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란 계절의 정의를 어떻게 내릴까, 많고 많은 형용사와 수없이 간결한 명사를 다 끌어와 묘사한다 해도 '뜨거움'이란 한 단어에 그 모든 것들은 이내 물러설 듯하다. 여기서 '뜨거움'이란 대단히 중의적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기후의 뜨거움 외에도 건드리면 언젠간 폭발할지도 모르는, 내면에서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무시무시한 '뜨거움'도 포함된다.

이런 이유로 여름은 날씨만 놓고 본다면 어디론가 떠나기 가장 힘든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가 모두들 그렇게 떠나기를 갈망하는 계절이 돼 버린 거 같다.
주위를 한번 살펴보시라, 여름이면 누구든 어디론가 떠나려고 하지 않는가. 

떠나려는 사람들에게 목적지는 이미 중요하지가 않다. 그곳이 산이든, 바다든, 험준한 계곡이든 일단은 집을 떠나고 본다. 뜨거움을 피해 끓어오르는 또 다른 뜨거움을 발산할 수 있는 어떤 곳을 찾아서 말이다.

2002년 월드컵 열풍이 휩쓸고 간 여름의 끝
 
 싸이 '낙원'이 수록된 앨범

싸이 '낙원'이 수록된 앨범 ⓒ (주)에셀인터네셔널

 
아마 '2002 월드컵'의 거대한 열풍이 온 나라를 휩쓸고 간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쯤으로 기억한다. 월드컵 덕분에 여름이면 당연시되던 '피서'를, 온통 축구의 뜨거움으로 대체해 버린 시간을 보낸 직후이기도 했다. 아마 당시 대부분의 국민들은 날것의 움직임이 전해 준 감동에 젖어 여름이면 으레 떠나야만 했던 관성에서 잠시 벗어나 그 여운을 오래 안방에서 즐기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벌써 20년 전이다. 라디오에서는 가슴이 웅장 해지는 노래들이 연일 흘러져 나왔고, 둘 이상의 성원이 이뤄진 곳에서는 남녀노소 누구랄 것 없이 축구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환상의 나날들이기도 했다. 

공식적으로는 조수미의 '챔피언'이, 또 대중적으로는 YB의 '오 필승, 코리아'나 월드컵의 열기를 느끼고 만들었다는 싸이의 '챔피언'이 한바탕의 축제가 끝난 뒤에도 그 광풍을 이어가며 전 국민이 몸을 들썩이게 하고 있던 여름의 끝, 혹은 가을의 시작쯤으로 기억한다. 한 노래가 마음을 사로잡으며 내게로 다가왔으니, 바로 싸이의 '낙원'이었다.

즐길 줄 아는 당신들이 진정한 챔피언이라며 전 국민을 들썩이게 만든 그 싸이의 노래가 맞나 싶었다. 그것도 '챔피언' 바로 다음의 후속곡으로. 노래라면 누구보다 가려들을 줄 아는 귀를 가졌다 자부하는 나였지만 이 노래가 싸이의 숨겨진 감성을 대변하는 노래가 될 줄은 그때는 정말 몰랐다.

무엇보다 순한 멜로디 라인을 필두로 여름을 겨냥한 노래들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특유의 발람함이나 청량감을 배제한 채, 세상 무해한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리라.

너와 단 둘이서 떠나가는 여행
너를 향한 내 마음 절대 안 변해
보고 또 봐도 또다시 나 반해
꿈만 같애 우리 둘이 함께
우린 서로 아무 말도 없이
이렇다 할 행선지도 없이
빡빡한 저 세상 등지고
너와 내가 나침반과 지도
하지 못했었던 말
한땐 다시 안 본다 했었나
허나 지금 우리 둘만 이 차 속에
어느덧 훌쩍 지나버린 고개
비와 바람도 세상과 사람도
우릴 막지 말라 우린 지금 빨라
우릴 갈라놨던 속세 탈출하는 찰나
우린 지금 아주 빨라

난 너와 같은 차를 타고
난 너와 같은 곳을 보고
난 너와 같이 같은 곳으로
그곳은 천국일 거야.

정신없이 달려온 곳 동해안
저 시원한 바닷소리가 곧 내 맘
너 때문에 잠 못 자고 꼬박 샌 밤
손발을 다 합쳐도 못샌다
말이 필요 없는 거야 같이 있는 거야
이제서야 밝히지만 내 주인은 너야
기분 좋아 둘이 장도 봐
밥은 내가 할게 쌀만 담궈 놔
피곤한지 너는 잠깐 자고
그 사이 나는 몰래 요리책을 파고
드디어 오붓하게 저녁식사를 하고
여기가 바로 지상 낙원
비와 바람도 세상과 사람도
우릴 막지 말라 우린 이제 달라
나 홀로 애태웠던 예전과는 달라
우린 이제 많이 달라

난 너와 같이 마주 하고
난 너와 같이 살아 숨 쉬고
난 너와 같이 같은 곳에서
여기가 천국인 거야 오

너로 인해 힘들었던 나의 어제가
술안주로 변해버린 오늘이구나
내 여자구나 이제 안 보낸다 절대
안겨봐 내 품에 포근해 소중해
나중에 다시 돌아가더라도
오늘 하루 곱씹으며 행복하게 살어
나중에 다시 돌아가더라도
오늘 하루 곱씹으며 나를 잊지 말어                                            

싸이/ 낙원, 가사

가사는 일상적인 읊조림 같지만 서로가 제대로 어울려 마치 여름날 한적한 어느 시골 작은 계곡을 흐르는 개울물 같고, 가사를 이끄는 익숙한 리듬은 절로 미소가 배어져 나오게 만든다. 이 노래를 남편, 그리고 아이와 함께 늦은 여행을 떠나는 차 안에서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내면의 소리가 밖으로 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오, 뭐 이런 노래가 있어, 굉장히 신선하지 않아?" 하고.

'쿨'의 이재훈이 피처링을 한 이 노래는 어쩌면 싸이보다는 이재훈의 지분이 더 대중들에게 각인된 노래라고도 볼 수 있겠다. 싸이의 랩에 이어지는 이재훈의 청아한 목소리는 그가 불렀던 다른 어떤 노래들보다 곡에 완벽하게 젖어들게 했다. 어디 그뿐인가, 젖어들어 곡이 가진 매력을 극대화시킨다. 

싸이라면 떠올릴 수 있는 무한대의 에너지를 의도적으로 배제했지만 이 노래를 들으며 어디론가, 그것도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동해의 어디론가 떠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꼭 연인끼리가 아니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알콩달콩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떠나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여름 여행을 유발하는 이 노래를 진정으로 느끼고 싶다면. 

그 시대를 대표하는 여름 노래
 
 ???????아무튼 이 노래를 처음 접한 그날 이후로 내 여름날의 최애 곡은 '낙원'이 되었음을 상기한다.

이 노래를 처음 접한 그날 이후로 내 여름날의 최애 곡은 '낙원'이 되었음을 상기한다. ⓒ pixabay

 
각 시대마다에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여름 노래들이 존재한다.

윤형주의 '조개껍질 묶어'를 기타로 연주하며 함께 둘러앉아 캠프 파이어를 하거나 키보이스의 '해변으로 가요'에 몰입해 별이 쏟아지는 해변을 찾아 헤매던 때가 있었다. 우리 대중가요사에서 여름 노래가 최전성기였던 시절, 듀스의 '여름 안에서' 나 클론의 '꿍따리 샤바라'를 들으며 신나게 저마다의 몸짓으로 춤을 추던 세대를 지났고, 전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킨 BTS의 '다이너마이트'나 '버터'의 영어 가사에 거부감 없이 녹아드는 젊은이들의 시대로 건너왔다. 그리고 우리가 그 변화를 채 인지하기도 전에 여름 노래들은 빠르게 변하고 있는 시대상을 가사에 녹여내고 있다.

우리는 여름 노래들을 통해 그 시대 청춘의 자화상을 읽는다. 여름에 가장 최적화된 표현이 '뜨거움'이고 뜨거움의 다른 이름이 '청춘'이기 때문이다. 2002년, 전 국민이 다시 못 올 것 같은 뜨거운 여름의 초입을 보낸 후 싸이가 노래, '낙원'을 통해 말하고자 한 '청춘'이 순했던 이유를 여전히 다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다.

뜨거움과 뜨거움이 만나면 오히려 얼음처럼 차가워지거나, 아니면 뜨거움의 극점에서 이 노래를 들으며 조금은 차분해진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보라는 그만의 영리한 독려였을지도.

아무튼 이 노래를 처음 접한 그날 이후로 내 여름날의 최애 곡은 '낙원'이 되었음을 상기한다. 인생의 여름을 지나 가을로 접어드니 여름날의 끝 간 데 없는 뜨거움도, 뜨거웠던 날들이 남긴 화인도 사그라지고 몸에 선선한 기운이 자리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낙원'의 가사처럼 그 시절 어느 하루, 가장 뜨겁고 행복했던 그 하루를 잊지 않고 곱씹으며 웃음 지을 여유가 생겨서 그런 것이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굳이 여름마다 '낙원'을 찾아 떠나는 수고로움에서 벗어났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여름이면 주저 없이 떠올릴 노래 하나 여즉 마음에 품고 있으니 나의 '낙원'은 무사히 건재함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혜원 작가의 개인브런치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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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음악방송작가로 오랜시간 글을 썼습니다.방송글을 모아 독립출간 했고, 아포리즘과 시, 음악, 영화에 관심이 많습니다.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에 눈과 귀를 활짝 열어두는 것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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