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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의 남성은 방화치사 혐의로 기소됐다. 하지만 무죄를 받는다.
 이 사건의 남성은 방화치사 혐의로 기소됐다. 하지만 무죄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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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아내와 다툼을 벌이던 남성이 인근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구입하여 집에 뿌린 뒤 불이 나 아내와 딸을 사망에 이르게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의 남성은 방화치사 혐의로 기소됐다.(관련 기사)

하지만 재판부는 "실제로 집에 불을 지르겠다는 의도보다는 아내에게 겁을 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며, 가해 남성이 라이터를 켜서 화재가 난 것으로 단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1심 무죄, 항소심에서도 무죄를 선고한다. 타고 있는 집 안에 갇혀 더없는 고통과 공포에 시달리다 죽어간 피해 여성과 딸은 국가의 위로 따위를 받을 수 없었다.

같은 달, 37년간 가정폭력 피해를 입어온 여성이 남편을 장식용 수석으로 내리쳐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의 선고가 있다. 사건 당일 남편은 '늦게 들어왔다'며 여성의 머리채를 잡아 넘어뜨리고, 유리잔을 집어 던지는 등 폭력을 행사했다.

이 사건의 피해 여성은 살인 혐의로 기소됐고, 재판 과정에서 "극도의 불안과 생명의 위협을 느껴 방어 차원에서 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당방위·과잉방위 모두 인정되지 않고, 국민참여재판에서 징역 4년이 선고된다.(관련 기사)

이뿐일까. 같은 해 4월, 아내를 가위와 드라이버, 칼로 위협하고 자신의 동생과 세 명의 자녀들을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한 남성이 있었다. 그는 변태적인 성행위를 일삼고,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성 학대를 했으며, 동영상을 촬영하여 '도망갈 경우 유포하겠다'고 협박했다. 결국 폭력에 노출되었던 여성은 가해 남편이 잠자리에 든 사이 그를 흉기로 찌른다.

한 달에 걸쳐 지속적인 폭력에 시달렸던 당시 그녀의 수면 및 영양 상태는 엉망이었고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많은 여성단체들은 피해 여성이 지속적으로 당해온 잔인한 폭력과 사건 당일 그녀의 심신미약 상태를 설명하며 정당방위를 주장했다. 하지만 이 사건 또한 피해 여성은 살인 혐의로 기소, 국민참여재판에서 징역 5년이 선고된다.(관련 논평)

왜 누군가의 행위는 살인이 되고, 누군가의 행위는 고의가 없었던 우발적 범행으로 판단되는 것일까?

지난 1월 11일, 경악할 만한 재판부의 판결을 다시 한 번 마주했다. 의정부지법 형사합의 11부(고충정 부장판사)는 주먹으로 피해여성의 얼굴 등을 수차례 폭행해 뇌사상태에 빠지게 하고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한 데이트폭력 가해자에 대해 집행유예를 선고한다.(관련 기사)

재판부는 집행유예의 근거로 "피해자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 사실을 확인하고자 다그치는 과정에서 벌어진 우발적 범행"으로 보이며 "피해자 유족 모두 피고인을 용서,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내는 등 피고인을 위해 할 수 있는 조처를 다 했다"는 점을 들었다.

재판부의 판결에서는 한결같이 폭력의 가해자들에겐 "우발적 범행"이라는 말이 따라 붙는다. 그러나 피해 여성들에게는 왜 피하지 않았느냐며 책임을 지우거나 "계획적" "잔혹성"을 이야기하면서 엄중 처벌해야만 하다는 말이 반복될 뿐이다. 그리고 자신의 파트너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게 당연한지, 그것이 범죄의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해당 재판부에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발적" "반성"은 왜 남성에게만 적용되는가
 "우발적" "반성"은 왜 남성에게만 적용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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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발적이다" "반성했다"... 왜 남성에게만 적용되는가

2013년 12월,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이와 관련한 의미 있는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한국여성의전화 활동가들과 여성주의 연구자, 변호사, 법학전문대학원 학생들이 협력해 가정폭력 가해자(남편)가 피해자(아내)를 살해한 사건 121건과 가정폭력 피해자(아내)가 가해자(남편)를 살해한 사건 21건에 관한 판결을 분석했다. 이 분석을 토대로 '살인과 젠더'라는 제목의 발제를 진행했다.

이들은 아내를 살해한 가정폭력 가해자(남편)에 대해 형벌을 감경한 판례들이 제시한 감경 이유 중에는 "동종 전과 없음" "우발적 범행" "반성"이 가장 많았다고 설명했다. 또 "자녀를 부양할 의무가 있는 점" "아내의 불륜과 폭력, 가정 소홀로 인한 스트레스" "배우자 상실로 인한 죄책감으로 살아가야 하므로 피고인 자신이 최대 피해자인 점" 등도 있다며, 비교적 관대 편이라고 분석했다. 반면, 가정폭력 피해자(아내)가 가해자(남편)를 살해한 사건에서 가정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를 인정한 판례는 단 1건도 없다는 것을 지적했다.

필자 또한 성폭력상담소에서 친밀한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폭력 피해자들을 지원하며 해당 사건의 재판 모니터링을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재판부에서는 친밀한 관계에서 지속적으로 정서적, 물리적 피해를 입어온 피해자들의 고통에 주목하기보다는 가해자들이 초범이거나 행위에 대해 반성하고 있다는 이유로 형벌을 감경하는 경우가 많았다.

2015년 말, SNS를 뜨겁게 달구었던 조선대의학전문대학원 데이트폭력 사건(데이트 관계 안에서 있었던 가해자가 피해자를 집에 감금한 채 4시간 동안 폭행한 사건)에서도 해당 가해자가 징역형이 나오면 학교에 제적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가해자에 대해 벌금형을 처분해서 사회적 공분을 일으켰다.(관련 기사, 결국 가해자는 최종 제적 처리됨 -편집자 주)

한국 대법원 앞에는 법의 여신인 '디케'(Dike)의 상이 세워져 있다. 법의 여신 디케의 한 손에는 저울이, 다른 손에는 칼이 들려있고, 그녀는 두건으로 두 눈을 가리고 있다. 디케가 들고 있는 저울과 칼은 오랫동안 법의 상징으로 자리 잡아 왔다.

디케가 눈을 가린 것은 상대가 누구인지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오직 법과 진실, 정의의 원칙에 근거해 심판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즉 육신의 눈을 감고 양쪽의 귀로 양심의 눈으로 진실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다. 또한 눈을 가린다는 것은 어떤 차별적 시선, 통념을 거부한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법정에서 가장 강한 자는 어느 누구도 아니고, 바로 판사야. 바로 우리지. 그리고 가장 위험한 자도 우리고. 그걸 잊으면 안 돼."
 
문유석 판사의 <미스 함무라비> 책에 나온 구절이다. 올해 1월, 데이트폭력으로 사망한 피해 여성의 명복을 빌며 우리 사법부가 이 말의 무게를 알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김미리내씨는 광주여성민우회 활동가입니다.



태그:#데이트폭력, #가정폭력, #젠더폭력, #젠더와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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