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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일 줄 알았는데, 64년 만에 나타났습니다. 아버지!"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24세의 젊은이가 인민군에서 탈영하고 남한에 내려왔다. 올해 벌써 89세 할아버지가 됐다. 그 할아버지는 지금도 꿈속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 인사를 드린다. 아버지 얼굴을 뵙던 꿈에서 깨어나, 아버지가 없는 현실의 늙은 당신을 자각했을 때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1928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나신 내 아버지는 20대 초반에 전쟁을 겪게 됐고, 인민군 소집령에 따라 소집됐다. 소집돼 함흥에 모여 있던 중에 '전쟁하다 죽을 것인가, 지금 뛰다가 죽을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죽을 각오로 어둠 속 탈영을 감행했다. 그리고 17일간 지인의 집 마룻바닥 밑에서 숨어 지냈고, 그 이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족들과 조만간 만날 것을 약속하며 남한으로 넘어오게 됐다. 거제난민수용소, 제주도 등지로 옮겨 다니다가 대한민국 군인이 돼 육군에서 근무를 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세 살 때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몇 년 후에 새어머니를 맞게 됐고, 그 과정에서 개인에게는 많은 상처로 남아있는 소외감과 외로움을 겪으며 어린 시절을 보내셔야 했다. 그 소외와 외로움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어 나를 불편하게 한 적도 많았고, 또 제대로 상상되지 않는 그 아픔들에 가슴 한편이 저려오기도 했었다.

전쟁이 낳은 것들

1951년 원산.
 1951년 원산.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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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20대의 젊은이가 죽을 각오로 자신의 고향을 등지게 만들었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인연을 만들어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탄생까지도 전쟁과 연관돼 있는 것일는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당시의 북한을 '자유'가 전혀 없었던 곳으로 기억하신다. 기독교인이었던 아버지는 종교마저 국가의 관리 체제 속으로 들어가야 했던 현실이 힘들었고, 무조건 '김일성 만세'를 외쳐야 했던 것도 힘들었다. 북한의 사회주의는 소련이나 중국과도 완전히 달랐다고 말씀하신다.

휴전선이 이렇게 완고하게 자신의 가족들을 갈라놓을 것이라 예측하지 못했던 아버지는 결국 혈혈단신으로 남한에서의 삶을 살아가야 했다. 그때 아버지 마음속에 떠올랐던 분이 아버지의 큰아버지였다. 아버지는 큰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미 남한에 내려와 목사 생활을 하신다는 것과 그 성함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렇게 물어물어 찾다가 가게 된 곳이 지금까지 살고 계신, 아버지의 제2의 고향 제주도다. 그리고, 거기에서 지금까지 60년이 넘도록 함께 살고 있는 어머니를 만나게 됐다.

어머니는 당시 광주에서 성경학교를 다니다가 여름에 집에 내려갔는데, 교회 어른들이 아버지와의 결혼을 거의 확정해놓은 상태라 얼떨결에 아버지와 결혼하게 됐다. 북한에서 홀로 내려오신 아버지, 그리고 오빠와 남동생이 있었으나 다들 어릴 적에 병으로 죽고 무남독녀로 살아오신 어머니는, 신기하게 그리고 순식간에 부부가 돼 60년이 넘도록 부부의 연으로 함께 살고 계신다.

제주 토박이와 북한 실향민, 그리고 말괄량이 할머니

2002년 할머니가 태어나신지 100년이 되던 날,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 할머니의 100세 생신잔치 2002년 할머니가 태어나신지 100년이 되던 날,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 이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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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7월 6일 무더웠을 것으로 생각되는 밤, 4남 3녀를 자녀로 뒀던 41세의 산모가 여덟 번째의 아이를 낳았다. 24세 때부터 아이를 낳기 시작한 어머니는 이렇게 41세까지 여덟 명의 아이를 낳으셨다. 마음 같아서는 한 다섯 정도 낳았을 때부터 이젠 그만 낳았으면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아이는 계속 생겼고, 어머니는 이렇게 주시는 것 또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며 현실을 받아들였다. 어머니의 바람대로라면 나는 이 세상 구경을 못해봤을 운명이었는데, 하나님이 보우하사 이렇게 태어나 살아가고 있다.

형제가 많았던 우리 가족을 많이 보살펴 주신 분은 외할머니시다. 90세가 되셨을 때도 나보다 더 빠르게 걸어다니시던, 성질 급하고 부지런하고 따뜻했던 내 할머니는 내가 '실상사 작은학교'에 오던 2006년, 104세의 나이로 소천하셨다. 봄이 되면 양동이 채로 가져다 주시던 딸기, 어릴 적 할머니 집에 놀러가서 이불 속에서 장난치던 일, 그리고 점점 커가면서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간을 거의 내지 않았던 것에 대한 후회와 죄송스러움 등이 기억 한편에 남아있다. 이제 하늘나라에 가신 지 10년, 이제 막 말괄량이 10세 소녀로 하늘에서 즐겁게 지내고 계실까?

그렇게 제주도 토박이인 어머니와 북한 실향민 아버지는 결혼 이후 거의 50년을 제주도에서 전도사로서 목회 생활을 하셨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열심이고 꾸준하고 일편단심인 신앙인, 자신의 불같은 성격을 견디고 함께 해준 '호인'이라고 '애정 표현'을 하신다. 자신은 어릴 적부터 새어머니 밑에서 살다보니 차별받는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고, 이것이 알게 모르게 자신의 성격과 생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신다. 아버지의 극복하기 힘든 그 어떤 박탈감과 결핍을 어머니는 조용한 기도로 옆에서 함께 견뎌내 주셨다.

아버지는 자신의 성격에 돈 욕심이 있었다면 대단했을텐데, 그것이 없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말씀하신다. 돈 없음에 대한 한탄과 분노가 아니라, 돈 욕심이 없음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신앙'의 힘에 대해 존경의 마음을 품을 수 있어 나 또한 감사드린다. 또한 정원과 관리인 딸린, 별장처럼 사용하고 있는 옆집을 부러워하기보다는, 잘 가꾸어진 정원을 자신들이 더 잘 누리고 있다며 만족해하시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감사의 마음이 든다.

내가 이 땅의 평화를 기원하는 이유

옆집은 주인이 종종 와서 쉬었다 가는 2층 별장이고, 관리인이 정원과 집을 관리한다. 덕분에 수목원같은 환경에서 살아간다고 부모님은 행복해하신다.
▲ 제주도 부모님 집 옆집은 주인이 종종 와서 쉬었다 가는 2층 별장이고, 관리인이 정원과 집을 관리한다. 덕분에 수목원같은 환경에서 살아간다고 부모님은 행복해하신다.
ⓒ 이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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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집으로부터의 독립, 그래서 결국은 '내 맘대로 살아가기' 위한 나의 인생 프로젝트였던 대학 입학을 통해 나는 제주도에서 서울로 입성했다. 지금으로부터 28년 전인 1988년에. 이제 부모님과 함께 지냈던 시간보다 2배 이상의 시간을 '독립'하여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니 부모님은 어느덧 아흔을 앞두고 계시고, 나 역시 어머니가 큰 손자를 두게 됐던 때만큼 나이가 들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의 존재를 있게 한 내 부모의 삶에 대해 조금씩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인 걸까? 무척이나 가까운 존재이면서도 어쩌면 모르는 것 투성이인 분들, 내 그리움과 가슴 아림의 주인공들. 막상 만나면 바로 또 무덤덤해지는 신기한 존재들….

'생명을 주관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시고, 때가 되면 천국문을 열고 하나님이 불러가실 거라 믿기에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하시는 부모님. 그러나, 난 올해도 당신들의 건강과 장수를 기도드린다. 가끔씩이라도 내가 더 당신들을 보고 싶기에.

그리고 그리워도 고향을 향해 길 떠날 수 없는 내 아버지를 생각하며 이 땅의 평화를 기원한다. 통일이 되면 고향에 교회를 세우는 데 보태시겠다며 오랜 기간 돈을 모아오시던 아버지는 결국 완고한 이 분단의 현실을 인정하셔야 했고, 이곳 교회에 헌금하셨다. 그리움과 기대와 포기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멀지 않은 고향땅.

연초부터 서로를 '용서할 수 없는 적'이라 외쳐대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어 마음이 불편하다. 평화를 위한 지혜와 경험을 쌓아가는 올 한해가 되기를, 그래서 수많은 이들의 작은 소망들이 짓밟히지 않기를 또한 기원한다.

덧붙이는 글 | <한겨레>에도 송고할 예정입니다.



태그:#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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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겨울밭, 붉은 동백의 아우성, 눈쌓인 백록담,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소리와 포말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제주의 겨울을 살고있다. 그리고 조금씩 사랑이 깊어지고 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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