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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천 홍범도 장군 생전 모습.
 여천 홍범도 장군 생전 모습.
ⓒ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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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의 주역 홍범도 장군이 오는 8월 15일 광복절 저녁에 귀향한다. 이역만리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1943년 10월 25일 사망한지 정확히 78년 만이자, 1920년 6월 일어난 봉오동전투 기준으로 101년 만이다.

장군의 유해가 고국에 돌아오기까지 곡절이 많았다. 김영삼 정부 당시인 1995년 우리정부는 카자흐스탄에 안장된 홍범도 장군 묘소를 처음으로 조사했다. 이후 카자흐스탄 정부 유해봉환과 관련해 원칙적인 합의를 이끌어 냈다. 하지만 구체적인 논의가 진척되지 않았다. 북한과 카자흐스탄 교민들의 반발이 이어졌기 때문. 평양 출신인 홍 장군은 카자흐스탄 교민사회에서 정신적 지주로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야 홍범도 장군 유해봉환과 관련된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2019년 4월 문재인 대통령이 카자흐스탄 토카예프 대통령에게 "홍범도 장군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영웅적인 인물"이라면서 "홍범도 장군이 활약한 청산리·봉오동 전투 100주년이 되는 2020년까지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고국으로 봉환하기를 희망한다"라고 요청했다.

회담결과는 긍정적이었다. 문 대통령은 2020년 101주년 3.1절 기념사를 통해 "평민 출신 위대한 독립군 대장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드디어 국내로 모셔올 수 있게 됐다.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기념해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방한과 함께 조국으로 봉환해 안장할 것"이라고 직접 발표했다.

그러나 코로나19가 확산되자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방한은 연기됐고, 장군의 유해봉환 역시 연기됐다. 문 대통령은 2020년 6월 다시 한번 봉오동전투 전승 100주년 메시지를 통해 "독립군 한 분 한 분을 기억하고 기리는 일은 국가의 책무임과 동시에 후손들에게 미래를 열어갈 힘을 주는 일"이라면서 "카자흐스탄에 잠들어 계신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조국으로 모셔올 거다. 독립운동의 뜻을 기리고 최고의 예우로 보답하겠다"라고 천명했다.

정확히 1년 2개월 뒤인 광복절 76주년이 되는 날, 홍범도 장군은 고국의 땅에 잠들게 됐다. 앞서 우리 정부는 지난 3월 102주년 3.1절 기념식에서 홍범도 장군의 배우자(단양이씨-공훈록에 실명기록 부재)와 아들 홍양순에게 의병활동 등의 공적을 들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홍 장군의 부인 이씨는 1908년 남편의 의병활동으로 인해 체포돼 취조를 받던 중 고문으로 사망했다. 당시 부인은 일제의 모진 고문에 입을 열지 않고 끝내 자신의 혀를 스스로 끊어냈다. 아들 홍양순 역시 1908년 만 16세 나이에 일본군 토벌대와 싸우다 사망했다. 

평양 감영 나팔수, 봉오동을 역사로 만들다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 민족대표대회에 참석한 홍범도 장군(왼쪽)과 최진동 장군이 자동차를 배경으로 레닌으로부터 받은 권총과 모자를 쓰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 민족대표대회에 참석한 홍범도 장군(왼쪽)과 최진동 장군이 자동차를 배경으로 레닌으로부터 받은 권총과 모자를 쓰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반병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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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평양에서 태어난 홍범도는 15세에 평안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해 활동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강원도 회양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수차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함께했던 동료들이 전사하자 1897년부터 함경남도 북청에 정착해 1907년 후반까지 사냥과 농사에 종사했다. 이때 홍 장군은 일대 포수들의 동업조직인 '포연대'의 대장으로 활약하며 포수들의 권익 보호에도 함께 나섰다. 

1907년 9월 일제가 의병활동을 선제적으로 막기 위해 '총포 및 화약류 취체법'을 강제 시행하자 같은해 11월 포수들을 중심으로 화전농민, 광산노동자, 해산군인 등 70여 명을 규합해 의병부대를 다시 결성했다. 이때부터 이듬해인 1908년 11월 연해주로 망명하기까지 홍 장군의 부대는 일본군과의 격전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둔다. 일본군을 비롯해 순사, 일진회 회원, 친일 관리 등을 응징하고 처단했다. 홍 장군의 별명 '(하늘을) 나는 홍범도'도 이때 생겼다. 

연해주로 망명한 홍 장군은 1910년 6월 13도의군에 동참했다. 그러나 전격적인 항일전을 재개하기도 전인 1910년 8월 조선은 일본에 병탄된다. 이후 홍 장군은 이상설, 최재형 등과 함께 '권업회'를 조직해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준비를 이어간다.

1919년 3월 3.1운동이 발발하자 홍 장군은 당시 활동하던 대한국민의회의 군무부와 논의 끝에 그해 9월 간도로 이동 봉오동전투의 주역 중 하나인 대한독립군을 지휘하게 된다. 

보훈처가 밝힌 내용에 따르면 당시 대한독립군은 3개 중대 300여 명 병력 규모로 소총 200여 정, 권총 약 30정의 화력을 갖췄다. 홍 장군이 지휘한 대한독립군은 1920년 초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와 연합하여 대규모 국내 진공작전을 감행한다. 그리고 마침내 1920년 6월 7일 봉오동의 그날이 밝았다.

독립군의 대대적인 기습에 일제는 250명의 병력으로 '월강추격대'를 편성해 독립군을 추격해 봉오동에 이른다. 그러나 이곳엔 이미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안무가 이끄는 국민회군이 통합하여 조직한 대한북로독군부군가 전투태세를 갖춘 상태. 독립군 통합부대는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지형의 봉오동 골짜기에서 일본군 추격대를 유인해 대승을 거뒀다. 실제로 독립신문이 기록한 내용에 의하면 일본군은 봉오동전투로 157명이 사살되고 수많은 인원이 중경상을 입었다. 독립군은 4명의 전사자만 났을 뿐이다.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 이주 정책으로 카자흐스탄으로
말년에 고려극장 경비 업무... 1943년 75세 일기로 운명
 

봉오동전투 이후 홍 장군은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연합해 1920년 10월 청산리 일대에서 다시 한 번 대승을 거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사해 발표한 기록에 의하면 일본군 전사자는 1200여 명, 부상자는 2100여 명에 달했다. 반면 독립군측은 사망 130여 명, 부상자 220여 명뿐이었다.

그러나 승전의 함성이 사그라지기도 전에 홍 장군은 비극을 맞는다. 일명 '자유시 참변'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일제와 결전을 치룬 한인 무장세력은 볼세비키 정부의 지원을 기대하며 자유시 일대로 집결한다. 그러나 집결한 한인 부대의 통솔권을 둘러싸고 지도부간에 충돌이 발생, 한인 무장세력 간 분쟁이라는 참사가 일어난다. 이로 인해 한인무장세력은 러시아의 강력한 통제를 받게 돼 활동이 제약된다.

지휘권을 잃은 홍 장군 역시 연해주 등지에서 집단농장과 협동농장 등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한인동포들의 권익보호에 힘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생활 속에서 1937년 9월 스탈린에 의한 한인 강제 이주정책이 진행되자 연해주를 떠나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게 된다. 그리고 1943년 10월 25일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75세를 일기로 운명한다.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 하나는, 말년에 홍 장군은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에서 경비업무를 했다는 것이다.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의 애환을 마지막까지 살피다 떠난 것인데, 타계 1년 전인 1942년 극작가 태장춘이 쓴 연극 '홍범도'가 고려극장에서 공연됐다.

정부, 14일 유해봉환 위한 특사단 파견... 15일 저녁 도착
16~17일 국민추모식... 18일 대전현충원 안장


장군의 귀향에 맞춰 <오마이뉴스>가 직접 확인한 바에 따르면, 우리 정부는 오는 14일 카자흐스탄으로 홍 장군 유해봉환을 위한 특사단을 파견한다. 광복절인 15일 오전 홍 장군에 대한 유해인수 및 항공봉송이 이뤄진다.

같은날 저녁에 홍 장군의 유해가 도착해 대전현충원으로 봉송된 후 임시안치된다. 16일과 17일에 걸쳐 국민추모식이 거행되고 18일 대전현충원에서 홍범도 장군 안장식이 진행된다.

앞서 1962년 우리 정부는 홍범도 장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태그:#봉오동전투, #홍범도, #유해, #보훈처, #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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