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귀족노조'라 처음 명명한 측 입장에서, 귀족노조는 민주노총에 소속된 대기업 정규직 노조로 제한돼 있었다. 예를 들자면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기아자동차 등이 이 범주에 속했다. 이때의 귀족은 '탐욕'과 '세습'이란 의미를 포괄한다. 그 단어들이 뜻하는 바대로, 귀족노조는 결국 부정적 뉘앙스로 들릴 수밖에 없다.

탐욕은 고액의 연봉을 받음에도 임금인상을 주장하는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들의 모습에 기초한다. 하지만 고액 연봉자라고 임금 인상을 주장하지 말란 법은 없기에 이 요구를 무조건적으로 비난할 순 없다. 회사의 매출은 경영진의 경영능력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노동력도 함께 기여한 대가이므로, 경영진만큼이나 노동자들도 그 이익을 골고루 분배받을 자격이 있다. 

세습은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의 직계가족을 우선·특별 채용한다는 단체협약 조항에 근거한다. 하지만 지난 2020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산업재해에 의해 사망하거나 중증재해를 당한 경우로 한정된 현대자동차의 단협이 적법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노사가 자유롭게 합의했다는 점과 산재 보상책으로써의 근로조건에 해당한다는 점이 참작됐다. 다른 한편으로 장기근속자나 정년퇴직자의 직계가족을 우선·특별 채용한다는 단협 조항은 이미 사문화된 지 오래이며, 단협에서 삭제되는 추세다.

귀족노조라 부르는 측은 그러한 수식어를 붙이게 된 사례들의 이면에 대해선 딱히 관심이 없다. 애초 그 이면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을 것이다. 정말 관심을 가졌다면 굳이 민주노총 소속 대기업 정규직 노조를 부정적인 함의가 담긴 별칭으로 부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23일 오후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1도크에서 진수가 중단된 지 5주만에 30만톤급 초대형원유운반선이 성공적으로 진수 되고 있다.
 23일 오후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1도크에서 진수가 중단된 지 5주만에 30만톤급 초대형원유운반선이 성공적으로 진수 되고 있다.
ⓒ 대우조선해양

관련사진보기

 
그 낙인효과는 성공한 듯 보인다. 이미 대중은 민주노총 소속 대기업 정규직 노조뿐만 아니라 민주노총이란 이름만 보여도, 조건반사적으로 귀족노조라는 수식을 떠올리는 단계에 이르렀다. 귀족노조의 범위가 처음 규정됐던 것보다 더 확장된 셈이다. 그래서일까? 귀족노조란 단어는 민주노총 소속의 하청노동자들에게까지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다.

내가 아는 한, 민주노총 소속의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본격적으로 귀족노조라 불렸던 시기는 2010년대다. 대기업 1차 하청업체인 유성기업과 발레오전장 등이 대표적이다. 민주노총 소속 유성기업 생산직 노동자들이 주야 2교대제를 주간연속 2교대제로 바꾸기 위해 파업에 나선 것을 당시 이명박 대통령까지 나서서 '귀족노조의 배부른 투정'이라 암시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연봉 7000만 원을 받는다는 근로자들이 불법파업을 벌이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평균 2000만 원도 채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그 세 배 이상 받는 근로자들이 파업을 한 것입니다." - 2011년 5월 30일 이명박 대통령 대국민 라디오 연설 중 

이는 유성기업 생산직 노동자들의 평균 연봉이 7000만 원대라는 잘못된 자료가 배포된 것에서 발단이 됐다. 하지만 노조 측에 따르면, 그들이 실제 받는 연봉의 평균은 5000만 원대였다. 당시 입사 8년차 노조원의 연봉은 3000만 원대였다. 그것도 평일(28시간)과 휴일(15시간)에 잔업을 한 결과였다.

사실 노동자의 연봉이 5000만 원이든, 7000만 원이든, 또는 1억 원이 넘든, 그것이 귀족을 연상시킬 만큼의 탐욕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경영진들의 수십, 수백억 원대 연봉은 정당한 대가이고, 노동자들의 연봉 1억 원은 탐욕의 산물이라는 수식부터가 잘못됐다. 그것도 사용자의 경영실태에 대한 고찰 없이, 최저임금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들과 단순비교를 하면서 말이다. '고액'과 '최저'라는 이 극단적인 비교야말로 존재하지도 않는 '탐욕'을 더 탐욕스럽도록 조장했다.
 
23일 오후 거제 대우조선해양 주변에서 진행된 "하청노동자 희망버스".
 23일 오후 거제 대우조선해양 주변에서 진행된 "하청노동자 희망버스".
ⓒ 민주노총 경남본부

관련사진보기

 
최근에는 민주노총 소속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이 '30%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파업 중에 귀족노조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비율로 30%는 꽤 많은 수치처럼 보여서 무리한 주장 같지만, 그 임금 인상액은 지난 수년간 조선업 불황에 따라 삭감됐던 임금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는 시도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가로, 세로, 높이 각각 1m의 '철제감옥'에 스스로 갇혀 있었던 경력 22년차 유최안씨(민주노총 전국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가 올 1월, 228시간을 일하고 받은 임금은 세후 기준으로 207만여 원이었다고 한다. 시간당으로 환산하면 올해 최저임금(9160원)을 조금 넘는 액수였다. 그래서 금속노조 경남지부 조선하청지회 조합원 이광훈씨가 SBS와의 인터뷰에서 "저희를 귀족노조라고 하는데, 이게 귀족노조의 급여입니까"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숙련공에게 일한 대가로 지급된 '최저에 가까운 임금'이 전혀 합당한 대우라고 느껴지지 않음에도, 이제는 육체노동자의 임금인상 시도 자체를 탐욕의 결과물로 보는 듯하다. 귀족노조란 단어가 이렇게 악용되고 있는 와중에, 같은 회사의 한편에선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우조선해양의 일부 정규직 노동자들이 '대우조선해양을 지키는 모임' 공개채팅방에서 파업 중이던 하청노동자를 '하퀴벌레(하청+바퀴벌레)'라고 조롱했다. 거기에는 "대학교 자본주의 교육을 받"지 못하고 "공정 공평하게 선의의 경쟁을 통해서 DSME(대우조선해양)"에 정규직으로 입사하지 못한 하청노동자들이 당연히 최저임금 수준의 대우를 받으며 배를 지어야 하는 게 공정·공평하다는 듯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우조선해양 정규직 노동자들은 현재 받고 있는 임금이 자신들의 능력에 맞는 적절한 보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착각일 수도 있다. 지난 수년간 발생한 조선업 불황의 책임을 그들이 '하퀴벌레'라 부르는 하청노동자들에게 모두 전가시킨 결과에 대한 반대급부는 아니었을까? 배는 정규직 노동자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함께 짓지 않는가.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대우조선지회(원청 정규직노조)의 일부 조합원들은 오히려 그들의 상급단체인 금속노조 탈퇴를 요구했다. 같은 금속노조에 속해 있는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이 공권력과 맞서야 할지도 모를 상황에서 나온 당황스런 제안이었다. 그 일부 조합원들이 전체 조합원의 40%가 넘는 조합원들의 서명을 받아낸 결과, 금속노조 탈퇴투표를 현실화시키기까지 했다. 이틀간 진행된 투표의 참여율은 89.4%였다.

현재는 부정투표 의혹으로 개표가 중단된 상태다. <한겨레> 기사에 따르면, 개표 중단 전까지는 탈퇴 반대 입장이 조금 더 우세했다고 한다. 결론이 어떻게 나올지는 잘 모르겠지만, 금속노조 탈퇴투표까지 진행됐다는 점에서 일부 정규직 노조원들이 하청노동자들의 현실을 외면한 듯해 씁쓸하다. 
 
비정규직이제그만 1100만 비정규직 공동투쟁 회원들이 29일 오전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윤석열 정부를 향해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을 고소와 손해배상으로 탄압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 “윤석열 정부,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손해배상으로 죽이려는 파렴치한 행위 중단하라” 비정규직이제그만 1100만 비정규직 공동투쟁 회원들이 29일 오전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윤석열 정부를 향해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을 고소와 손해배상으로 탄압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조선업의 구조적 문제이니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기업과 자본에 최종적인 책임이 있는 거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을 터다. 다 맞는 말이다. 그렇다고 그 구조 안에 있는 당사자가 역시나 그 구조 속에 있는 또 다른 당사자의 열악한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일까?

대우조선해양 사례를 예외적인 일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문제는 그 예외적인 상황 때문에 비롯되기도 한다. 그 이전에도 예외라고 불린 이기적인 일들이 있었다. 어쩌면 그 예외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결국 '귀족'노조라는 호명이 대중들에게 그럴싸하다고 느끼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부디, 더 이상 예외의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길 바란다. 적어도 민주노총 소속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이 정말로 '귀족노조'라는 비아냥을 벗어던지길 바란다면 말이다. 그래서다. 대우조선지회의 금속노조 탈퇴투표가 부결되거나 철회되길 바란다. 더 나아가서는 하청노동자들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밀길 바란다. 원·하청 노동자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상생방안을 마련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같은 금속노조 소속인 현대중공업지부는 지난 2018년 사내하청노조를 끌어안았다. 현대중공업지부에 사내하청지회가 편제되면서 원·하청 노조가 아예 한 조직이 된 것이다.

노동운동가였던 고 이소선 여사가 2006년 전태일 열사 36주기 추도식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가장 낮은 곳의 비정규직부터 터를 닦고 시작하지 않으면 노동운동은 10걸음을 전진했다가도 100걸음 후퇴하게 될 것"(전태일 36주기…이소선 여사, 양대 노총 '질타', <프레시안>)이다. 같이 가야 멀리 갈 수 있다. 혼자서는 할 수 없기에 노동'조합'에 모인 것이 아닌가.

태그:#귀족노조, #대우조선해양, #대기업 정규직 노조, #하청노동자, #정규직 노동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노동자의 삶을 그리는 기록노동자입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재해, 사고, 폭력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