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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이 더위에 제주 올레길 걷는다고?"]

어제 게스트하우스에 와서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올레길 순례를 하는 여행자들은 대부분 게스트하우스 한 곳을 베이스캠프로 정하고, 버스를 타고 올레시작지점으로 옮겨 다니며 걷는다는 것이다. 그래야 매일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걷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부득이하게 게스트하우스를 옮길 때도 배낭을 미리 숙소로 옮겨놓은 뒤 걷기를 시작한다고 한다.

그걸 모르고 5, 6, 7코스 걷기 계획을 잡으면서 코스마다 숙소를 따로 3곳 잡아놓았으니 영락없이 매일 배낭을 메고 걸어야 할 판이다. 더구나 게스트하우스에는 전부 빨래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옷을 많이도 챙겨왔으니 배낭은 또 얼마나 무거운지, 아들과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끝에 오늘은 배낭을 먼저 다음 숙소로 옮겨두고 걷기로 했다.

3박4일 짐이 든 배낭
 3박4일 짐이 든 배낭
ⓒ 추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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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오전 6시부터 일어나 아들을 깨우고 배낭을 다시 꾸려 길 나설 채비를 한다. 오전 7시에 게스트하우스에서 제공하는 토스트와 우유로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고 먼저 오늘 묵을 숙소로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다행히 제주에는 버스 노선이 아주 잘 돼 있다. 정류소마다 붙어있는 큐알 코드를 찍으면 바로 타야 버스가 몇 분 후에 도착할지를 알려주니 매우 편리하다.

배낭을 숙소에 옮겨두고 출발지점인 쇠소깍에 도착한 것이 오전 9시, 6코스 출발 도장을 찍은 뒤 올레길로 들어선다. 22개의 올레길을 '상중하' 난이도를 매겨놓은 걸 보면 6코스는 드물게 난이도 '하'에 속한다. 전 구간이 평지에 가깝고 경치도 뛰어나 올레객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코스이다.

해안가를 배경으로 놓인 벤치
 해안가를 배경으로 놓인 벤치
ⓒ 추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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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조랑말을 형상화한 올레길 안내표지 간세, 머리 모양쪽으로 걸어야 한다.이런 그림이 있는 구간은 휠체어로 갈 수도 있는 길이다
 제주 조랑말을 형상화한 올레길 안내표지 간세, 머리 모양쪽으로 걸어야 한다.이런 그림이 있는 구간은 휠체어로 갈 수도 있는 길이다
ⓒ 추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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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길의 표식은 파도모양을 형상화한 화살표부터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중 제주 전통의 조랑말을 형상화한 간세도 있다. 간세표식은 머리모양이 있는 쪽을 보고 걸어야 다. 특히 '간세' 표지판에 휠체어가 그려진 구간은 휠체어를 탄 이들도 충분히 걸을 수 있는 구간이라는 의미인데 6코스에서는 종종 이 표지를 맞딱뜨릴 수 있다.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해안절경을 눈으로 감상하며 아름다운 파도가 들려주는 경쾌한 자연의 교향악을 귀로 들으며 평평한 해안가를 따라 걷다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곳곳에 쉴 수 있는 쉼터가 마련돼 있고, 시나 이야기를 적어 세워 둔 표지석들이 길에 스토리를 더해 정말 걷는 것만으로 힐링이 되는 길이다. 다른 계절에 언제든 다시 한번 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올레 6코스의 절경
 올레 6코스의 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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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사람은 여전히 보이지 않지만 6코스에서는 자전거를 탄 여행자들과 종종 마주치게 된다. 중간에 만난 한 자전거 여행객은 어제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타고 돌았더니 종아리가 새까맣게 탔다고 우리에게도 썬크림을 철저하게 바르라고 충고를 한다.

배낭도 없이 가뿐한 몸으로 걷는 6코스, 모든 상황이 어제보다는 낫지만 날씨만은 어제보다 나아지지 않았다. 역시나 바람 한 점이 없고 정수리로 내려꽂히는 햇살이 너무 강렬해서 발자국을 옮기기가 힘이 든다. 걷기 시작한 지 30분 만에 어제처럼 둘 다 땀에 절어 물에 빠진 생쥐꼴이 돼 버렸다.

이럴 때는 호흡조절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그늘만 나오면 쉬면서 숨을 고르며 걷다보니 역시 속도는 자꾸만 느려진다. 걷기 시작한 지 1시간쯤, 올레 할망집을 만났다. 이 집의 해물라면이 유명하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안타깝게도 문이 닫혀 있다. 하긴 이렇게 더운 날씨에 누가 라면을 먹을까? 생각하는데 바로 우리 아들이 이 집 라면을 꼭 먹어보고 싶다고 적혀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해 보란다. 몇 번이나 전화를 해도 연결이 되지 않는다. 

해물라면으로 유명한 올레할망집
 해물라면으로 유명한 올레할망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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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지기오름으로 오르는 계단
 제지기오름으로 오르는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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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제주더위를 피해 피서라도 가신 모양이다. 올레할망집을 지나 돌아서자 올레표지판이 갑자기 숲속으로 난 가파른 나무계단을 향하고 있다.

"어? 6코스는 다 평지라더니 웬 계단이야?"

그러나 표식이 있으면 가야하는 법, 쉽게 끝나려니 하고 오르기 시작했는데 계단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뜨거운 햇살은 내리쬐고 숨이 턱턱 막힌다. 비명소리가 절로 나오는데, 문자오는 소리가 삑 나서 열어보았더니 긴급재난문자다 .

'국민안전처 안전 안내. 오늘 11시 폭염주의보 발령, 노약자 야외활동자제, 충분한 수분 섭취 , 물놀이 안전 등에 유의하세요.'

하필 땀 뻘뻘 흘리며 계단을 오르고 있는데 받은 문자, 그렇다고 내려갈 수도 없고 계속 전진을 하기로 하는데 슬그머니 걱정이 되기는 한다. 더위 먹는 건 자신도 모르게 생긴다고 하던데, 혹여 사고라도 나는 건 아닐까, 앞서 가는 아들을 계속 불러 그늘에 세워 쉬게 한다.

"아니, 도대체 왜 갑자기 산으로 올라가라는 거야? 이거 혹시 오름 아니야?"
"글쎄."
"근데, 엄마 이 계단 기울기가 거의 90도 아니야?"

투덜대며 거의 기다시피 계단을 오르는데 갑자기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바로 거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한라산이 전체 위용을 드러내며 눈 앞에 짠하고 나타난다. 정말 생각도 하지 못한 그리운 친구를 갑자기 맞딱뜨린 기분이다. 

가을 하늘처럼 맑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늠름하게 위용을 드러낸 한라산, 사람이 그린 어떤 명화보다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청명한 날씨에 흰구름까지 액센트가 돼 완벽한 한 폭의 풍경화를 연출해 낸다.

제지기오름에서 본 한라산
 제지기오름에서 본 한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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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에서 본 보목포구
 오름에서 본 보목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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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목포구의 모습도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높은 아파트 하나없이 초록의 나무들 사이에 키 작은 집들이 안겨있는 모습이 도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참 정겨운 풍경이다. 투덜대며 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 올랐지만 흘린 땀방울의 수고를 위로하고도 남는 풍경이다.

우리네 인생도 누구에게나 이랬으면... 힘들게 수고하고 참고 견디고 오르면 이런 서프라이즈한 선물들이 준비돼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지금 브라질에서 땀을 흘리는 올림픽선수들이 그러하듯 항상 결과가 보장돼 있지는 않다. 그렇지 않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걸어가야 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의 준엄한 무게이다.

안내문을 읽어보니 이 곳이 '제지기오름'이고 표고는 94미터 정도라고 한다. 생각에 한 300미터는 오른 것 같은데 겨우 94미터 되는 높이를 오르느라 그렇게 고생을 했단 말인가? 푹푹 찌는 날씨 때문에 도무지 판단력이 정상이 아니다.

올라가는 길은 그렇게 힘들었는데 내려오는 길은 금방이다. 내려와서 만난 포구가 보목포구, 자리물회로 유명한 포구라고 하는데 주변에 다 둘러봐도 횟집들 밖에 없다. 아들은 계속 '해물라면' 노래를 하는데 해물 라면을 하는 집은 없다. 일단 더위를 피해야겠기에 한 집에 들어가 한치물회를 먹었는데, 맛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명색이 부산 사람들이다보니 물회 입맛만은 까다로운 편인지도 모른다며 둘이서 웃었다. 

보목포구에서 이어지는 길도 계속 바다를 끼고 걷는 해안절경이다. 20여 분을 걷자 길이 나지막한 언덕으로 이어지는데 그 언덕배기에 소박한 쉼터가 하나 나타난다. 창문틀만 있을 뿐 유리창은 없는 창문이 인상적인데 창문으로 포구에서부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감히 에어컨과 비교할 수 없는 자연바람이다.

6코스에서 만난 쉼터
 6코스에서 만난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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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에 있는 나무판에 그린 지도
 쉼터에 있는 나무판에 그린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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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올레 전 구간 중 이렇게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은 처음 만났다. 연일 바람에 감탄하며 앉아 있으니 주인 아주머니가 막걸리 비슷한 것을 따라 주시며 제주 특유의 음료수인 쉰다리라고 한다.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것이긴 한데 먹어보니 막걸리와 거의 비슷한 맛이 난다.

어제보다 가벼운 몸에 길도 수월하다고 해서 오늘은 거의 날아다닐 걸로 예상을 했는데 전혀 기대 밖, 뜨거운 햇살 때문에 오래 걸을 수 없다보니 여전히 속도는 나지 않고 발의 통증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오후 2시 무렵이 되자 오늘 과연 끝까지 걸을 수 있을까, 아침과는 전혀 다른 고민을 하게 된다. 아들에게 이런 고민을 얘기했더니 자기는 끝까지 걸을 테니 나보고는 택시를 타고 숙소로 가라고 한다. 내가 왜 꼭 그렇게까지 걸어야 하냐고 하니 제대로 걸어가 도장을 받는 것이 목표란다.     

할 수 없이 이를 악물고 같이 걷기 시작한다. 올레길은 어느새 서귀포 시내로 들어선다. 6코스는 서귀포에서 이중섭미술관으로 향하는 길과 바닷가로 향하는 길로 나뉘는데 우리는 바닷가길을 택해 걷기로 했다.

올레 표지판을 따라 내려가다보니 소천지와 만난다. 용암이 흘러내려 굳어졌다는 현무암 바위가 병풍처럼 펼쳐 있는 사이로 용천수가 고여 만들어진 소천지는 오랫동안 사진작가들만 아는 비경이었다고 한다. 특히 겨울철 날씨가 쾌청할 때면 한라산이 비치는 모습이 비경이라고 하는데 올레 6코스에 포함이 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됐다고 한다.

소천지
 소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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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천지에서 수영하는 아들
 소천지에서 수영하는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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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도 풍경이지만 몇 사람이 수영을 하는 걸 보고 아들도 수영을 하겠다고 한다. 수영을 하는 사람에게 물으니 깊은 곳은 2미터가 족히 된다고 하는데 아들은 어느새 신발만 벗고 옷을 입은 채로 소천지로 뛰어든다.

초등학교 때 2년여 배워둔 수영실력을 올레길에서 발휘할 줄이야, 물 만난 고기마냥 신이 나서 자유형에 배형, 접형까지 선보이며 활개를 치니 옆에 구경하던 사람들이 다 칭찬을 한다. 

소천지에서 나와 잠시 걷는 중에도 옷이 거의 말라가는데 이번에는 소정방폭포가 나타난다. 아들은 다시 물로 뛰어든다. 정방폭포보다는 물줄기가 작지만 오히려 접근이 쉬운 소정방폭포는 제주 사람들의 물맞이 장소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요즘은 관광객들이 찾아와 물맞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소정방폭포에서 물맞이하는 아들
 소정방폭포에서 물맞이하는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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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기둥이 뿜어내는 안개 같은 물방울들이 에어컨보다 더 시원한 바람을 만들어내며 땀을 식혀준다. 나도 이미 땀으로 젖은 몸이니 개의치 않고 신발을 벗고 폭포 가까이로 다가간다. 그런데 발을 폭포에 담그는 순간 드라이 아이스 이상의 차가움이 몰려들어 저절로 비명이 나온다. 대체 이 뜨거운 날에 이렇게 차가운 용천수를 쏟아낼 수 있는 제주의 자연환경이란 게 신기할 뿐이다.

그동안 제주를 여러 번 왔지만 여름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리고 지금까진 매번 차를 렌트해서 돌다보니 포인트에만 도착을 해 구경을 하고 가곤 했다. 때문에 한 번도 발을 벗고 바다에 발을 담궈본 적이 없다. 워낙 차가운 물을 싫어하다보니 폭포도 멀리서 보기만 할 뿐 직접 다가간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하루 종일 걷고 나서 만나는 폭포가 주는 느낌은 더 이상 이전의 폭포가 아니다. 눈보다 몸이 먼저 반응을 해 나도 모르게 물로 성큼성큼 다가가게 된다.

어쩌면 우리 인생의 고난도 이와 같지 않을까? 힘들게 병을 이겨낸 환자가 맞이하는 일상이 더 이상 옛날의 일상이 아니라 모든 것이 고맙고 감사하듯, 하루 종일 걷고 만나는 제주의 폭포는 더 이상 옛날의 폭포가 아니다. 폭포의 시원한 물줄기가 얼마나 고맙고 기특한지... 여름 제주 올레길 걷기는 제주를 단순히 구경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끼게 해 주는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정방폭포 안내소에서 6코스 중간 도장을 찍었다. 이 곳이 6코스 3분의 2 지점이라고 하는데 남은 6코스 종점인 외돌개까지는 1시간 반은 가야한다고 한다. 일단 시원한 물에서 한번 긴장을 푼 발의 통증이 더 심해지니 계속 걸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시간도 이미 4시를 넘어서고 있다. 아들을 설득해 나머지 구간을 남겨두고 택시를 타고 오늘 머물 숙소로 향했다.

이틀동안 너무 무리를 한 탓인지 밤에는 내내 앓는 소리를 내자 이제는 동지같은 든든한 아들이 다리와 발을 주물러 준다. 그렇지만 이 상태로 내일은 도저히 걷기가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의 깨달음 :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함께 가느냐도 중요하다. 이 힘든 길을 혼자 왔으면 어쩔 뻔 했담!


태그:#올레길 6코스, #폭염, #긴급재난정보, #제지기오름, #쇠소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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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작가협회 회원, 방송작가, (주) 바오밥 대표, 바오밥 스토리 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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