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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서울현충원 입구에 있는 조형물
이곳에 계신 분들의 희생 덕분에 오늘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국립서울현충원 입구에 있는 조형물 이곳에 계신 분들의 희생 덕분에 오늘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 손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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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7일 현충원에서는 매우 의미 있는 문화답사가 있었다. 사회적 기업 SENT SOFT에서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준비한 탈북민과 함께하는 "나라사랑과 호국보훈을 생각하는 현충원길 걷기"이다. 이 행사에는 탈북민 10여 명을 포함한 30여 명의 사람들이 함께하여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시간을 가졌다.

사회적 기업 SENT SOFT는 2012년 탈북/취약계층 청년의 SW 테스팅 일자리 창출과 자립능력 향상을 위하여 설립되었으며, 현재는 관악구의 인증 사회적 기업으로써 활동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이 회사의 김기도 대표는 자립의지를 가진 탈북/취약계층 청년들에게 우리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하여, 이러한 체험을 통해 탈북/ 취약계층 청년들의 자립의지를 강화하고 자연스럽게 우리사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이음매' 역할을 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SENT Culture 배현철 이사는 현충원에서 취약계층인 탈북민과 함께 걸으며 북한음식도 나누어 먹으면서 서로의 차이가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며 이 행사를 기획 하였다고 여는 인사를 하였다. 탈북민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외모만으로는 누가 탈북민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서로 처음 만나는 어색함과 함께 걷기 시작하였다.

처음 찾은 곳은 채명신 장군 묘역이었다. 채명신 장군은 월남전 전쟁영웅으로 돌아가시며 "생사를 함께한 전우들 곁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에 따라 장군묘역이 아닌 사병묘역의 월남전 전우들 곁에 안장되었다. 현충원은 대통령 묘역과 국가유공자 묘역 그리고 장군묘역과 사병 묘역으로 구분된다. 각 묘역에 따라 장례방법과 예우가 다르다. 사병은 화장하여 1평 땅에 평장(平葬)하고 비석만 세우지만, 장군은 8평 묘역에 매장하고 봉분을 만든다. 그러기에 장군의 묘역은 우리에게 겸손함과 전우애에 대해 생각하게 하였다.

월남전 전쟁영웅 채명신 장군의 묘
장군은 유언으로 월남전에 참전 하였던 전우들 곁에 묻어달라고 하였다. 그는 살아서는 야전 지휘관으로써 모범적인 삶을 살았고 죽어서는 박애를 실천하고 있다.
 월남전 전쟁영웅 채명신 장군의 묘 장군은 유언으로 월남전에 참전 하였던 전우들 곁에 묻어달라고 하였다. 그는 살아서는 야전 지휘관으로써 모범적인 삶을 살았고 죽어서는 박애를 실천하고 있다.
ⓒ 손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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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묘역에서 바라본 국립서울현충원
6.25전쟁 전사자와 베트남전쟁 참전 전사자 그리고 독립운동가와 국가유공자들이 안장되어 있다.
 애국지사 묘역에서 바라본 국립서울현충원 6.25전쟁 전사자와 베트남전쟁 참전 전사자 그리고 독립운동가와 국가유공자들이 안장되어 있다.
ⓒ 손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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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송악산에서 장렬히 전사한 육탄 10용사 탑을 지나 위시팡과 강혜림 선생의 묘역에 도착했다. 현충원에 안장되신 외국인은 이 두 분과 애국지사 묘역의 스코필드 박사 이렇게 3분이다. 위시팡과 강혜림 선생은 화교로 6.25전쟁 중 수색과 첩보활동 그리고 중공군 포로 심문에 공을 세웠다. 이 공이 인정되어 화랑 무공훈장을 추서 받았으며 우리 전몰 용사와 같은 대우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프랭크 W. 스코필드 박사의 묘
국립서울현충원에서 가장 많은 분들이 참배를 오시는 곳.
박사님의 섬김과 헌신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엇다.
 프랭크 W. 스코필드 박사의 묘 국립서울현충원에서 가장 많은 분들이 참배를 오시는 곳. 박사님의 섬김과 헌신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엇다.
ⓒ 손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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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W. 스코필드 박사는 수원 제암리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사건을 세계에 알리신 분이다. 1919년 대한독립 만세 소리가 전국을 뒤흔들었다. 제암리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제암리 교회에 기독교인과 천도교인 30여명을 가두고 집중사격을 하였다. 아이라도 살리고픈 여인이 아이를 밖으로 내보내며 살려달라 애원했지만 그 아이 마저 총으로 찔러 죽였다. 그리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안에 살아있는 사람이 있음에도 불을 질렀고 주변 민가에도 불을 질렀고 무고한 민간인 30여명을 학살 하였다.

이 사실은 서울에 있는 외국인들에게도 알려졌고 현장을 찾은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이 참혹한 현장을 보았고 지인들에게 편지로 알렸지만 이 사건을 공론화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을 강의하고 있던 박사는 현장을 찾아가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겼으며 이를 미국의 장로회 기관지에 실었다. 또한 그는 폭정에 신음하는 한국민들 편에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노력하였다. 한국민에 대한 애정은 일제를 불편하게 하였고 결국 추방당하여 고국에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해방 후 한국에 돌아온 박사는 고아들과 가난하여 공부할 수 없는 학생들을 돕는 일에 헌신하다 돌아가셨다. 유언으로 한국에 묻히기를 희망하셨고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애국지사 묘역엔 교과서에서 배웠던 인물들이 안장되어 있었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김상옥 의사, 사이토 총톡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하긴 주기철 목사님,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시발점이 된 만민공동회를 주관한 서재필, 유일한 평민 의병장으로 태백산 호랑이라 불린 신돌석 선생도 이곳에 안장되어 있다.

많은 분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이회영 선생이다. 선생은 6명의 형제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하셨다. 선생은 가족회의 거쳐 전 재산을 정리하여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셨다. 신흥무관학교에서 배출된 학생들은 청산리와 봉오동 전투의 주역이 되었고 훗날 광복군의 추축이 되었다. 만약 신흥무관학교가 없었다면 우리는 독립전쟁을 온전히 수행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선생께서 만든 600억과 나라를 팔아서 받은 이완용의 30억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무더운 날씨에 한 시간 이상을 걸어 지쳐갈 무렵 시원한 정자에서 쉬는 시간을 갖았다. 탈북민들이 준비한 북한식 간식을 같이 나누어 먹었다. 우리나라의 찹쌀 도넛 같은데 북에서는 찹쌀모찌라고 부른다고 했다. 모찌는 일본말인데 아직도 사용 하느냐는 질문이 있었고 북에는 아직도 많은 일본말이 사용되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처음의 어색함이 먹을 것을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해소 되어 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역시 입이 열려야 마음이 열린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다.

모두 둘러 앉아 자연스럽게 질문과 답이 오고갔다. 우리는 소풍을 가면 보통은 김밥을 싸 가는데 북한에도 우리처럼 소풍 때 싸가는 특별한 음식이 있는지 물었다. 특별한 음식은 없고 밥과 반찬을 싸 가는데 평소에는 잘 먹을 수 없는 특별한 음식을 준비해서 소풍을 간다고 하였다. 어릴 적 소풍을 기다렸던 이유가 바로 평소에 먹을 수 없는 특별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이들은 일 년에 두 번 봄, 가을에 소풍을 가는데 이 때 자식들에게 좋은 것을 싸주기 위해 평소에 먹을 수 없었던 과일이나 음식을 준비하고 부자들은 이 때 자신들의 부를 음식을 통해 자랑한다고 하였다. 공산사회인데 생활수준이 서로 비슷한 거 아니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중국을 오가며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더 잘살고 밀수품을 거래하는 시장도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사유재산이 인정된다는 뜻이냐는 질문과 그렇게 벌은 돈은 어디에 보관하는지의 질문이 있었다. 사유재산은 인정되지만 은행이 없어서 돈은 개인의 집에 보관한다고 했다. 그럼 강도나 도둑에게 도둑맞을 수 있겠다는 말에 서로에 대한 감시 때문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단다. 같은 민족이지만 서로 다른 문화 가운데 살고 있으니 점점 더 문화의 차이가 커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북한에서 즐겨 먹는 간식인 찹쌀모찌를 나누며 남과 북이 하나되는 시간
 북한에서 즐겨 먹는 간식인 찹쌀모찌를 나누며 남과 북이 하나되는 시간
ⓒ 손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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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
숭고한 희생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하는 시간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 숭고한 희생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하는 시간
ⓒ 손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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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여성 한 분은 6.25전쟁이 북침이라 배웠는데 현충원을 돌아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고 했다. 우리 애국선열들이 나라를 위하여 목숨 바쳐 싸워 지켜낸 이 땅을 강국으로 만들기 위해, 다시는 이 땅을 외세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여 우리 후세들에겐 부강한 대한민국을 물려주고 싶다고 했다.

다른 분은 "오늘 문화 답사를 통하여 수많은 선열들이 조국을 위하여 국적과 상관없이 희생하신 분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지켜낸 조국이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어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더 많이 노력하여 빨리 통일이 되기를 바랄뿐입니다"라고 이야기했다. 북에 자녀들이 있어서 이곳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도 이름이 공개 되어서도 안 된다고 하였다. 분단을 살아 내고 있는 이의 아픔이 슬픈 여운으로 남았다.

또 다른 분은 "여기를 찾아뵙는 순간 조국을 위하여 전사한 혁명 전사들이 영원히 남아있어 그들의 희생정신을 느꼈습니다. 조국을 위한 선열들의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그분들의 정신을 자식들에게 심어 주어 전사한 그들의 피와 땀이 헛되지 않게 교양하고 그들처럼 살아가게끔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답사에서 얻은 느낌을 삶에 적용하려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영국에서 대학을 다니다 8월 군에 입대하기 위해 귀국한 고준호(22세)씨는 입대 전까지 현충원에서 묘비 닦는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고 하여 참가자들에게 박수를 받았다. 무더운 날의 답사였지만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기회가 되었고 애국선열들의 삶을 배워 현재 자신의 자리에서 애국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이런 뜻 깊은 답사가 더 많이 이루어져서 국립서울현충원이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처럼 자국민은 물론 외국 관광객들에게도 영감을 주는 곳으로 발전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답사를 마치며 다같이 기념사진
탈북민들의 안전을 위하여 모자이크 처리 하였다.
 답사를 마치며 다같이 기념사진 탈북민들의 안전을 위하여 모자이크 처리 하였다.
ⓒ 손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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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국립서울현충원, #문화나눔답사, #탈북민과 함께 하는, #호국탐방길, #SENT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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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리티 인문학이란 저평가 되어 있는 지역의 역사, 문화, 관광자원을 발굴, 개발하여 스토리텔링 하는일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지속가능한 발전 방법을 찾아서 더 행복한 지역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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