그래서는 안된다고 남자답게 맞서라고 힘주어 강조한다. 안소니 홉킨스의 열연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앞서 이야기 했던 바와 같이, 유대인 커뮤니티가 겪어온 직접적인 혐오와 차별, 이의 곁에서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던 간접적인 폭력의 연장선에 대한 가르침이 하나다. 영화의 중간에 식사 장면에서 할아버지는 폴의 이름을 두고 유태인스럽지 않아서 얼마나 좋냐는 말까지 하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적어도 아직 그의 삶까지는 역사 속 고통에 대한 기억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있는 그대로의 교훈. 세상이 원하는 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제대로 된 예술가가 되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세상에 펼치고 싶다면 명확한 가치관과 제대로 된 도덕관을 지니고 걸어가라는 당부일 것이다.

06.

이 글에서 모두 다루지는 않았지만 작품의 후반부로 향하면 여기에서 다룬 다양한 장면들과 가치관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한번 강조되고 또 전복되기도 하며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점점 더 명확하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실제로 제임스 그레이 감독은 뉴욕 브루클린 출신으로 우크라이나계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영화에는 일정 부분 그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런 주제들에 대해 이렇게까지 명확하게 자신의 뜻을 전달할 수 있는 데는 자신의 삶 전체를 관통하며 오랜 시간 고민해 온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제 기간 중 첫 상영이었던 6일 오전, 상영에 앞서 마이크를 쥐고 무대에 올랐던 허문영 집행위원장은 이 작품 <아마겟돈 타임>을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가장 기대해도 좋을 작품 중 하나로 꼽았다. 지난 칸 영화제에서 관람했던 작품들 가운데 마음을 울린 작품이었다는 짧은 소회와 함께 말이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 직후 비슷한 마음이 들었다. 이번 영화제를 통해 제임스 그레이 감독을 사랑하게 될 관객들이 다시 한번 늘어나겠구나 하는 생각도.
영화 부산국제영화제 아마겟돈타임 제임스그레이 앤헤서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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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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