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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신흥동 ‘말랭이마을’ 입구
 군산 신흥동 ‘말랭이마을’ 입구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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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군산시 신흥동(新興洞)은 본래 옥구군에 속하였다. '신흥동(신흥리)'은 새롭게 일어나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지명으로 면적이 무척 넓었다고 전한다. 지금의 월명공원 능선을 배경으로 금광동, 월명동, 명산동, 신창동, 송창동, 금동 일부가 신흥리에 속했던 것. 그렇게 광범위했던 신흥리는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을 거치면서 오늘의 모양새를 갖추었다.

신흥동 '말랭이마을'은 지난 2015년 전라북도 1시(市)·군(郡) 대표 관광지 육성사업에 선정됐으나 사업계획 변경 등으로 2017년 10월 '근대마을(말랭이마을)' 조성 사업을 추진, 2021년 완공됐다.

일제강점기 신흥리 모습
 
일제강점기(1930년대) 군산 신흥정 모습(출처: 군산역사관)
 일제강점기(1930년대) 군산 신흥정 모습(출처: 군산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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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1920년대) 신흥동은 개복동 고지대와 함께 군산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로 알려졌다. 1924년 군산상업회의소가 시행한 군산부 지가(地價) 조사 현황에도 잘 나타난다. 통계에 따르면 당시 일본인 거리(본정, 전주통 등)는 한 평(약 3,3m²)에 100원을 호가하는데 신흥동은 8원~15원으로 개복동 고지대(3원~15원) 다음으로 낮았다.

신흥동은 1930년대 초 일본식 지명인 신흥정(新興町)으로 개칭된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 사이에는 '절골', '밤나무골' 등으로 통했다. 남쪽에 차독산이 위치하고, 그 부근에 자그만 절(寺)이 있었으며, 암자 비슷한 신당과 점집도 여러 곳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큰 절골'과 '작은 절골'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밤나무가 많아 '밤나무 골'로 불리기도 하였다.

신흥정은 명색은 부(府)에 속했으나 주민들 생활상은 외곽(오룡동, 흥남동 등) 고지대 빈민촌과 다를 게 없었다. 게딱지같은 오두막 수백호가 빽빽하게 들어찬 빈촌으로 잊을만 하면 생계를 비관한 자살사건이 일어났다. 그런가하면 주민이 상해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에 앞장섰다가 일경에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옛날 신문에 따르면 신흥동은 노동자 집단 거주지로 1932년 4월 현재 조선인 4179명(862戶)이 살고 있었다. 군산부에서 조선인이 가장 많이 사는 산동네였다. 그럼에도 신학기에 입학 아동은 십 수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아이들은 일본인 점포에서 고용을 살거나 과자행상, 식모살이 등으로 끼니를 연명하는 등 주민 생활상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말랭이 마을에 설치된 옛 우물
 말랭이 마을에 설치된 옛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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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창업한 향원양조장과 조선인이 업주인 신흥주조장도 있었다. 1950년대에는 조선 시대부터 주민 공용으로 사용해온 공동우물을 모 양조장이 독점하여 말썽이 된 일도 있었다. 청주(淸酒) 제조업체인 고려양조장이 우물에 열쇠까지 채워놓고 사용했던 것. 이 사건은 분개한 주민들이 우물 되찾기 운동을 벌이는 등 우여곡절 끝에 해결되었다.

영욕의 세월을 오롯이 품고 있는 신흥동, 조선시대 신흥리는 마을 공동으로 당제를 지낼 정도로 주민이 많았다고 전한다. 월명산에서 기우제 지낼 때도 주민들이 참여했으나 일제의 전통문화 말살정책으로 모두 사라졌다. 일제의 감시와 통제에도 1923년에는 뜻있는 조선인들에 의해 학원(야학)이 설립되고 이듬해에는 교회와 주일학교가 개설된다.

농경사회 시절(50~60년대), 군산 해안가 동네에는 개흙과 볏짚을 반죽해서 바른 돌담집이 많았다. 신흥동에도 해감내가 코끝을 자욱하게 덮쳤다. 볏짚으로 엮은 이엉과 흙돌담집이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꼬불꼬불 이어진 오르막길과 비좁은 골목들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어 고지대임에도 갯마을 정취를 물씬 풍겼다.

가난했던 달동네, 문화·예술창작 공간으로 탈바꿈

신흥동 말랭이 마을은 밭을 일구기 좋은 양지바른 땅이었다. 자그만 오두막을 따라 사이사이 골목길이 생겨났고, 공동 수도와 쌀집, 구멍가게 등이 하나 둘 문을 열었다. 외지에서 군산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어족자원의 보고(寶庫)인 서해바다를 보며 희망을 품었다. 사글세도 싸고 어판장도 가까웠으며, 무엇보다 특별한 기술 없이도 바다에 기대어 살 수 있었다.
 
말랭이마을의 ‘고향길(김수미 길)’ 모습
 말랭이마을의 ‘고향길(김수미 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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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의 근현대사 발자취가 고스란히 보존된 신흥동, 이 동네는 면적 대부분을 고지대가 차지하고 있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광복(1945) 후에도 빈민들이 오무래오무래 모여사는 산동네였다. 한국전쟁 이후엔 밤나무 골에 난민촌이 형성되어 '가난한 동네'라는 별칭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이처럼 가난했던 달동네가 문화예술인들을 위한 문화·예술창작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됐다. 신흥동 산동네는 장수 농촌 드라마 <전원일기>(1980년대)의 일용엄니로 널리 알려진 김수미씨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이기도 하다.

군산에서 초등학교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한 김수미씨는 고향 사랑이 남다른 것으로 알려진다. 10여권의 에세이집을 출간할 정도로 문학에도 조회가 깊은 그는 2004년 군산국가산업단지에서 개최된 '군산국제자동차엑스포' 행사 때 홍보대사로 활동하면서 애향심을 몸으로 실천해 감동을 주기도 하였다.

말랭이마을에는 마을커뮤니티, 잔치마당, 어귀마당, 신흥양조장(신흥주조장), 추억의 전시관, 놀이터, 예술인 레지던스 공간(이야기마당, 작가 이야기), 창작체험관, 기획전시실, 자유극장(50~70년대 군산 관련 '대한뉴스' 상영) 등이 들어서 있으며 인기탤런트 김수미의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고향 길(김수미 길)'도 조성되어 있다.

김수미씨가 20여년 전 어느 라디오 프로에 게스트로 출연해 진행자와 나눈 고향 이야기에 따르면, 김씨는 신흥동 산동네 '꽃 많은 집'에서 막내로 태어나 왈가닥으로 유년기를 보낸다. 그는 군산여고 뒤 산동네(신흥동 말랭이)가 자신의 고향이라며 "어머니는 고개가 삐뚤어질 만큼 열무를 머리에 이고 유과꼬시장(명산시장)에 내다 팔았다"고 회상했다.

'말랭이마을'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일본식 건축물(히로쓰가옥, 대한통운 지점장 사택, 구 남조선전기주식회사 건물, 초원사진관 등)과 인접해 있고, 비좁은 골목길은 왜색 기운이 짙게 풍겨 일본 나가사키시 변두리 언덕길을 산책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지역이 근·현대 역사와 문화예술이 연계된 체류형 관광지로 거듭나기를 기대해본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군산시 보도자료(2021년 11월 1일)/ <군산시사>(군산시사편찬위원회, 2000)/ <군산의 지명유래>(이복웅 2009)/ 1917년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군산지형도’ / 1924년 5월 16일 자 <동아일보>/ 1930년 5월 25일 자 <조선일보>


태그:#군산 신흥동, #산동네(달동네), #김수미 길, #신흥주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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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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