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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시 협조문
 문경시 협조문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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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지속적인 농촌 인구의 감소와 고령화로 젊은 세대와 여성의 농촌 이탈이 심화되는 가운데 농촌 인구증가와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혼인 연령을 놓친 농촌 총각과 베트남 유학생의 자연스런 만남을 통한 농촌총각 장가보내기를 추진하고자 하오니 많은 협조 바랍니다." 

지난 4월 문경시가 법무부 출입국 민원 대행기관 S행정사 사무소 대표에게 보낸 '인구증가를 위한 농촌총각 장가보내기 추진 협조문'의 일부입니다. 문경시는 협조문에 아울러 "저희 시에서 추진하고 있는 인구증가 시책을 안내하오니 희망자 모집에 적극 활용해 주시기 바랍니다"면서 출산지원 정책들을 자세하게 안내했습니다.  

'농촌총각 장가보내기', 40여개 지자체 조례로 지원 

1990년대부터 대한민국 농어촌에서 유행처럼 일어난 '농촌총각 장가보내기'는 많은 지자체들이 치적으로 홍보해 왔던 사업입니다. 처음에는 민간단체들을 중심으로 한 사업이었지만 점차 지자체가 농촌총각 장가보내기를 역점 사업으로 추진하면서 사업비를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2007년에 60여 개 지자체가 들인 사업비가 28억 5천만 원으로 정점을 찍은 후에 각종 인권 침해와 국제결혼 중개업체의 불법 중개 행위 등 부작용이 도마에 오르면서 점차 감소 추세이긴 합니다. 하지만 현재도 40여 지자체가 조례를 통해 지원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 중 30여 개 지자체는 여전히 농촌총각 장가보내기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2009년에 농촌총각 국제결혼 지원 조례를 제정한 경상남도는 "경상남도 내 거주자 중 결혼을 하지 못한 농촌총각의 국제결혼을 주선하고 그 비용의 일부를 지원하여 원만한 가정을 이루게 함으로써 영농의욕 고취와 안정적인 영농생활을 영위토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조례 제정 목적을 제1조에 명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농촌총각'이란 농업을 생업으로 하는 만 35세 이상의 결혼을 하지 않은 남자 농업인을 말하고, '국제결혼'이란 '국적법' 상 외국인 여자와의 결혼을 말합니다. 여타 기초 자치단체들이 표방하고 있는 국제결혼 지원 조례 역시 비슷한 목적과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농촌총각 장가보내기를 지원하는 지자체들은 인구 감소, 노령화, 저출산과 미혼 농어업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례 제정과 결혼비용 지원 등을 통해 농민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부장적 농어촌 문화와 육체노동을 기피하는 내국인들을 대체할 수단으로 외국인 여성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인종차별적이며, 실질적인 농촌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주여성을 출산의 도구로만 보며 성상품화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국제결혼 통해서 인구 문제 해결하자? 
 
28일 오전 11시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인구 증가 위한 '농촌총각 장가보내기' 추진한 문경시를 비판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28일 오전 11시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인구 증가 위한 "농촌총각 장가보내기" 추진한 문경시를 비판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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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악한 농어촌 현실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특단의 지원이 있어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농촌총각 장가보내기라는 명목으로 남성만 국제결혼 지원대상으로 한정할 게 아니라 의료, 교육 등 복지정책을 통해 농촌을 여성도 살고 싶은 곳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삶의 질 향상과 농업소득 증진을 위한 방안이 선행돼야 합니다. 

구조적 문제를 뒤로 하고 국제결혼을 통해 인구 증가를 꾀하겠다는 발상은 임시방편적이며 돈만 있으면 가난한 국가 여성을 데려올 수 있다는 왜곡된 결혼관을 심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런 사업에 지자체가 주체가 된다는 것은 한마디로 나라 망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결혼 지원사업이 중단되지 않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해당 지자체는 농업인 결혼 지원으로 인구 증가와 농촌 활성화라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는 취지를 설명하지만 실상은 지지체장의 치적 홍보를 위한 방편이 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중개업체들은 상대방에게 부정확한 정보 제공과 여성을 성 상품화한 인권침해식 결혼방식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데 골몰하여 숱한 문제를 일으켜 왔습니다. 

국제결혼 중개로 인한 피해 사례가 속출하면서 관련 법규를 통한 행정 기관의 단속이 강화되자 중개업체들의 수법은 더 교묘해졌고, 코로나19로 인해 출입국에 어려움을 겪는 점을 파고들면서 국내 영업에 힘쓰고 있습니다. 문경시 협조문에서 알 수 있듯이 지자체가 국제결혼 중개업체를 통해 국제결혼 수요를 발굴하고 있습니다. 

28일 국가인권위 앞에서 진행한 '인구증가를 위한 농촌총각 장가보내기 추진한 문경시, 국가인권위 진정 기자회견'을 주최한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허오영숙 대표는 문경시 협조문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문경시의 베트남 유학생과 국제결혼 추진은 국제결혼중개업체들과 유학원 등이 연결된 사업이라고 봐야 한다. 이는 성차별이자 인종차별이다."

이날 기자회견장에 참석한 베트남 유학생은 문경시의 목적을 이해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우려되는 부분이 있음을 밝혔습니다.

"문경시 협조문은 베트남 유학생들이 결혼만을 위해 한국에 왔다는 부정적인 고정관념과 편견을 심어주는 결과를 낳는다. 우리는 결혼이 아닌 교육을 원한다. 문경시에 베트남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국제결혼지원정책을 철회해 줄 것을 강력하게 촉구한다. 결혼은 당사자들간의 선택이어야 하며, 지자체는 특정 그룹에 인구 증가의 책임을 떠넘기며 수단화해서는 안 된다."

국제결혼 파탄났을 경우 지자체 책임 없나
 
28일 오전 11시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인구 증가 위한 '농촌총각 장가보내기' 추진한 문경시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기자회견이 열렸다.
 28일 오전 11시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인구 증가 위한 "농촌총각 장가보내기" 추진한 문경시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기자회견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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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결혼은 국적이 다른 배우자와의 만남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결혼을 하려면 양국의 제도와 법적인 뒷받침은 물론 상호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문경시를 비롯한 지자체들이 국제결혼을 주선하는 주요 상대국인 베트남과 필리핀은 상업적인 국제결혼중개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2007년에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한국 내 국제결혼 문제에 우려를 표하면서 결혼중개업자의 활동을 규제할 수 있는 법안을 마련할 것과 결혼중개업자와 배우자의 학대로부터 이주여성을 보호할 수 있는 추가적인 정책과 조치를 마련할 것을 권고한 바 있습니다. 

당시 권고문에는 한국 정부가 이주여성들에게 권리와 구제방법, 가정폭력 예방 및 방지를 위해 이용 가능한 수단을 알려주어야 한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상대국 법령과 국제사회의 권고도 무시하며 문경시가 특정 국가 유학생들을 출산의 대상으로 삼은 협조문은 시대착오적입니다. 이는 관계 당국의 허술한 관리와 감시를 비웃으며 여전히 성업 중인 국제결혼 중개업체들이 쾌재를 부를만한 소식입니다.

지자체와 국제결혼 중개업자들의 과다 포장된 정보로 국제결혼이 파탄나는 경우가 실제로 비일비재하지만, 여기에 대한 대책은 전무합니다. 농촌총각들의 진정한 행복을 원한다면 중개업자들 배만 불리는 방식을 벗어나 결혼 후 정착 과정에서 지원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 훨씬 적절한 대응입니다. 

지자체는 미혼 농업인들에게 중개업체를 통한 국제결혼의 부작용을 알리고 피해를 예방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개인의 존엄과 인권의 존중을 바탕으로 성차별적 의식과 관행을 없애고자 제정된 양성평등기본법 위반 여부 등도 살펴봐야 합니다.

시민단체들이 국제결혼 지원 조례폐지, 주민감사, 공익사항에 대한 감사원 감사 청구 등을 통해 문제점을 파악하고 개선점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를 문경시와 관련 조례를 가진 지자체들은 곱씹어야 할 것입니다.

태그:#국제결혼, #결혼중개업체, #결혼이주여성, #인권침해, #성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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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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