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의 영정이 광주광역시 북구 국립5.18민주묘지 유영봉안소에 모셔져 있다.
▲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 영정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의 영정이 광주광역시 북구 국립5.18민주묘지 유영봉안소에 모셔져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대검이 와서
 그의 가슴을 찌르자 뒤에서는
 개머리판이 와서 그의 뒤통수를 깠어요
 으윽 ~ 한낮의 신음소리와 함께
 그가 고꾸라지자 이번에는
 군홧발이 와서 그의 턱을 걷어찼어요
 피를 토하며 거리에
 푸르고 푸른 5월에.

- 김남주, 「학살 4」 앞부분.


계엄사는 이날 17명이 죽었다고 공식발표했으나 항쟁 현장 관계자들은 도청에서만 60~70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이날 진압과정에서 사망자가 30여 명에 이르고, 계엄사는 체포ㆍ연행자가 295명이었다고 발표했으나, 실제로는 훨씬 많았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최후 항쟁지였던 옛 전남도청(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최후 항쟁지였던 옛 전남도청(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이날 도청과 시내 여러 곳에서 시민들을 공격하여 다수를 살상하고 체포한 부대와 그 책임자들은 누구인가?

도청 공격에는 3공수여단(여단장 최세창 준장) 11대대(대대장 임수원 중령) 1지역대(지역대장 편〇〇 대위) 소속 77명(장교 11명, 사병 66명)이 선발됐다.

전일빌딩과 관광호텔 점령은 11공수여단(여단장 최웅 준장) 61대대(대대장 안부웅 중령) 2지역대 4중대(중대장 최〇〇 대위) 소속 37명(장교 4명, 사병 33명)에게 맡겨졌다. 광주공원 점령에는 7공수여단(여단장 신우식 준장) 33대대(대대장 권승만 중령) 8, 9지역대 소속 262명(장교 38명, 사병 224명)이 투입됐다. (주석 15)

 
당시의 모습
▲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의 모습
ⓒ 5.18기념재단

관련사진보기

 
이날 계엄군의 진입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숨진 '민주화 열사'들의 확인된 명단이다.

1. 김동수(남 22세), 조대전자공학과 3년.
2. 김종연(남 19), 고입 재수생.
3. 이강수(남 19), 재수생.   
4. 박성용(남 17), 조대부고 3년.
5. 유동운(남 19), 한신대 2년.
6. 안종필(남 16), 광주상고 1년.  
7. 문재학(남 16), 광주상고 1년.
8. 윤상원(남 29), 전남대졸, 들불야학 교사.
9. 민병대(남 20), 양계장 종업원.
10. 홍순권(남 19), 재수생.
11. 박진홍(남 21), 표구사 점원.
12. 문용동(남 26), 호남신학대 4년.
13. 서호빈(남 19), 전남대 2년.
14. 박병규(남 20), 동국대 1년.
15. 이정연(남 20), 전대상업교육과 2년.
16. 김종철(남 17), 자개공.
17. 오세연(남 24), 회사원.  
18. 박용준(남), YWCA 신협 직원.
19. 유영선(남 27), 회사원ㆍ전대 2년 휴학.
20. 양동건(남 45), 광주고교 수위.
21. 김성근(남 31), 목공.
22. 이금재(남 29), 한약방 종업원.  
23. 염행렬(남 16), 금오공고 2년.
24. 조행권(남 38), 노동.
25. 조일기(남 35), 식당 주방장.  
26. 김명숙(여 14), 서광여중 3년. (주석 16)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최후 항쟁지였던 옛 전남도청(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앞 분수대광장.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최후 항쟁지였던 옛 전남도청(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앞 분수대광장.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계엄군의 진압작전은 철저하고 무자비했다.

"특공대원들에게는 개인당 M16소총 1정과 실탄 140발씩을 지급했고, 중대마다 수류탄 각 3발, 가스탄 2발, 방독면 2개씩을 지급하였다.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 진압에 필요한 최소장비로 무장하도록 한 것이다. 침투조는 얼룩무늬 공수복 대신 일반 보병 전투복으로 갈아입었다. 공수부대에 대한 시민들의 감정이 극도로 나빴기 때문에 가급적 일반 군인처럼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그 위에 방탄조끼를 착용했으며, 철모에는 군인들끼리의 오인사격을 방지하고 서로 알아볼 수 있도록 하얀 띠를 둘렀다." (주석 17)

계엄군은 방탄조끼에 오인사격을 막고자 비표까지 준비하면서 그들이 보호해야 할 국민들에게는 너무 잔혹했다. 같은 시기에 이땅에서는 전혀 다른 두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오직 권력만을 추구하고 이를 추종하는 야만의 무리와, 죽임이 닥치는 데도 세상의 의를 위해 죽음의 자리를 떠나지 못한 양심의 인간이다.

계엄군이 도청에 들이닥쳤는데 다 도망가고 아무도 없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역사가 1980년 광주를 어떻게 기록했겠습니까. 상원이 형을 비롯해 도청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 때문에 5ㆍ18이 폭동이 아니라 민중항쟁으로 기록될 수 있는 겁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도청을 지켰던 사람들 말입니다. (주석 18)
 
생전의 윤상원 열사와 영혼의 부부가 된 박기순 열사
 생전의 윤상원 열사와 영혼의 부부가 된 박기순 열사
ⓒ 5.18 기념재단

관련사진보기

 
들불야학에서 윤상원에게서 배웠다는 용접공 나명관의 증언이다.

"승산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서 사람들을 지탱해주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광주의 마지막 밤과 새벽에는 승리를 확신하는 유격대의 힘찬 진군나팔소리는 없었다. 그곳에는 역사에서 지는 싸움을 피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처연함과 쓸쓸함이 흐르고 있었다. 광주는 이렇게 우리 곁에, 아니 우리 가슴속에 들어왔다." (주석 19)

도청과 YWCA 등에서 시민들을 죽인 부대장과 대원들 역시 인간의 탈을 쓴 악귀들로 공범이지만, 주범은 역시 전두환ㆍ정호용ㆍ소준열 등이었다.

정호용은 밤 9시경 광주비행장에 도착하여 특공대원들을 격려하였다. 그는 이날 오전 서울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방문하여 재진입작전에 필요한 가발과 편의대 복장, 그리고 마대 등을 지원받았고, 오후 2시 경에는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방문해서 특수화학탄, 즉 스턴수류탄(stun grenade)과 항공사진을 수령하여 광주로 가져왔다. (주석 20)

전두환ㆍ정호용의 지침을 충직하게 수행한 인물이 소준열 전교사령관이다.

"오후 4시경 소준열 전교사령관이 광주비행장을 방문하여 시내 진입부대 공수여단장들에게 작전개시 시각을 27일 0시 1분, 즉 자정이라고 알렸다. 정보가 사전에 누설될까봐 소준열 사령관이 직접 작전부대를 방문한 것이다." (주석 21)


주석
15> 황석영 외, 앞의 책, 409쪽.
16> 정상용 외 앞의 책, 315~316쪽.
17> 앞의 책, 410쪽.
18> 하종강, 「하종강의 노동과 꿈」, 한홍구, 앞의 책, 402쪽, 재인용. 
19> 한홍구, 앞의 책, 402~403쪽.
20> 황석영 외, 앞의 책, 411쪽.
21> 앞의 책, 410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5ㆍ18광주혈사, #5.18광주민주화운동40주년, #광주민중항쟁무력진압, #전두환, #정호용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이 기자의 최신기사중앙정보부에 끌려갔지만...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