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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0일(현지시각) 서거한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은 냉전을 종식시킨 역사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고르바초프는 1991년 12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후 고르바초프 재단을 설립해서 세계평화를 위한 여러 활동을 전개했다. 이 시기 고르바초프는 김대중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1993년 9월 27일 처음 만났다. 그후 두 사람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각종 활동을 함께 전개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인류 보편적인 가치인 '민주주의, 자유, 평화'를 위한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고 이를 위해 용기 있게 실천한 정치지도자로서 높이 평가했다. 민주주의와 자유 그리고 평화가 국제적으로 흔들리고 점점 더 훼손되고 있는 현재의 위기를 고려할 때 두 사람의 우정과 가치 공유는 생각해볼 지점이 많다. 필자는 두 사람이 남긴 몇 몇 자료를 통해서 이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점진적인 방식의 냉전종식을 원했던 고르바초프

먼저 고르바초프와 김대중이 처음 만났을 당시의 대화록을 살펴보도록 하자. 1992년 12월 대선 패배 직후 정계은퇴를 선언한 김대중은 민간 자격으로 국제평화외교를 전개했다. 그 일환으로 1993년 9월 26일부터 9월 29일까지 러시아를 방문했다. 그리고 9월 27일 오후 4시(현지시각) 모스크바에서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과 만났다. 김대중은 고르바초프를 만나서 다양한 국제 현안에 대해서 논의하고 설립 준비 중인 아태평화재단과 고르바초프재단과의 협력 방안 등을 논의했다.
 
고르바초프를 처음 만났을 때 촬영한 사진이다
▲ 1993년 9월 27일 고르바초프와 만난 김대중과 이희호 고르바초프를 처음 만났을 때 촬영한 사진이다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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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은 월간중앙 1994년 1월호에서 당시 고르바초프와의 만남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했다. 우선 김대중은 냉전을 종식시킨 고르바초프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면서 20세기 최대의 인물(대화록에 있는 표현)이라고 격찬했다. 그와 함께 이렇게 역사적인 업적을 남긴 고르바초프의 사무실과 주변 환경이 열악한 것에 크게 놀라면서 국제사회가 그에 대한 두터운 예우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김대중은 고르바초프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러시아 내에서의 정치적 성공 여부를 떠나 20세기에서, 아니 어떻게 보면 인류 역사상 전 세계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공헌을 한 사람이다. 당신은 냉전을 종식시킴으로써 인류를 핵전쟁의 공포로부터 구하는 데 공헌했다.

당신은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통해 소련과 동유럽의 국민들에게 자유를 주어 공산주의가 소멸하고 민주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하는 길을 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 그리고 당신은 독일의 통일에 협조하는 결단을 내림으로써 유럽의 지도와 역학 관계를 크게 바꿔놓았다.
 
김대중은 고르바초프의 역할과 역사적 공헌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 후에 고르바초프에게 이에 대한 그의 견해를 요청했다. 이에 대한 고르바초프의 답이 대화록에 나와 있다. 고르바초프의 답이다.
 
나의 역할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 하겠지요. 다만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냉전을 종식시켰으나 그렇게 빨리 종식될 줄은 몰랐습니다. 소련에서 처음으로 자유가 왕성해지자 그것이 국내 혼란을 초래했는데 그 혼란의 정도를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준비도 없었지요. 소방대가 불을 죽였으나 그후 나가는 출구를 찾지 못했습니다. 체제가 붕괴하게 되어 경제적인 유대뿐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유대마저 무너져버렸지요.
 
이 대화록을 보면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해체와 냉전 종식은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의 빠른 속도로 이뤄졌다고 판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르바초프가 급격한 체제 붕괴 및 변화로 인해서 발생한 사회경제적 혼란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원래 고르바초프는 냉전의 종식과 관련된 소련의 체제 전환을 연착륙 방식의 점진적 이행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 대화록은 냉전 종식에 관한 고르바초프의 솔직한 심경이 그대로 담겨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1993년 9월 27일 대화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김대중과 고르바초프의 대화록 1993년 9월 27일 대화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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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자유 그리고 협력적 리더십을 강조하다

이때 처음 만난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로 발전해 국제평화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함께했다. 두 사람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신봉하고 대화와 상호이해에 기반한 협력적 리더십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일치했다. 2006년 고르바초프는 김대중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자유와 민주주의 같은 가장 숭고한 가치들을 지켜내고자 노력하시는 분이죠. 저는 김 전 대통령에 대해 마치 친척과도 같은 친밀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우 가까운 친구입니다. 단순히 인간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지성적인 면, 이데올로기적인 면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저는 이러한 우리의 우정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르바초프는 김대중이 자신처럼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해 깊은 이해를 하고 이것의 실현을 위해서 헌신한 정치가라는 점에서 강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고르바초프는 2006년 김대중과의 대담에서 냉전을 종식시킨 자신의 경험과 당시 한반도 관련 상황을 비교 평가하면서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이 협력적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는 결국 냉전을 종식시키긴 했지만, 이런 가정을 해 보고 싶군요. 만일 냉전체제 당시 소련과 미국이 관계를 정상화하지 않았다면, 또 소련과 중국 사이의 관계도 정상화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도 냉전체제 당시의 난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간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제 냉전의 시대는 지났습니다. 지금 중부, 동부 유럽에서는 민주주의 과정이 진행되면서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데요. 이러한 조류는 이제 한반도에서도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한반도에는 아직까지도 냉전의 장벽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한반도 분단에 참여한 국가들은, 남북한 국민들이 통일된 국가에서 살고자 하는 바람을 알아야 하며, 한반도 분단 해소를 위해 책임감을 가지고 그들이 해야 할 역할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르바초프는 대립과 갈등을 본질로 한 냉전체제 속에서도 상호이해와 인정의 기초인 관계정상화가 있었기 때문에 난제를 해결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북핵 문제로 불거진 한반도 관련 여러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위와 같은 국제관계 조성이 필요하다고 고르바초프는 말하고 있다. 이는 동북아시아에서의 균형과 협력을 어렵게 하는 패권적 리더십을 경계한 것으로서 김대중의 견해와 같았다.

고르바초프와 김대중의 우정과 신뢰

앞의 인용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김대중은 고르바초프를 인간적·정치적으로 높이 평가했다. 이것을 확인해줄 수 있는 증거는 많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김대중자서전 추천사 3명 중에 한 명이 바로 고르바초프라는 사실이다. 2010년 출간된 김대중 자서전에는 생전의 김대중이 가깝게 지냈고 존중했던 3명의 국제적인 지도자의 추천사가 있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바이체커 전 독일 대통령 그리고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이렇게 셋이다.

고르바초프는 '탁월한 정치인, 특별한 운명을 지닌 인간'이라는 제목의 추천사에서 "지난 20여 년 동안 김대중 대통령과 저는 깊은 이해와 가까운 우정의 협력 관계로 맺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김대중 대통령이 중요하고도 독보적인 정치인이자, 사상가로서 민주주의 원칙에 헌신했던 그야말로 특별한 운명을 가진 한 인간임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존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즘 국제사회는 각종 혼란이 심화되고 있고 전쟁과 군사적 긴장이 이어지면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한반도정세 역시 태풍전야의 고요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향후 정세를 깊이 우려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 민주, 자유, 평화를 위한 전 세계인의 의지와 실천 그리고 이를 위한 정치적 리더십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 면에서 고르바초프와 김대중의 우정 그리고 가치 공유는 현재에도 앞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김대중도서관이 공개한 고르바초프와 김대중의 대화록 링크 

덧붙이는 글 | 사회학 박사이며 김대중 연구자입니다. 김대중 재평가를 위한 김대중연구서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태그:#고르바초프,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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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박사이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사료연구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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