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9.10 17:43최종 업데이트 22.09.10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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쾰른 중앙역에서 바라본 쾰른 대성당 모습. 하늘로 솟은 두 개의 첨탑이 눈에 띈다. ⓒ 윤한샘

   
'쾰쉬는 우리가 마실 수 있는 유일한 언어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북서쪽으로 기차를 타고 라인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따라가다 보면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자 베를린, 함부르크, 뮌헨에 이어 네 번째로 큰 도시인 쾰른(Köln)을 만날 수 있다. 기원전 38년부터 로마와 게르만족을 나누는 최전방 전선이었고 중세 시대 한자 동맹의 중심지였던 이곳은 영주와 교황의 억압에 맞서 자유를 갈망하던 길드의 요람이기도 했다. 


쾰른 중앙역에 도착하면 누구나 성스러운 마음을 갖게 된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교회인 쾰른 대성당 때문이다. 하늘로 솟은 두 개의 첨탑, 거대한 문과 그 위에 서 있는 무표정한 석상들, 쾰른 대성당은 웅장함 아니 경외감 그 자체다. 쾰른 대성당 앞에서는 종교가 없는 나조차 두 손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동방박사의 유골을 안치하기 위해 지어진 쾰른 대성당은 중세 시대 수많은 순례객들의 성지였고 지금도 수백만의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다. 대성당을 품에 안고 사람들 사이를 걷다 보면 곳곳에서 앙증맞은 맥주잔을 든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황금색 액체를 마시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높이 153미터 첨탑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잠시, 어느새 내 손에도 그 작은 맥주잔이 들려있는 게 아닌가. 맥주를 들어 황금빛을 응시하자 살짝 굴절된 로고가 선명하게 보였다. 짙은 푸른색 옷을 입은 가펠 쾰쉬(Gaffel Kölsch)다. 

에일인가 라거인가
 

가펠쾰쉬 ⓒ 윤한샘

 
쾰쉬는 쾰른의 맥주를 의미한다. 투명한 황금색과 청량한 탄산감 그리고 깔끔한 목 넘김을 가진 이 맥주는 얼핏 보면 페일 라거와 다름없다. 하지만 투명한 황금색에 속지 말자. 쾰쉬는 에일 맥주다. 만약 이 맥주를 마신 후 좋은 라거 맥주라고 '엄지척'하면 쾰른 양조사들은 큰 상처를 입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여타 에일처럼 건자두나 바나나 같은 과일향이 나지도 않는다. 쾰쉬는 라거처럼 깔끔하다. 아니, 도대체 이것은 에일인가 라거인가? 

비법은 저온에서 장기간 숙성시키는 라거링(lagering)에 있다. 쾰쉬는 에일 효모로 발효되지만 라거링을 하면 향미가 깔끔해진다. 아이러니하게 쾰쉬가 이런 특성을 가진 건, 라거 때문이다.

원래 에일 맥주를 만들던 쾰른의 양조사들은 19세기 말 황금색 라거의 확산에 맞서 대응책을 골몰했다. 공업 도시 쾰른 노동자를 위한 맥주 또한 필요했다. 그 결과 1906년 수너(Sünner)는 에일 효모를 사용하되 '라거스러운 맥주'를 만드는 데 성공했고 1918년부터 이런 스타일의 맥주를 쾰쉬라고 불렀다. 물론 처음부터 쾰쉬가 쾰른을 대표했던 건 아니었다. 당시에는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작은 맥주에 불과했다.

세계대전을 거치며 독일의 다른 도시처럼 쾰른의 양조장도 대부분 파괴된다. 하지만 이때가 쾰쉬에게는 기회의 순간이었다. 새로운 양조장들은 쾰른의 정신과 문화를 담은 맥주를 만들기로 하고 쾰쉬를 양조했다. 이 덕에 쾰른은 라거의 공습에서 비껴갈 수 있었고 다른 독일 도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맥주 문화도 갖게 된다. 

슈땅에, 쾨베스, 크란츠
 

쾰쉬를 전문적으로 서빙하는 '쾨베스'가 200mL 원통형 유리잔 '슈땅에'를 한꺼번에 꽂은 전용 쟁반 '크란츠'를 들고 있다. ⓒ 윤한샘


쾰른 맥주 문화의 첫걸음은 맥주잔이다. 쾰쉬는 슈땅에(stange)라 불리는 200mL 용량의 원통형 유리잔에 마신다. 이는 노동자들을 위한 배려였다. 입구가 좁고 몸통이 긴 슈땅에는 쾰쉬를 한 번에 마실 수 있어 노동자들이 갈증을 해소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쾨베스(Köbes)와 크란츠(Kranz)도 쾰쉬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다. 쾨베스는 쾰쉬를 전문적으로 서빙하는 사람을 의미하며 크란츠는 여러 잔의 슈땅에를 한꺼번에 꽂을 수 있는 전용 쟁반을 말한다. 쾨베스는 크란츠를 들고 다니며 맥주가 비어있는 테이블에 쾰쉬를 가져다준다.

처음 쾰른을 방문하는 사람은 주문 없이 쾰쉬가 추가되는 이런 문화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공짜는 아니니 좋아할 필요는 없다. 만약 맥주를 원하지 않을 경우, 비어 코스터(beer coaster)를 슈땅에 위에 올리거나 쾨베스에게 맥주를 주문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전달하면 된다. 

'쾰쉬'를 보호하기 위한 조건과 법도 존재한다. 1986년 쾰른 브루어리 협회는 쾰쉬에 대한 규약을 제정해 스타일 가이드라인과 원산지 보호를 받도록 했다. 이 규약에 따르면 쾰쉬는 상면 발효 공법으로 만들어야 하며 밝은 황금빛 색을 띠어야 한다. 필터링이 되어 깨끗해야 하며 몰트와 홉의 향이 적절히 조화되어야 한다. 또한 독일 맥주 순수령을 따라야 하며 반드시 쾰른 지역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이런 노력 덕에 쾰쉬는 1997년 '지리적 표시 보호'(PGI, protected geographical indication)에 의해 유럽연합(EU) 내에서 법적으로 보호를 받게 되었고 현재 쾰른 맥주 시장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다른 독일 도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전형적인 쾰쉬, 가펠 쾰쉬
 

반드시 가봐야 할 쾰쉬의 성지 '가펠 암 돔' ⓒ 윤한샘


쾰른에는 원조 쾰쉬인 수너를 비롯해 프뤼, 돔 쾰쉬 등 다양한 쾰쉬가 존재한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맥주는 단연 가펠 쾰쉬다. 가펠(Gaffel)은 1908년 베커 형제에 의해 설립된 쾰쉬 브루어리다.

가펠이라는 이름은 쾰른에서 자유를 갈망했던 길드 문화와 연관되어 있다. 쾰른은 대표적인 한자동맹도시이자 자유도시로, 영주와 교회로부터 저항한 길드 연합체가 존재했다. 이들은 투표를 통해 의사 결정을 했는데, 이때 사용한 포크의 이름이 바로 가펠이다. 베커 형제는 가펠이라는 이름을 통해 권력에 대항하고 자유를 쟁취하고자 했던 쾰른의 정신을 담고자 했다.  

가펠 쾰쉬는 전형적인 쾰쉬의 모습을 갖고 있다. 4.8% 알코올 도수와 아름답고 투명한 황금색 그리고 깔끔하고 청량한 목 넘김을 자랑한다. 과거에는 에일 효모에서 나오는 청사과향이 있었으나 지금은 부드러운 꿀향과 섬세한 풀향이 혀와 코를 즐겁게 한다.

화룡점정은 역시 슈땅에다. 가펠 쾰쉬는 200mL 슈땅에로 마셔야만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마치 뚝배기에 담긴 김치찌개나 양은 냄비에 먹는 라면과 같은 이치랄까? 섭씨 5~7도의 찬 온도의 가펠 쾰쉬를 슈땅에로 쭉 들이키면 그 어떤 액체보다 맛있다. 
     
쾰른 대성당을 바라보고 있는 가펠 암 돔(Gaffel am Dom)은 반드시 가봐야 할 쾰쉬의 성지다. 근처만 가도 쾰쉬의 포스를 느낄 수 있다. 저마다 가펠 로고가 붙어있는 슈땅에를 들고 수다를 떨거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용기 내어 가펠 쾰쉬를 주문해 보자. 웃음을 띤 쾨베스가 반갑게 맞아줄 테니. 꼭 자리에 앉지 않아도 괜찮다. 건물 벽에 기대어 대성당을 바라보며 쾰쉬를 마시면 그보다 자유로울 수 없다. 

쾰른에는 '쾰쉬는 우리가 마실 수 있는 유일한 언어'라는 시답지 않은 농담이 있다. 쾰쉬가 상황에 따라 쾰른의 사람, 쾰른의 언어, 쾰른의, 쾰른의 맥주 네 가지 의미가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표현이다. 독일답게 농담은 별로 재미없지만 그 속에 쾰른의 자존심이 숨어있다는 걸 알아채기는 어렵지 않다.

쾰쉬는 절대 권력에 대항해 자유를 쟁취하고자 했던 쾰른의 정신을 품고 있다. 만약 맥주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면 그 주인공은 쾰쉬일 것이다. 맥주로 자유롭고 싶은 자여, 여기에 길이 있다. 푸른색 가펠 쾰쉬로 지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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