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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원과 정운을 기리는 쌍충사. 본래 이대원을 기리는 사당이었는데 이순신이 조정에 건의하여 정운도 함께 모셔졌다.
 이대원과 정운을 기리는 쌍충사. 본래 이대원을 기리는 사당이었는데 이순신이 조정에 건의하여 정운도 함께 모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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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2202 일대의 조그마한 바닷가 봉우리는 조선 시대에 녹도진성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이곳에는 두 사람의 충신을 섬기는 사당이라는 뜻의 쌍충사가 있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 128호인 이 사당의 두 주인공은 이대원과 정운이다. 사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을 읽는다.

'쌍충사는 임진왜란 이전 남해안에 침입한 왜적을 막다가 손죽도에서 전사한 충렬공 이대원(1566∼1587)과 임진왜란 중에 큰 공을 세우고 전사한 충장공 정운(1543∼1592)을 배향한 사우(사당)이다. 원래 선조 20년(1587) 2월 20일 녹도 만호를 역임한 이대원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그 뒤 임진왜란 때 녹도 만호로 있다가 순직한 정운과 함께 초가집을 마련하여 제사 지내오다가 숙종 때 와서 사우를 세우고 쌍충사라는 사액을 받았다. 1946년 현 사당을 세우고 1957년에 강당이 세워졌다. 1969년과 1970년에 건물 일부를 신축, 보수하여 현재 사당, 강당, 내삼문, 관리사 등 4동의 건물이 있으며, 4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쌍충사 사당 뒤편에는 이대원과 정운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사진은 정운 동상이다.
 쌍충사 사당 뒤편에는 이대원과 정운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사진은 정운 동상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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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원은 1587년(선조 20) 녹도 만호로서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적을 맞아 전과를 올렸고, 손죽도 해상에서 순절한 인물이다. 이에 선조는 사당을 지어 인근 주민에게 향사토록 했는데 이것이 쌍충사의 전신인 이대원 묘당이다.

정운은 서애 류성룡의 천거로 1591년 녹도 만호로 부임하였는데 임진왜란 때에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옥포, 당포, 한산 해전 등에서 선봉장으로 전과를 올리고 몰운대에서 순절하였다. 이에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 청하여 1592년 그 위패를 합향(함께 제사 지냄)하였다.'

'이대원 사당'에서 출발한 쌍충사

손죽도는 이순신이 처음 수군 장수가 되어 근무했던 발포진에서 남쪽으로 직선 40리(12km) 거리에 있는 섬이다. 손죽도와 관련되는 어이없는 실화가 1587년(선조 20) 2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왜적이 흥양(고흥)에 침범하였는데, 녹도를 지키는 장수 이대원이 막아서 싸우다가 패하여 죽었다. 이보다 앞서 왜선 수 척이 녹도 근처에 침범했을 때 이대원이 미처 주장(수사)에게 보고하지 않은 채 그들을 쳐서 수급을 벤 일이 있었는데, 수사 심암은 그가 자기의 공으로 삼은 것을 미워하였다. (심암은 그 공을 자기가 세운 것으로 하자고 이대원에게 말했다가 거절당했음.)

얼마 안 되어 왜선이 손죽도를 침범하자, 심암이 이대원을 선봉으로 삼고는 뒤이어 응원하지 않았다.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 대적이 되지 않았으므로 이대원이 전사했다. 조정에서 그 사정을 알고 심암을 잡아 신문한 다음 효수(목을 베어 거리에 내걺)하여 대중을 경계하였다.'

억울하게 죽은 이대원

문화재청 누리집의 쌍충사 해설


충열공 이대원(1566∼1587)과 충장공 정운(1543∼1592)을 모신 사당이다. 이대원은 선조 20년(1587) 녹도 만호가 되어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를 대파하였고, 다시 흥양에 왜구가 침입하자 맞서 싸우다가 손죽도 해상에서 순절하였다. 이에 선조는 사당을 지어 모시게 했는데 이것이 쌍충사의 전신이다.

정운은 선조 24년(1591) 녹도 만호로 부임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장군과 함께 목포 · 당포 · 한산 해전 등에서 용감히 싸우다 부산 몰운대에서 순절하였다. 선조 25년(1592) 이순신 장군의 청으로 이대원과 함께 사당에 모시게 되었다.

정유재란으로 불타 버린 것을 숙종 7년(1681) 새로 짓고, 2년 뒤 쌍충사로 사액되었다. 영조 11년(1735)에 보수하였고 고종 5년(18 6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922년 고흥향교 선비들이 다시 지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42년 일본인들이 폐허로 만든 것을 1957년 다시 고쳐 지은 것이다.

건물 배치는 맨 위쪽에 앞면 2칸, 옆면 1칸 반의 사당이 있고 아래쪽과 왼쪽에는 앞면 5칸, 옆면 3칸 규모의 강당이 있다. 오른쪽 밑으로는 강당과 마주보게 관리사를 배치하였다.

이대원이 전사한 바로 그해(1587년)에 녹도진성 안에 그를 기리는 사당이 세워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그해 12월 정운이 다대포에서 전사하자 이순신이 조정에 건의하여 그를 이대원 사당에 함께 모셨다. 임금이 '쌍충사'라는 편액을 내린 때는 1683년(숙종 9)이다.

계단 입구 안내판 옆에 지도가 첨부된 또 다른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역사 유적지를 찾았을 때는 이런 종류의 안내판을 성심껏 읽어야 한다. 가장 압축된 해설이기 때문이다. 이 안내판은 제목이 「1관 4포」로, 고흥의  군사상 중요성을 강조하고 녹도진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흥양현은 고려 말 · 조선 초 왜구가 창궐하면서 연해 방어의 거점으로서 부각되었다. 그 예로 전라 좌수군이 관할하는 5관(순천 도호부, 낙안군, 보성군, 광양현, 흥양현) 5포(방답진, 사도진, 여도진, 발포진, 녹도진) 중 1관(흥양현) 4포(사도진, 여도진, 발포진, 녹도진)가 이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임진왜란 기간 동안 흥양의 1관 4포는 중요한 수군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수군의 지휘 체계는 수군 절도사(종3품)- 첨절제사(종3품)- 만호(종4품)로 이루어졌는데 사도진에는 첨사(종3품)가, 여도진, 녹도진, 발포진에는 만호(종4품)가 주둔하였다.

녹도진은 만호가 배치된 수군진으로, 조선 초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곽은 성종 21년(1490)에 2020척, 높이 13척 규모로 축조되었으나 현재 일부 잔존 석렬(돌의 줄)만 남아 있는 상황이다. (척= 자= 약 30.3cm, 2020척= 약 6,666cm, 13척= 약 393.9cm)

임진왜란 당시 녹도진은 전라 좌수영 소속의 수군진으로 녹도 만호 정운과 송여종이 이순신 막하에서 활약하였다. 정운은 돌격장으로서 많은 해전에 참여하였지만 안타깝게 부산포 해전에서 순절하였다. 그의 후임인 송여종도 이순신과 함께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특히 절이도(현 고흥군 거금도) 해전과 노량 해전에서 크게 기여하였다.

녹도진성 안에는 녹도 만호로 순절한 이대원과 정운을 배향한 쌍충사가 있었으나 서원 · 서우 철폐령에 따라 19세기에 훼철되었다가 1957년에 복원되었다.'

쌍충사 외삼문
 쌍충사 외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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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 옆에는 빗돌도 네 개 놓여 있다. 대략 '충의 군관 박면(朴勉) 박란(朴蘭) 신위지단', '만호 안기용(安起容) 영세 불망대', '가의대부 민형식(閔炯植) 몰세(영세) 불망비' 등이 새겨져 있다. 모두들 한자로 내용을 채우고 있는데다 그 중 하나는 마모가 심해서 도저히 읽을 수가 없다. 

답사자를 반갑게 맞아주는 쌍충사 관리인

계단을 올라 외삼문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내삼문이 있고, 오른쪽으로 묘정비(역사를 새긴 빗돌)와 관리사가 있다. 관리인에게 참배를 하고 싶다고 청하면 사당 문도 '반갑게' 열어준다. 관리 사무소가 없는 역사 유적지를 찾았을 때 관리인과 직접 만나게 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관리인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 사당에 들어 참배를 한다. 두 장군의 초상화가 조금 품위가 없어 보여 그것이 안타깝다. 

사당 뒤로 들면 두 장군의 동상이 있고, 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서 있는 조각들도 보게 된다. 성 아래로 포구에는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저들도 임란 때라면 모두 병사가 되거나 난민이 되었으리라.

바다가 보이는 쌍충사 외삼문
 바다가 보이는 쌍충사 외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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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에는 정운 정려각도 있다

정운을 모시는 정려는 전남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 534-1에 있다. 전라남도 기념물 76호인 이곳 정려의 공식 이름은 '정운 충신각'이다. 현지 안내판의 내용이 문화재청 누리집의 것보다 조금 더 상세하다.

'이 충신각은 임진왜란 당시 충신 충장공 정운의 전공을 기리기 위하여 조선 숙종 7년(1681)에 세운 것을 1985년 10월 현 위치로 옮긴 것이다. 정운 장군은 28세 때에 무과에 급제한 후 웅천 현감과 삭녕 군수를 지냈으며, 녹도 만호로 부임하여 용맹을 떨치다가 부산 동래의 몰운대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조정에서는 공의 전공을 기리어 병마절도사를 제수하고 녹도에 사당을 세웠다. 이후 조선 숙종 때 충절사라 사액하였으며 정조 임금 때에는 충장의 시호를 내렸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옆에서 볼 때 '人'자 모양)이다.'

정운 충신각
 정운 충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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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 충신각 옆의 사당
 정운 충신각 옆의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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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가 아닌 부산 다대포에도 정운을 기리는 유적 '忠臣(충신) 鄭運公(정운공) 殉義碑(순의비)'가 있다. 정운은 1592년 9월 1일 부산포 해전 때 적탄에 순절했다. 이날 부산포 전투는 적선 400여 척 중 100여 척을 격파하고, 수를 셀 수 없는 적군들을 바다에 수장시킨 대첩이었다. 아군 피해는 녹도 만호 정운과 병사 5명의 전사, 26명의 부상이 전부였다.

부산 다대포에는 정운을 기리는 빗돌도 있다

1594년(선조 27) 8월 12일자 『선조실록』을 읽는다. 선조가 '임진년(1592) 이후 우리 군대가 크게 위축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退縮何也)?' 하고 묻는다. 류성룡이 '정운이 죽은 후 수군의 사기가 꺾인 탓에(舟師退挫) 교활한 적들에게 습격을 받을까 두려워 쉽게 나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한다.

정운이 죽은 후 조선 수군의 사기가 크게 꺾여 후퇴만 한다? 정운에 대한 조선 수군들의 신망이 아주 대단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증언해주는 기록이다.

정운은 다대포 전투에서 순절했다. 부산 다대포 몰운대 끝에 세워져 있는 '정운 순의비'는 군사 시설 안에 있기 때문에 불쑥 찾아가서는 볼 수가 없다.
 정운은 다대포 전투에서 순절했다. 부산 다대포 몰운대 끝에 세워져 있는 '정운 순의비'는 군사 시설 안에 있기 때문에 불쑥 찾아가서는 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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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 정운공 순의비'의 뒷면에는 어떤 내용이 새겨져 있을까, 부산시 발간 『부산의 문화재』에 한글로 번역되어 있는 비음(비석 뒷면)의 글을 가다듬어가며 읽어본다.

'왜적이 온 나라의 병력을 동원하여 침략하여 먼저 영남 일대를 함몰시키니 임금이 위급한 소식을 듣고는 서쪽으로 용만(의주)으로 피란하시었다. 이때 충무공이 전라 좌수사가 되어 수하 장수들을 소집, (왜적이 쳐들어와서 부산을 이미 함락했으니)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논의하였다.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하였다. 다만 녹도 만호 정운만이 홀로 의연하게 말했다.

정운이 이순신에게 "지금 적병이 영남을 함몰했는데(今敵陷嶺南) 앉아서 보기만 하고 구원하지 않으면(坐視不救) 이는 적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적병이 호남에 이르기 전에(敵未至吾境) 나아가 치면 군사들의 사기를 왕성하게 할 수 있고, 우리의 수비를 튼튼히 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더욱이 지금은 임금께서 난리를 맞아 피란을 하고 계시는 지경이니(君父蒙塵) 군주가 치욕을 겪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신하가 목숨을 바쳐야 할 때입니다(臣死之秋). 내가 마땅히 한번 죽음으로써(我當以一死) 여러 장수들의 선봉이 되겠습니다(爲諸將先)." 하고 말하였다.

충무공이 그의 말을 장하게 여겨 공의 (적을 공격하러 영남으로 진격하자는) 계책을 따랐다(而從其策). 충무공은 여러 군대에 명령을 내려 배를 타고 (5월 4일) 영남으로 출발하였다(乘船向嶺南).'

정운이 전사한 다대포 바다. 사진 왼족에 살짝 보이는 육지가 몰운대이다. 몰운대 끝에 '정운 순의비'가 세워져 있다.
 정운이 전사한 다대포 바다. 사진 왼족에 살짝 보이는 육지가 몰운대이다. 몰운대 끝에 '정운 순의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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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만 해도 이순신은 경상도 바다로 진격해야 하는지에 대해 망설이고 있었다. 조정의 분명한 출정 명령도 없었고, 전황과 일본군의 전투 능력에 대한 정확한 정보도 없었다. 따라서 정운을 비롯한 몇 장수의 '앉아서 왜적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영남으로 진격하여 선제 공격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순신에게 큰 격려가 되었다. 이순신이 공격적 전략을 채택하게 된 데에는 정운의 판단이 크게 작용하였다는 뜻이다.

이순신의 경상도 출전 결심에 큰 도움이 된 정운

본래 이순신은 4월 15일 저녁에 경상 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왜적이 절영도에 침입했다는 통첩을 받았다. 4월 20일에는 경상 감사 김수로부터 왜적이 부산을 함락했으니 지원군을 보내달라는 요청도 받았다. 하지만 출전을 실행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5월 3일, 정운 등 모든 장수들이 모인 연석 회의에서 전라도 수군의 영남 바다 진격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뒤에서 본 정운 충신각
 뒤에서 본 정운 충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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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포 해전 이후 이순신이 조정에 장계 「부산(釜山)파왜병(破倭兵)장(狀)」을 보내면서 '지금까지 네 번 출전해서 열 번 싸워 모두 이겼지만 이번보다 더 큰 승리는 없었다.'라고 스스로 만족해 했다. 또한 '정운은 변란(임진왜란)이 생긴 이후 충의심으로 불타올라 적과 함께 죽기를 원한다고 맹세하면서 늘 앞장서서 싸웠는데 이번 싸움에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하다가 적의 큰 철환이 이마를 꿰뚫는 바람에 전사하였으니 지극히 참담하고 비통합니다.'라고 정운의 죽음을 슬퍼했다.

이순신은 정운의 전사 소식을 듣고 '나라가 오른팔을 잃었도다(國家失右臂矣)!' 하고 탄식했다. 정운의 전사는 『선조실록』 1594년 8월 12일자가 말한 바와 같이 아군의 사기를 떨어뜨릴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정운 전사에 이순신 탄식 "나라가 오른팔을 잃었다!'

정운 유적 곳곳에 안방준의 평언을 새긴 비를 세워 답사자들이 읽을 수 있게 할 것을 제안한다. 안방준은 '국가를 되찾은 것은 호남을 잘 보전했기 때문이고(國家之恢復由於湖南之保全), 호남을 잘 보전한 것은 이순신의 수전에서 힘입은 것이며(湖南之保全由於舜臣之水戰), 이 공의 수전은 모두가 녹도 만호 정운의 용력에서 비롯되었다(舜臣之水戰皆出於鹿島萬戶鄭運首事嘗試之力也).'라고 깔끔하게 정리했다.

'정운 충신각' 옆의 정운 사당 일원 전경
 '정운 충신각' 옆의 정운 사당 일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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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정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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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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