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익숙한 대중 문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2017 지산 밸리록 뮤직 앤 아츠 페스티벌.

2017 지산 밸리록 뮤직 앤 아츠 페스티벌. ⓒ 이현파


야외 뮤직 페스티벌을 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교통비도 걱정이고, 그로 인한 피로도 생각해야 한다. (공연을 정적으로 관람한다면 후유증은 사흘 정도, 춤을 좋아한다면, 후유증은 일주일 정도 지속되리라) 여름이라면 비가 오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진흙과 비를 감수하면서도 '살아있는 음악'을 만끽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다. 필자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지난 7월 28일, 경기도 이천에서 열린 2017 지산 밸리록 뮤직 앤 아츠 페스티벌에 다녀왔다. 한여름에 난로를 틀어놓은 듯한 더위를 견디며, 페스티벌장에 도착했다. 한숨 잤다가 눈을 떠 보니 이천에는 거센 빗줄기가 내리고 있었다. '날씨가 도와주지 않는구나!'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빗줄기는 약해지기 시작했다. 놀기에 문제가 없는, 시원한 부슬비였다.

'잔나비' '아우스게일' '슬로우다이브' 등... 안개 속의 천국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을 부르는 잔나비.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을 부르는 잔나비. ⓒ 이현파


브이 스테이지에서는 잔나비의 공연이 열렸다.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HONG KONG' 등을 따라 부르며 춤췄다. 보컬 최정훈의 시원시원한 노래 솜씨 때문에 비가 오고 있다는 것도 잊고 놀 수 있었다. 한편 언덕 위에 위치한 튠업 스테이지에서는 ABTB의 공연이 펼쳐졌다. ABTB는 이날 모든 아티스트들을 통틀어 가장 '록'의 이미지에 충실한 공연을 했다. 비록 관객은 적었지만 '시대정신', '할렐루야' 같은 곡들을 들으며 슬램을 할 수 있어서 짜릿했다. 보컬 박근홍은 '오늘 일을 잊어주셔야 한다'라고 우스갯소리를 붙이긴 했지만, 지드래곤의 '삐딱하게'를 커버한 것 역시 인상 깊었다. 더욱 많은 사람이 하드 록의 멋을 느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빗속에서 공연한 아우스게일.

빗속에서 공연한 아우스게일. ⓒ 이현파


비는 사람의 마음을 쉽게 움직인다. 똑같은 풍경도 빗속에서 보면 다르게 비치곤 한다. 아이슬란드 뮤지션 아우스게일(Asgeir)과 슬로우다이브(Slowdive)는 비와 안개 덕분에 더욱 아름다워졌다. 몽환적인 일렉트로닉 사운드와 아우스게일 특유의 팔세토의 목소리는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아이슬란드의 대자연을 바라보면서 아우스게일의 음악을 듣고 싶다는 버킷 리스트가 있는데, 그 소원의 절반은 어째 이루었다.

'슈게이징의 거장' 밴드 슬로우다이브 역시 인상 깊은 공연을 하고 갔다. 1995년에 해체 후, 2014년에 재결합한 이들은 20년 공백이 무색할 만큼 좋은 '합'을 보여주고 있다. 'Catch The Breeze', 'Alison' 등 지난 명곡들은 물론, 'Star Roving' 등 신보 <Slowdive>에 수록된 신곡들까지 들을 수 있었다. 5분을 훌쩍 넘는 곡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격정적인 노이즈 사운드 속에 감성적인 멜로디가 감싸져 있어서 좋았다. 여성 보컬 레이첼 고스웰의 청아한 목소리도 20년 전과 다르지 않았다. 이들의 공연은 시드 배럿의 'Golden Hair'와 함께 마무리되었다. 아마 새벽에 공연했다면 감동이 배가되었을 것이다.

언어의 장벽을 뚫는 음악의 힘

'7 Years'로 그래미 후보에 오른 덴마크 밴드 루카스 그레이엄(Lukas Graham)은 이날 손꼽힐 만큼 큰 반응을 끌어냈다. 함께 이곳을 찾은 친구들 역시 '최고의 공연이었다'며 엄지를 추켜올렸다. 이들을 잘 모르는 사람들 역시 자극할 수 있는 루카스 그레이엄의 노래 솜씨와 무대 매너가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만났던 한국 팬을 알아보고는 '이번에는 우리가 당신을 위해 이곳에 왔다'라고 말하는 등, 따뜻한 팬 서비스는 덤이었다. 앞으로 한국을 자주 찾는 팝 뮤지션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7월 28일, 첫 내한 공연을 선보인 Lorde.

지난 7월 28일, 첫 내한 공연을 선보인 Lorde. ⓒ 이현파


필자가 공연장에 온 이유의 7할은 로드(Lorde)의 첫 내한 공연을 보기 위해서였다. 올해 스무 살인 로드는 '음악의 미래', '얼터너티브의 새로운 여왕'으로 불리고 있는 싱어송라이터다. 최근 2집 < Melodrama >를 감명 깊게 들었기 때문에 기대치는 한껏 높아져 있는 상황이었다. 오후 8시쯤 되자, '고스 프린세스' 풍의 드레스를 입은 로드가 무대에 올랐다. 무대 자체는 단출한 구성이었지만 한 명의 카리스마로 여백을 채웠다. 뇌쇄적인 눈빛, 자의식으로 충만한 특유의 몸짓. 그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었다.

공연이 중반쯤 되었을 때, 그녀는 무대 위에 걸터앉아 관객들과 눈을 마주치며 'Liability'를 불렀다. 외로움을 다룬 노래인데, 비록 언어는 다르지만, 그녀의 감정이 관객들에게 오롯이 전달되는 순간이었다. 팬들은 휴대폰으로 불빛을 켜고 로드의 외로움을 위로했다. 공연이 끝나갈 무렵 로드는 맨발로 내려와 팬들과 일일이 손을 잡으며 'Team'을 부르기도 했다. (필자는 로드와 함께 셀카를 찍었다!) 그녀는 마지막 곡으로 'Green Light'를 부르며 광란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오후 9시를 훌쩍 넘긴 시간, 넬은 그린 팜파스 스테이지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베이시스트 이재경은 '오랜만에 지산에 와서 좋다'는 소감을 밝히며 팬들에게 인사했다. 개인적으로 넬의 라이브는 여러 번 접해왔지만, 절대 질리지 않는다. 이날 넬은 신곡 '부서진'의 첫 라이브를 팬들에게 선물했다. 'Ocean Of Light', '믿어선 안 되는 말' 등 넬은 실질적인 헤드라이너처럼 느껴졌다. 또한, 깜짝 출연한 타블로와 함께 에픽하이의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부르는 등, 분위기는 갈수록 뜨거워졌다.

빈틈없는 공연, 그러나 늘어나는 고민

 태극기를 들고 호응을 유도한 메이저 레이저(Major Lazer).

태극기를 들고 호응을 유도한 메이저 레이저(Major Lazer). ⓒ 이현파


이제 록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로 일렉트로닉 디제이가 서는 것도 놀랍지 않은 일이다. 헤드라이너인 메이저 레이저(Major Lazer)는 트랩과 레게를 절반 정도 섞은 셋(set)을 들려주었다. 여자 댄서들이 여럿 나와 격렬한 동작으로 분위기를 띄우는 등, 파티에 최적화된 공연이었다. (그래도 Showtek의 Booyah를 틀 줄은 몰랐다) 심지어 디플로를 비롯한 멤버들은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강남 스타일을 선곡하는 등, 노골적으로 애국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그래도 가장 뜨거운 환호성과 떼창이 터져 나온 것은 단연 히트곡 'Lean On'이었다. 모르는 사람들과도 쉽게 어울려 춤출 수 있는 분위기가 완성되었다. 디플로는 메이저 레이저 공연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벽에도 디제잉을 했다. '지한파' 뮤지션 답게 CL의 Doctor Pepper, 심지어 일리네어 레코즈의 '연결고리'까지 선곡하는 센스를 볼 수 있었다.

올해 밸리록은 클럽 케이브(Club Cave)를 신설하는 등, '록 페스티벌'보다는 '뮤직 페스티벌'의 면모를 갖추는 데에 신경 썼다. 글래스톤베리, 프리마베라, 코첼라 등 세계적인 페스티벌의 흐름을 따른 것이다. 또한 2016년부터 '뮤직 앤드 아츠'라는 제목을 붙인 만큼, 권오상, 홍승혜 등 여러 예술가와의 콜라보레이션이 이루어졌다. 실제로 행사장 이곳저곳에 음악을 소재로 한 미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신도시'나 'Chill 89' 등 볼거리들을 많이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이 페스티벌의 이름에 아츠(Arts)를 붙일 만큼의 역할을 했는지 의문이다.

'밸리록'만의 멋이 필요하다

 환상적인 라이브를 보여 준 슬로우다이브.

환상적인 라이브를 보여 준 슬로우다이브. ⓒ 이현파


주최 측인 CJ E&M에 따르면 올해 밸리록은 3일 동안 6만 명 의 관객을 동원했다. 작년 밸리록이 3일 동안 9만 명을 동원한 데에 비해, 관객 수가 33%가량 감소한 것이다. 우선 금요일 관객이 절대적으로 적은 것이 첫 번째 원인이다. 페스티벌이 3일 동안 개최된다고 할 때, 금요일이 주말보다 인원이 적은 것은 자연스럽다. (물론 라디오헤드가 출연했던 2012년처럼 예외도 있다) 그러나 올해 밸리록의 첫날 관객은 그 어느 해보다 적은 만 오천 명이었다. 물론 궂은 날씨가 예보된 상태기도 했지만, 주말 라인업보다 다소 매니악한 라인업이 그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계적인 뮤지션들이 많이 출연했지만, 한국에서의 티켓 파워를 가진 뮤지션이 적었다. 소위 '한 방'이 없었던 것. 게다가 주말에는 서울에서 The XX를 앞세운 홀리데이 랜드 페스티벌이 개최되는 등, 관객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공연에 대한 불만은 없다. 올해 밸리록은 '안개 속의 천국'이라고 할 만큼 아름다운 순간들을 많이 만들어냈다. 음향에 대한 불만도 느껴지지 않았고, 온전히 소리를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밸리록만의 색깔이 무엇인지, 어떤 라인업을 추구하는 페스티벌인지는 아직도 물음표가 그려진다. 밸리록이 개최 초기부터 일본 후지 록 페스티벌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사실이다. 산과 계곡으로 둘러싸인 지산 리조트를 페스티벌 부지로 선정한 것도 후지록을 어느 정도 참고했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최근 같은 시기에 열린 후지 록 페스티벌의 티켓 매진 소식에 놀랐다. Bjork, LCD Soundsystem, Aphex Twin 등, 한국에서는 '돈 되지 않는 음악'을 하는 뮤지션들이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올해 지산이 후지록의 헤드라이너급 뮤지션을 많이 섭외하지 못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우리 음악 시장과 일본 음악 시장의 규모 차이, 그리고 소비자들의 다양한 음악적 취향을 생각할 때 당연한 일이다. 이 간극을 좁히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우리가 세계적인 밴드들을 한국에서 만나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후지록과 같은 파트너, 벤치마킹의 대상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밸리록이 '후지록의 한국 버전'으로만 남을 이유는 없다. 밸리록도 내년이면 10주년을 맞는 장수 페스티벌이다. 앞으로의 10년까지 바라보고 있다면, 밸리록만의 독자적인 색깔을 고민할 때가 온 것이다.

지산밸리록 로드 슬로우다이브 메이저레이저 지산락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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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음악과 공연,영화, 책을 좋아하는 사람, 스물 아홉.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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