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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레인보그 플래그.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레인보그 플래그.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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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현지시간), 슬로베니아 의회가 동성 커플의 결혼과 이들의 자녀 입양을 법제화하는 가족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프랑스와 독일에 인접해 있는 슬로베니아는, 구 공산권 국가 가운데 최초로 동성결혼의 완전한 법제화를 이룬 국가가 되는 셈이기도 하다. 이는 슬라브계 국가 최초이자, 동유럽 국가 가운데 최초로도 꼽힌다.
  
슬로베니아 의회는 이 법안을 48대 29로 통과시켰다. 재적 90명 의원 중 78명이 참석한 표결에서 48명은 찬성표를, 29명이 반대표를, 1명이 기권표를 던지며 개정안이 무리 없이 통과되었다. 

이번 법안은 지난 7월, 슬로베니아 대법원이 현행 가족법이 위헌이라고 판시하면서 마련된 것이다. 당시 대법원은 결혼을 남성과 여성의 결합으로 규정한 가족법 조항이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라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가족법의 해당 조항을 즉시 무효화되었고, 국회는 6개월 안에 해당 조항을 수정해야 했다.
 
슬로베니아는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구성국으로, 구 공산권 국가 가운데서는 최초로 동성결혼을 법제화하게 되었다. 슬로베니아뿐 아니라 동유럽 국가들의 성소수자 정책은 점차 진보하고 있다. 헝가리, 체코,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등이 이미 동성 간의 시민결헙을 허용했다. 체코에서는 동성결혼 법제화에 관한 논의도 2021년 국회 표결 직전까지 갔다가 회기 일정상 보류된 바 있다. 동유럽 국가는 아니지만 구 공산권에 속하는 에스토니아 역시 2016년 시민결합을 법제화했다.

동유럽 내 성소수자 인권 보호, 과거엔...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차 강과 중앙시장(자료사진)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차 강과 중앙시장(자료사진)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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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동유럽과 구 공산권 국가에서 성소수자의 인권 보호가 언제나 긍정적인 발전의 길만 걸어온 것은 아니다. 언급했듯 동성 간의 결혼을 법제화한 것은 슬로베니아가 처음이고, 불가리아, 라트비아, 폴란드, 루마니아 등에서는 아직 시민 결합조차 법제화하지 못했다. 특히 불가리아와 라트비아, 폴란드는 혐오발언 금지법도 아직 제정하지 못했다.
 
특히 이들 국가 가운데에는 동성 간의 결혼을 헌법으로 금지하는 경우도 있다. 리투아니아와 불가리아가 독립 당시부터 그랬고, 라트비아, 크로아티아 등도 헌법상 결혼은 남성과 여성의 결합으로만 규정하고 있다.
 
최근 국내 정치에서 극우파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는 헝가리나 폴란드의 경우에는 더욱 심각하다. 헝가리는 동성 간의 시민결합을 허용하고 있는 국가이지만, 2021년 반성소수자법을 제정하며 미성년자에게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처벌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탄압이라는 국제사회의 비판이 이어졌지만, 헝가리 의회는 이 법안을 압도적으로 가결했다. 2020년부터는 트랜스젠더의 성전환 역시 법적으로 불가능하게 됐다.
 
폴란드는 헌법상 동성결혼을 금지하고 있으며, 시민결합 역시 불가능하다. 특히 폴란드는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지 않았으며, 주로 보수적인 동남부 지역을 기반으로 "성소수자 이데올로기 배제구역(LGBT-free zone)"이 설정되어 있다. 지방정부의 결의에 따라 성소수자 관련 이데올로기의 확산을 금지하고, 이에 따라 관련 표현이나 행사를 완전히 금지한 것이다. 2020년까지 폴란드 인구 3분의 1에 해당하는 지역이 이 운동에 동참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은 유럽연합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제지되고 있다. 유럽연합은 폴란드의 '성소수자 이데올로기 배제구역'에 대한 기금 지원을 중단했다. 유럽 내 일부 도시는 해당 도시들과의 자매결연을 중단했다.
 
법적인 근거도 충분하다. 유럽연합은 헌법 성격의 조약인 리스본 협정에서 '유럽연합 기본권 협정'이 유럽연합과 그 회원국을 법적으로 구속한다고 명확히 선언했다. 유럽연합 기본권 협정의 21조에서는 성적 정체성에 따른 모든 차별을 국가가 금지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2000년에 마련된 '고용과 직업에서의 평등한 대우를 위한 기초 지침'에서는 모든 유럽연합 회원국이 고용에 관한 차별금지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에 따라 유럽연합 회원국은 모두 전사회적 차별금지법을 도입했으며, 이탈리아와 라트비아, 폴란드만이 부분적 차별금지법을 도입했다.
 
유럽연합 기능조약의 10조에서는 유럽연합이 성정체성에 기반한 차별과 싸우기 위한 적극적 의무를 가진다고 선언했으며, 19조에서는 유럽의회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이를 위한 법률을 적극적으로 입안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유럽 사법 재판소에서는 '생물학적 성(sex)'은 성별 재지정 수술을 받은 트랜스젠더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판시했다. 이러한 판결에 따라 유럽연합은 트랜스젠더 역시 성 정체성에 기반한 차별금지 대상에 포함되도록 지침을 변경했다.

슬로베니아 결정의 의미 

유럽연합 회원국 가운데에는 여전히 동성결혼이나 동성 간의 시민결합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들이 있지만, 유럽연합의 지침에 따라 다른 회원국에서 성사된 혼인이나 시민결합의 권리는 인정하고 있다. 유럽연합의 적극적인 역할을 통해 성소수자에 대한 제도적인 차별은 완화되고 있고, 유럽에 거주하는 성소수자 시민의 삶 역시 개선되고 있다.

동유럽에서 최초로 동성결혼을 법제화한 슬로베니아의 사례는, 2019년 아시아에서 최초로 동성결혼을 법제화한 중화민국(대만)의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아시아에는 여전히 특히 군대 내에서 동성애를 법적으로 처벌하는 국가들이 다수 남아 있다. 그러나 중화민국의 사례 이후 태국에서도 동성결혼 법제화에 대한 시도가 이어졌고, 일본에서는 일부 지자체 수준에서 시민결합을 인정하고 있다.
 
여전히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강하게 남아 있는 동유럽에서, 슬로베니아의 사례가 갖는 의미는 크다. 슬로베니아의 진보와 발전의 기반이 된 유럽연합의 강력한 규제와 추동이 갖는 의미도 크다. 슬로베니아의 사례도, 중화민국의 사례도 하나의 마중물이 되길 바란다. 이번 법제화가, 동료 성소수자 시민이 받는 차별과 혐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는 움직임의 시작이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슬로베니아, #동성결혼, #차별금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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