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집자말]
 영화 <자객 섭은낭> 한 장면

영화 <자객 섭은낭> 한 장면 ⓒ 영화사 진진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 <자객 섭은낭>의 섭은낭(서기 분)은 몰래 다른 사람을 찔러 죽이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자객이다. 정혼자 전계안(장첸 분)에게 파혼당한 이후 그의 고모 여도사(가신공주)에 의해 자객으로 훈련받아온 섭은낭은 여도사의 명령에 따라 부패한 관리를 살해한다.

그런데 섭은낭이 여도사가 시키는 대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오프닝에서 펼쳐진 암살 신, 딱 한 번뿐이다. 그 이후로 섭은낭은 이런저런 이유로 여도사의 명령을 거부한다. 결국 여도사는, 자신의 친조카이면서, 섭은낭의 사촌, 그리고 한때 섭은낭이 사랑했던 사람 전계안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너는 검술은 완벽하나, 마음이 문제로구나"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잔잔한 무협 영화, 여러 번 보게 만드는 매력

 영화 <자객 섭은낭> 한 장면

영화 <자객 섭은낭> 한 장면 ⓒ 영화사 진진


지난 1월 28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자객 섭은낭> 시사회 이후 가진 허우 샤오시엔 감독과의 대담에서, 한 관객은 이 영화를 무려 5번이나 보았다고 했다. 아마 그 자리에는 그 관객처럼 다섯 번까지는 아니지만, 이미 그 영화를 보았던 사람들도 더러 있었을 것이다. 똑같은 영화를 계속 본다는 행위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자객 섭은낭>처럼 무협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스펙타클한 장면들 대신 고요하고도 잔잔한 이미지들로 채워지는 영화는 한 번 보는 것도 힘들다. 그런데도 특정 관객들에게 있어서 한 번 관람으로는 도무지 성이 차지 않아,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여러 번 극장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하는 이 영화의 정체는 무엇일까.

명색이 자객인데, 사람은 죽이지 않고 오히려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섭은낭은 참으로 이상한 자객이다. 그런데 <자객 섭은낭>이 그렇다. 무협영화라고 하는데, 전혀 무협영화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도 무협 영화로 내세운 만큼 섭은낭이 누군가와 검을 다투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그녀가 칼을 휘두르는 모습은 '황홀하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매혹적이지만 <자객 섭은낭>은 무협 영화로 다가오지 않는 이상한 무협 영화다.

칼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한 폭의 수묵화를 펼쳐 보인 것 같은 절제된 풍광과 공허함에 압도당한 나머지, 정작 칼이 가진 비정함마저 무색하게 만드는 이 영화. 영화가 진짜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는 섭은낭의 마음이다. 영화 초반부, 섭은낭의 사부인 여도사는 검술은 완벽하지만, 정에 약한 섭은낭의 마음을 질책한다. 그래서 여도사는 섭은낭을 지금보다 더 완벽한 자객으로 만들기 위해, 한 때 섭은낭이 사랑했던 전계안을 죽이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역시나 섭은낭은 전계안을 죽이는 일을 망설인다. 죽이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 섭은낭은 전계안을 죽이지 않는다. 아니, 애당초 전계안을 죽일 마음이 없어 보인다.

도대체 무엇이 섭은낭이 자객으로서 따라야 하는 숙명을 거부하게 하는 것일까. 옛 애인 전계안에게 남아있는 미련? 섭은낭이 마지막에 남긴 변처럼 그녀의 고향 위박의 미래가 걱정되어서? 아니면 같은 인간으로서 전계안, 그리고 그의 가족들이 안타까워서? 왜 섭은낭이 전계안을 죽이는 행위를 망설이는가에 관한 명쾌한 답은 끝까지 알려주지 않는다. 위박의 미래가 걱정되어 전계안을 죽일 수 없다는 섭은낭의 말도 그녀의 진짜 속내를 감추기 위한 일종의 변명처럼 들린다.

섭은낭이 새로이 떠나는 길, 부디 행복하기를...

 영화 <자객 섭은낭> 포스터

영화 <자객 섭은낭> 포스터 ⓒ 영화사 진진


여도사의 우려대로, 섭은낭은 인륜의 정을 끊지 못하고 자기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평범한 인간으로 남게 되었다. 세상의 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대의를 펼치기 위해, 자신과 얽혀있는 모든 인연을 단칼에 잘라 버린듯한 여도사와 다르다. 섭은낭은 위박에 남은 부모님의 안위가 걱정스럽고, 전계안의 본처에 의해 죽을 위기에 처한 전계안의 첩 호희의 불안한 운명도 눈에 밟힌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자객 섭은낭>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얽혀있는 감정에 가장 자유로워 보이는 이는 아이러니 하게도 섭은낭이라는 것이다. 질투, 증오, 복수 등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어, 사람을 죽이는 행위까지 서슴지 않고 벌이는 다른 인간들과 다르다. 섭은낭은 오직 진짜 칼이 필요한 곳에서만 칼을 꺼내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 검을 휘두른다.

섭은낭이 완벽한 자객이 되길 바랐던 사부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끝내 자객이 되지 못한다. 그녀가 완벽한 검술을 하고 있음에도, 자객이 되지 못한 건, 칼처럼 단단하지도, 비정하지 못한 마음에 있었다.

그러나 섭은낭은 자객으로서는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약하고 여린 마음을 애써 부정하는 대신, 자신이 현재 가지고 있는 마음 그대로를 인정하고자 한다. 그래서 섭은낭은 번뇌와 굴레를 초월한 자객은 되지 못했지만, 인륜을 어기지 않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그녀를 괴롭히던 과거의 기억에서 한 발자국씩 물러나니, 오히려 한결 자유로워짐을 느낀다.

그녀의 어깨를 짊어지고 있던 많은 것들을 내려놓으면서, 한때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살리고, 그들의 행복을 지켜주기 위해, 기약 없는 먼길을 떠나는 섭은낭. 그녀에게 나루세 미키오의 <흐트러진 구름>의 유명한 대사를 빌러, 이 말을 해주고 싶다. 섭은낭, 당신도 행복하세요.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진경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neodol.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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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금 여기에서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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