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욕창>은 환자 돌봄의 곤경을 다룬 탁월한 영화다. 뇌출혈로 쓰러진 길순(전국향 분)에게 욕창이 생기면서, 그의 간병을 둘러싸고 저마다 위태로웠던 가족과 간병인의 뇌관이 동시에 폭발해버리는 간병 잔혹사라 할 수 있겠다. 특히 간병(돌봄)이 여성에게 불공정하게 부과되는 부정의가 선명히 드러난다.
 
영화는 엄마의 간병을 겪었던 심혜정 감독의 경험에 기반하고 있다. 영화 속 딸 지수(김도영 분)는 심 감독의 페르소나인 셈인데, 심 감독뿐 아니라 딸인 사람, 특히 부모 간병(돌봄)을 감당하고 있거나 감당했던 사람 모두의 페르소나라 할 수 있다.

아픈 사람의 지워진 목소리
 
 영화 <욕창> 스틸이미지.

영화 <욕창> 스틸이미지. ⓒ 필름다빈

 
영화는 돌보는 사람의 곤경을 드러내기 위해 돌봄을 받는 길순의 목소리는 철저히 소거시킨다. 뇌출혈로 움직일 수 없게 된 그의 몸과 사라진 목소리는 '살아있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강하게 은유한다. 씰룩이는 얼굴 근육과 '환장하겠다는 듯' 굴리는 눈동자는 '나 아직 살아있어'를 외치고 있지만, 돌보는 이 누구에게도 가닿지 않는다. 요양원에 있으나 집에 있으나, 몸과 목소리가 지워진 아픈 사람은 그림자로만 존재한다.

창식(김종구)은 길순의 남편이다. 공무원 퇴직 후 연금으로 살아가는 그는 번듯한 주택을 소유한 중산층 가정의 가장이다. 만일 길순이 쓰러지지 않았다면, 그럭저럭 노년을 꾸려갔을 터다. 창식은 어떻게든 아내 길순을 돌보려고는 하지만 단, 타인의 손을 빌려서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아내를 먹이고 씻기고 눕히는 간병인은 '조선족' 불법체류자인 수옥(강애심 분)이다. 그는 가난한 여자의 노동에 기대어 아내를 돌보면서 "지킨다"고 믿는다.
 
창식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엔 애처로움이 묻어난다. 어찌 보면 창식 역시 그저 딱한 노인이라는 면에서 연민하는 것일 텐데,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창식이 간병 학대를 하지 않고 아내를 버리지 않은 남편이라고 해서, 그의 가부장적 특권-아내를 직접 간병하는 일에 서 열외이고, 아직 충분히 건강하면서도 수발들 여자 없이 사는 일을 큰 곤경으로 여긴다-마저 연민하기는 어렵다.
 
만일 입장이 바뀌어 창식이 길순의 처지가 되었다면, 그를 간병하는 일로 가족이 일대 소란과 갈등을 겪었을까? 터럭만큼의 의심도 걱정도 없이, 길순에게 간병의 책무가 부과되었을 것이다. 길순이 창식처럼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 가족들에게 "나는 어떡하니"라며 푸념을 늘어놓을 일도 없었을 테고 말이다. '여성들은 당연히 남을 돌볼 줄 알아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과 문화적 기대 속에' 놓여 있다.
 
길순처럼 아내가 병상에 누워버리거나 혹은 사망할 경우, 남자들은 즉각 스스로를 돌볼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간주되어 돌봄을 받아야 한다고 믿어진다. JTBC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에서 제호(천호진 분)는 아내가 죽고 장애의 몸의 되자 즉각 재혼함으로써(자식들도 협조한다) 돌봄 받을 권리를 획득한다. 몸을 전혀 못 움직이는 것이 아니지만, 불편한 몸을 돌봐 줄 여자를 구함으로써 자기 돌봄을 대리시킨다. 이런 경우가 허다하다 보니 사회는 남자들의 자기 돌봄 무능력을 지위로 인정하게 되었다.
 
남편이 죽고 아내가 남으면 걱정하지 않지만, 아내가 죽고 남편이 남으면 큰일로 생각한다. 부부로 살다 한 배우자가 먼저 떠날 경우 상실감은 마찬가지일 테지만, 남편이 혼자 남으면 시급히 대책이 마련된다. 마치 남자는 살림할 능력이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 살림이 '실리는 일'이라는 뜻임을 새겨본다면, 남자 여자 누구든 '살리는 일'에 나서야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자 윤리인데도 말이다.
 
돌봄의 윤리
 
 영화 <욕창> 스틸 이미지.

영화 <욕창> 스틸 이미지. ⓒ 필름다빈

 
평생 돌봄을 받고 살았어도 병든 아내를 잘 돌보는 남편도 있다. 책 <치매니까 잘 부탁합니다>에 등장하는 93세의 늙은 남편 노부토모씨는 치매 아내를 헌신적으로 돌봤다. 아내의 속옷을 빨고 장을 보고 아내가 병증으로 반복하는 지청구를 감내한다. 그가 이렇게 아내를 돌보는 데에 다른 이유 같은 것은 없다. 지금까지 아내가 자기를 돌보았으니 이제는 자기가 아내를 돌볼 차례라는 공동체 감각이 있을 뿐이다.
 
그는 장거리 간병으로 엄마를 돌봐야 하는 딸의 곤경을 딱하게 여기고, "네 엄마는 내가 돌보마. 너는 네 일을 하라"고 격려한다. <욕창>에서 딸에게 돌봄을 전가하는 아버지 창식의 나약한 가부장과는 대비된다. 이들 아버지와 딸은 정부의 돌봄 조력을 십분 활용하면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엄마의 고된 간병을 함께 해냈다. 아픈 가족이 출현했을 때 어떤 간병은 가족애를 재구축하게도 한다. 가족 중 한 사람, 특히 딸이나 아내에게 고통을 떠넘기지 않고 돌봄을 수행한다면, 노부토모씨 가족처럼, 한탄과 원망 대신 격려와 위로가 생성되는 강력한 연대체로서의 가족을 재구성할 수도 있다.
 
의사이면서 10년간 아내를 돌본 아서 클라인먼의 돌봄 기록 <캐어(Care)>도 돌봄에 대한 윤리를 성찰하게 한다. 동료였던 아내가 갑자기 알츠하이머에 걸리면서 아서의 가족 역시 불운에 휩싸인다. "오직 병의 경과만 보았을 뿐 병의 경험을 보지 않은" 의사 아서가 의학 지식이 있다고 아내를 잘 돌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아내를 돌보면서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지식만 가르쳤지 돌봄은 삭제했던 의료 교육의 부정의를 통감했다.
 
아내를 돌보겠다고 작정했다고 돌봄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질 리 없다. 알츠하이머라고 단일한 병증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그 역시 "수많은 상승과 하강이 동시에 일어나며 시간, 건강 상태, 개인적 환경에 따라 관계를 강화되기도 약화되기도"하는 돌봄의 고비를 수차례 넘겼다.
 
그는 무엇보다 아내와의 관계 즉 돌보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과의 관계를 중시했다. 돌보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의 위계는 돌봄을 망친다. 아내를 무능한 알츠하이머 환자로 규정하지 않고 그에게서 인간으로서의 주도권을 빼앗지 않도록 노력했다. 돌봄 내내 아서를 가장 많이 위로하고 응원한 건 바로 환자인 아내였다. 아서와 그의 아내는 알츠하이머라는 질병을 함께 겪어낸 것이다. 돌봄이 지나고 나면 아서의 통찰이 찾아온다. "돌봄은 돌보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 모두의 영혼이 개입"된다.
 
나는 창식이 노부토모씨나 아서 클라인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돌봄은 각기 처한 사정에 따라 천차만별의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봄을 이들처럼 "내가 할 일이 있었고 했을 뿐"이라는 감각으로 열어나가지 않는다면, 그가 아픈 사람으로 받게 될 돌봄 또한 그의 아내의 것처럼 비참할 것이다.
 
저마다 "비탈에서 균형잡기"를 하고 있는 우리의 돌봄은 위태롭다. 물론 돌봄 정책의 공공의 책무성을 강화하고, 방치되는 돌봄이 없도록 보다 촘촘한 설계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가족 간, 공동체 간, 상호 간 맺는 관계들을 제외한 채 공공 돌봄이나 정책의 혁신만 논하는 것은 공허하다. '너도 늙는다' 돌봄은 우리 모두의 역할이 되어야 한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 게시
<욕창> 돌봄 간병 돌봄 정의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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