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자객 섭은낭>의 스틸 컷. 선명함과 흐릿함을 대비시킴으로써 인물의 내적 갈등을 암시한다.

영화 <자객 섭은낭>의 스틸 컷. 선명함과 흐릿함을 대비시킴으로써 인물의 내적 갈등을 암시한다. ⓒ 영화사 진진


무협이란 장르는 한 마디로 '대결 그 자체'에 관한 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분법으로 명확히 나누어진 세계, 즉 정파와 사파가 있고, 밝음과 어둠이 있으며, 선과 악이 명확히 구분되는 곳을 배경으로, 서로 반대되는 두 개의 원리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니까요.

그래서 무협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정반대로 대립하는 가치들을 놓고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한때 같은 편이었으나 지금은 원수가 된 사람, 사랑하지만 죽여야만 하는 사람, 최고의 제자였지만 최대의 적수가 된 사람…. 뭐 이런 식으로요.

감독 허우 샤오시엔은 <빨간 풍선(Le voyage du ballon rouge)>(2007) 이후 8년 만의 내놓은 신작에서 이런 무협의 대결 원리를 적극적으로 적용합니다. 내러티브 구조, 배우의 연기, 촬영, 편집에 이르기까지요. 그 결과 이 영화는 무협 장르의 본질을 영화적으로 잘 표현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먼저 이야기 구조를 보면, 섭은낭(서기)과 전계안(장첸)을 중심으로 다양한 대립 구도를 갖는 인물들을 설정한 다음, 그들의 이야기를 뒤섞고 중첩해 놓은 것이 눈에 띕니다. 마치 무협에 관한 거대한 모자이크라도 만들겠다는 듯이 말이죠. 이 영화에 시작과 끝은 있지만, 기승전결로 끝나는 일반적인 직선 플롯은 아닙니다. 대립과 갈등이 플롯의 동력으로 사용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주된 관심사로 다뤄지니까요.

배우의 연기 연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靜)과 동(動)을 대립시키는데, 이것이 과감한 편집과 맞물리면서 서스펜스를 자아내거나 감정의 깊이를 더하죠. 이 영화의 '중력이 작용하는' 액션 시퀀스들이 주는 묘한 긴장감이나, 섭은낭이 어머니와 예전 일들을 이야기하다 옥결에 얼굴을 묻으며 울 때 느껴지는 짠함 같은 것이 좋은 예입니다.

이 영화의 촬영 콘셉트 역시 대립적인 효과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선명함과 흐릿함의 대비를 통해 인물 내면의 딜레마를 암시하는데, 이때 활용되는 것이 렌즈의 초점, 산의 안개, 숲의 나무와 풀들, 반투명 베일, 연기 같은 것들이죠.

개인적으로 허우 샤오시엔의 전성기는 <비정성시(悲情城市)>(1989)로 정점을 찍은 1980년대로 보는 쪽입니다. 그때 내놓은 자연주의 스타일의 걸작들이 비록 형식적 완성도는 떨어질지 모르나, 선명한 주제의식과 감독으로서의 치열함이 주는 감동이 있었으니까요. 이 영화 <자객 섭은낭>은 감독의 1980년대 작품들과 주제나 스타일 면에서 완전히 다르지만, 예술적 형상화를 위한 고민과 사투의 흔적들이 생생히 남아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느낌을 줍니다.

여담이지만 이 영화는 구형 TV 비율에 가까운 1.37:1의 화면 비율입니다. 중간에 딱 한 번 화면 비율이 바뀌는 부분이 있으므로 사이드 마스킹을 할 수가 없는데, 화면 양쪽에 떠 있는 애매한 블랙 덕분에 수직 구도가 굉장히 강조됩니다. 이것이 주는 긴장감은 예상외로 큰데, 양옆의 블랙을 의식하면 할수록 그런 느낌을 더욱더 많이 받게 되지요.

이런 효과까지 계산했을까 싶어 감독 인터뷰를 찾아봤는데, 우리 눈과 가장 가까운 비율이라 더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선택한 것이라고만 나와 있더군요. 어찌 되었든 이 화면 비율의 효과는 만점이었습니다.

 영화 <자객 섭은낭>의 런칭 포스터

영화 <자객 섭은낭>의 런칭 포스터 ⓒ 영화사 진진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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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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