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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다크 아이들과 선생님.
 라다크 아이들과 선생님.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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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다크의 하늘처럼 맑은 아이들.
 라다크의 하늘처럼 맑은 아이들.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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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안 와 책을 보는데 할머니가 오셨다. I like her!! 할머니는 인상이 참 좋으시다. 왜 자지 않느냐며 책과 나에 대해 물어보셨다. 도란도란... 그 느낌이 참 좋다. 갑자기 불이 꺼져 할머니께서 방문 앞까지 데려다 주셨다. 내일은 할머니가 일하시는 학교에 간다. 라다크어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기대된다.' - (어린여행자들의 일기, 아라)

레에서의 3일째 아침. 우리들은 시내의 한 공립학교를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아이들은 게스트하우스 주인아주머니인 '왕모'의 가정집과 부엌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는데, 그 덕분에 왕모가 자신이 교사로 있는 학교에 방문해보겠느냐고 제안해준 것이다.

도보로 20분 거리라면 결코 먼 길이 아니었지만, 고산세계로 날아온 이방인들은 느릿느릿 발을 옮겨놓으면서도 숨을 헐떡여야 했다. 그래서였겠지. 골목길이 느릿느릿 이어지다 느긋하게 꺾어지곤 했는데, 바람도 느릿느릿, 길가에 나와 앉은 사람들도 느릿느릿, 차를 마시며 그림처럼 소박한 미소를 느릿느릿 나그네에게 보내주었다.

도심에 위치한 학교는 작고 예뻤다. 초, 중, 고등학교가 같이 들어와 있는 학교라고 했다. 교문도 담도 없는 학교로 들어섰을 때 제일 먼저 우리들을 맞이한 것은 펌프질을 해서 물을 긷는 우물이었다.

바람도 느릿느릿, 길가에 앉은 사람들도 느릿느릿

선생님을 따라 종종종 소풍을 떠나는 아이들.
 선생님을 따라 종종종 소풍을 떠나는 아이들.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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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프질로 물을 긷는 학교 우물(쉽게 보고 덤빈 아이들 숨이 차서 혼났다).
 펌프질로 물을 긷는 학교 우물(쉽게 보고 덤빈 아이들 숨이 차서 혼났다).
ⓒ 김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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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힘 쓸 일 없어 심심했던 차에 '피 끓는 고딩' 정호와 문중과 철민이가 학교 여선생님을 위해 신나게 물을 길어 올리는 동안, 나의 시선은 작은 운동장을 가로지른다. 키 작은 교실건물이 'ㄱ'자로 서 있고 그 뒤로 새파란 라다크 하늘이 떠있다. 그 높고 투명한 라다크의 하늘 품에 학교가 폭 안겨있는 듯했다.

마침 그 풍경들을 배경 삼아 초등학생 저학년들이 한 줄로 종종거리며 교사를 따라가고 있었다. 언젠가 네팔의 학교를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천상(天上)의 학교' 풍경이 저러했던 것 같다. 아이들은 도시락 가방을 둘러매고 막 소풍을 떠나는 길이었다.

도시락 안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김밥은 아니겠지. 혹 삶은 달걀 하나쯤? 나도 도시락 싸들고 따라갈 수 있다면. 소풍 길 다다른 너른 들판에는 야크가 풀을 뜯고 우리들은 무릎을 맞대고 둘러앉을 수 있겠지. 그러면 라다크 아이들의 장기자랑도 볼 수 있을 텐데...

"이모, 삼촌, 저것 봐요! 태양계예요~!"

아이들 외침 덕분에 소풍 따라나섰던 내 영혼이 순식간에 회귀한다. 교실 외벽에는 태양계 행성들이 차례대로 벽화로 그려져 있다. 우리 아이들이 학교 과학실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그림이다. 태양계의 행성들을 지상에서 우주와 가장 가깝게 위치한 이곳 학교에서 만나는 것이 뜻밖이었을까. 아이들은 그 익숙한 그림을 오히려 신기해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예상 못한 곳에서 만나는 익숙한 장면들은 반가우면서도 간혹 낯섦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곤 하니까.

우리들은 태양계에 함께 사는 친구들.
 우리들은 태양계에 함께 사는 친구들.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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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교실에서 라다크 아이들과 친구되기.
 작은 교실에서 라다크 아이들과 친구되기.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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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태양계 행성들을 지나 작고 어두운 교실로 들어갔다. 소풍을 가지 못하고 남은 라다크 아이들이 올망졸망 앉아있었다. 어떤 수업을 하고 있었을까. 선생님은 이방인들을 아이들에게 소개시켜 주신다. 작고 까만 아이들은 부끄러워 자꾸만 가랑이 사이로 고개를 파묻는다. 우리 아이들이 먼저 다가갔다.

"내 이름은 민아, 넌 이름이 뭐야?"
"......"
"언닌 한국에서 왔어~! 반가워~!"
"히히..."

라다크 아이들이 가랑이 사이에서 하나둘 고개를 빼들고 살짝살짝 미소를 짓더니 마침내 용기 내어 동요를 불렀다. 우리 아이들도 한국 동요를 답가로 부르고, 다시 이름을 물어보다 서로 머리를 땋아준다. 이제 아이들은 여기저기 교실을 옮겨 다닌다.

발음이 신기해서일까.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재밌는지 중학생 또래까지 합세하여 사진 찍고 이름 부르고 사진 찍고 웃고 다시 사진 찍고 이름 부르다 또 사진 찍다 깔깔거린다. 지켜보는 나로서는 그들의 즐거운 놀이가 끝날 것 같지 않아, 부럽다.

처음, 서로에게는 이름도 피부색도 생김새도 낯설었던 만남. 우리나라에 비하자면 형편없이 낡고 어설픈 학교 시절들과 꾀죄죄한 아이들의 행색에 어색해했던 몇몇 여행학교 아이들도 어느새 편안해 보였다. 남자아이들은 정민이가 한국에서 가져온 새 축구공에 바람을 넣고 운동장에서 서로 엉키어 공을 차고 있다. 아이들에게 이번 여행은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그 짧은 시간에 우리들은 친구!
 그 짧은 시간에 우리들은 친구!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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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머리를 땋아주는 아이들.
 서로 머리를 땋아주는 아이들.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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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친구와 함께 어느 날 문득 시외버스터미널에 갔었다. 대합실 벽에 그려진 지도를 보며 어디로 갈까, 둘이서 어디로 갈 수 있을까, 그렇게 눈으로 짚어보았을 거다. 청학동.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었다. 머리를 길게 땋은 도령들이 훈장님 앞에 무릎 꿇고 공부하는 서당이 있고, 삼베 저고리 입은 아낙들이 개울가에서 빨래하며 현대 문명을 등지고 살아간다는 지리산 자락의 마을.

"하동! 학생 둘이요~."

친구는 내가 주머니 안의 돈을 헤아려보기도 전에 그렇게 말했다. 오늘 안에 돌아올 수 있는 길인지도 따져보기 전에. 그리곤 울산에서 하동까지 그리고 다시 청학동까지 버스를 타고 달렸었다. 그 길이 내가 기억하는 나의 첫 여행이었다. 드디어 떠났다는 느낌. 17년 동안 살아왔던 나의 영역 밖으로 나섰다는 느낌. 부모님을 따라 부산 외갓집을 오가던 길과는 분명 달랐었다.

생각해보면 그날 난 내 삶을 둥그렇게 경계 짓던 얇고 투명한 막을 들추어 '세상 밖의 세상'을 처음 만났던 것 같다. 사실 반나절이 넘게 걸려 도착한 청학동에서 내가 처음 보았던 것은 서당에 달린 현대식 벽시계였고, 그것이 단절의 공간에서 만난 단절되지 않은 현대문명의 상징으로 내게 다가왔지만, 나의 첫 여행은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떠났으니까. 이미 내게 익숙하던 하나의 세계를 떠나 또 하나의 세계를 만나고 있었으니까.

돌아오는 길에 우린 더 이상 차비가 없었지만, 그래서 더 즐거웠다. 하동 길바닥에 앉아있던 나는 '울산시'라고 적힌 크고 하얀 번호판을 단 자동차를 보고 무작정 태워줄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여행자가 되어 처음 시도해본 히치하이킹이었던 셈이다. 그날 크고 하얀 번호판은 임시번호판이라는 사실과 그곳에 '울산시'라고 적혔다 해서 꼭 울산 소재의 자동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우린 실망하지 않았다. 그것마저 또 다른 세계에서 통용되는 암호 같았으니까.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세상에는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비밀을 알게 된 것은. 모든 것이 익숙한 세계와 모든 것이 처음인 세계. 세상 안의 세상과 세상 밖의 세상. 두 세계를 연결하는 오래된 비밀의 문이 여행이라는 사실도. 그러니까, 난 지금 궁금한 거다. 이번 여행이 여행학교 아이들에게 세상 밖 세상을 향한 그들의 첫 여행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하는.

"아이들이 너무 행복해보여요"

라다크 레 공립학교 아이들.
 라다크 레 공립학교 아이들.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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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 애기들이 너~무 귀여워요!"
"다들 행복해보여요!"

라다크 아이들과의 짧은 만남이 끝났다. 아이들에게도 아이들은 귀여운 모양이다. 그들 눈에도 이곳 학교 아이들이 순박해 보이나 보다. 무엇이든 부족하고 열악해만 보이는 이곳 아이들이 그들 마음에도 행복하게 비춰지나 보다.

여행을 하다보면 행복의 조건이란 것이 그리 크거나 복잡하지 않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내가 어떤 능력이 없더라도,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있지 않더라도 행복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매번 처음인 것처럼 깨우치곤 한다. 아이들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간 어느 날에, 일상이 힘겹다고 느낄 때 라다크 레의 어느 학교에서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만났던 이국의 친구들을 떠올리며 행복의 조건에 대해 헤아려볼 수 있기를.

아이들은 한국에서 선물을 5개씩 준비해왔다. 여행길에서 만나는 친구와 헤어질 때 마음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정민이는 축구공 5개를 가져왔는데 그중 하나에 우리들의 이름을 모두 적어 우정의 선물로 남겨두기로 했다. 축구지도자가 꿈인 정민에게는 축구공을 나누어주는 것이 꿈을 나누는 것과 같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막 여행자의 길로 들어선 여행학교 아이들은 구경꾼이 아니라 친구로 다가서는 법을 그렇게 스스로 배우고 있었다.

'6살, 7살 아이들 반에 갔다. 처음에는 우리를 신기해하고 피했는데 나중에는 노래도 불러주고 율동도 했다. 아이들은 전 세계 어디를 가나 다 귀여운 것 같다. 그리고 11살 반에 가서 같이 사진도 찍고 놀았다. 내 이름이 쉬워서 아이들이 내 이름을 계속 불러줬다. 한 아이가 "Mina~ Beautiful!!"했는데 표정관리가 안 됐다. ㅋㅋㅋㅋ.' - (어린여행자들의 일기, 민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학생들도 많았고 예쁜 학교였다. 아이들과 함께 공을 차고 우리들의 이름이 써져있는 축구공을 선물하였다. 아이들이 좋아했으면 좋겠다.' - (어린여행자들의 일기, 정호)

'아이들 눈이 진짜 예뻤다. 이 아이들은 우리들을 어떤 생각으로 쳐다보고 있었을까? 내가 낯설어서 먼저 다가가지 못할 때도 이름을 먼저 물어봐주고 인사를 먼저 해주는 것이 감사하다. (헤어질 때) 우릴 향해 끝까지 인사하던 모습이 아른거린다.' - (어린여행자들의 일기, 수경)

축구공에 우리들의 이름을 적어 우정의 선물로.
 축구공에 우리들의 이름을 적어 우정의 선물로.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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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우리들은 라다크에서 쌍칼파가 되기로 했다. 여행을 떠나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여 앉았다. 그리곤 서로의 쌍칼(!)을 내보였다.

"쌍칼로 잘라버리고 싶은 거요? 덜렁거려서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거 하고요, 머리카락 뽑는 습관이요."
"화를 잘 내요. 그리고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성격이 있는데, 한번 고쳐보고 싶어요."

이야기의 기본 속성이 그렇듯이, 아이들의 쌍칼 고백은 가볍게 시작되어 한 명씩 돌아가는 사이에 점점 더 깊은 성찰의 세계로 다가선다.

"새로운 일에 대한 두려움이 많아요. 여행학교에 참여한 이유이기도 해요. 또 다른 나를 찾아보고 싶었어요."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려는 버릇이 있어요. 스스로 뭔가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싶어요."
"욕심이 많아요. 친구들에 대한 시기 같은 거요. 그것이 내 마음을 전쟁상태로 만들 때가 있어요."

라다크에서 나의 쌍칼을.... 생각하다.
 라다크에서 나의 쌍칼을.... 생각하다.
ⓒ 정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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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놀란다. 아이들의 쌍칼이 만만치 않게 날카로워서다. 덜렁대고 가볍고 장난스럽기만 할 것 같은 그들 마음 한 편에는 이처럼 맑고 깊게 벼려지고 있는 칼날 하나씩 자리하고 있다. 이제 아이들의 이야기는 각자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친구의 고백이 내가 미처 떠올리지 못한 나의 고백이기도 하고, 나의 쌍칼 다짐이 친구의 마음으로 날아가 생각의 씨앗을 내리기도 한다. 아이들의 이야기는 솔직해진다.

"이기적인 모습입니다. 나만 아니면 되지, 라고 생각할 때가 많죠. 책임지고 싶지 않아서 일 겁니다."
"남들 앞에 있으면 말을 잘 하지 못하고 어색해져요. 쾌활하고 밝은 친구들을 보면 참 보기 좋은데... 나도 그렇게 되고 싶거든요. 시간이 필요하겠죠?"

물론, 습관이나 삶의 태도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고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여행학교가 어떤 계기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프로야구 선수들이 슬럼프가 찾아오면 좋았을 때의 타격자세나 기분을 기억해내려고 하는 것처럼, 아이들이 삶의 길모퉁이에 설 때마다 기억해내고 돌아볼 수 있는 순간을 만들어둘 수 있다면 우리들의 여행은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이다.

'쌍칼파되기 프로젝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내가 버리고 싶은 두 가지가 타인 지향적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마 내 자신을 좀 더 소중히 여기지 않아서라고 느껴진다. 기분이 이상하다. (중략) 오늘 밤하늘의 별을 보았다. 라다크에서 처음으로 느끼는 신비함? 놀라움? 그냥 좋았다. 단순한 것이 좋다.' - (어린여행자들의 일기, 예인)

'오래된 미래'의 도시 라다크 레.
 '오래된 미래'의 도시 라다크 레.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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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본 연재기사는 2015년 3월~11월 제민일보에 실렸던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태그:#여행학교, #라다크, #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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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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