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마트 비정규직 소재 영화 <카트> 세트장 입구

대형마트 비정규직 소재 영화 <카트> 세트장 입구 ⓒ 성하훈


노조위원장 소개가 끝나자 "와"하는 환영의 함성이 일었다. 상기된 표정으로 연단에 오른 노조위원장은 그간 경과를 보고했고, 중간중간 환호와 격려의 박수가 터졌다. 이어지는 구호 선창과 집회 참가자들의 제창이 진행되는 순간 들리는 소리는, "컷!"

2월 26일 새벽, 수도권 인근의 한 세트장에서 진행된 영화 촬영장은 실제 집회를 방불케 했다. 현장의 뜨거운 열기는, 카메라만 없다면 촛불집회 현장 딱 그 모습 그대로였다. 마트 입구의 차벽 앞에서 경계를 선 경찰의 모습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극적 사실감을 높이기 위한 제작진의 노력은 여기저기 배어 있었다. 영화 속 집회 참가자들은 그 상징과도 같았다.

세트장에서 펼쳐진 비정규직 지지 촛불집회

민주노총 국민총파업이 있었던 지난 2월 25일 저녁. 서울역 건너편으로 이날 촬영에 참가하기 위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평소 대한문이나 청계광장 등의 촛불집회에 자주 보던 익숙한 얼굴들도 포함돼 있었다. 영화 보조출연을 위해서지만 이들 역시 집회 참가가 목적이었다.

보조출연자 모집 소식을 접한 것은 1주일 전쯤이었다. SNS 등을 통해 대형마트 노동자들의 투쟁을 그린 영화가 제작되는데 집회 장면에 참가할 엑스트라를 모집한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이왕이면 영화 촬영에 도움 될 수 있도록 시위 경험이 많은 분들이 참여해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대번 어떤 영화인지 알 수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간 영화 촬영 현장을 찾은 적은 많았지만 직접 보조 출연자로 나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영화 촬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촬영 현장의 보조출연자 실태는 어떤지도 살짝 궁금했다. 조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일당 5만 원에 엔딩크레딧에 이름 기재.

출연자 대부분이 정해진 시간에 출발 장소에 모였고, 이내 버스는 목적지로 출발했다. 출발과 함께 저녁 도시락을 나눠준다. 뒤이어 간식으로 먹을 초코파이와 초코바, 사탕, 핫팩 2개씩이 지급됐다.

오후 7시가 넘어 도착한 곳은 용인에 마련된 세트장. 촬영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는 듯 차에서 대기하고 있으란다. 주변을 둘러 봐도 된다고 해서 내렸더니 공터에 촛불집회 무대가 완벽하게 준비돼 있었다.

2시간 정도 대기하다가 오후 10시 될 즈음 촬영이 시작되려는지 제작팀이 버스에서 하나하나 복장을 점검한다. 목도리나 스카프를 한 사람들에게는 풀어 달라고 하는 게 전부다. 하차 지시에 따라 모두 차에 내려 촬영장으로 이동했다. 아스팔트 바닥에는 두꺼운 박스 종이가 깔려 있었고, 각종 구호를 적은 펼침막도 여기 저기 놓여 있었다.

송경동 시인, 쌍용차 해고자, 촛불 시민들 보조출연자로 참여

 보조 출연진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있는 명필름 이은 대표

보조 출연진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있는 명필름 이은 대표 ⓒ 성하훈


이날 촬영한 영화는 <카트>. 대형마트 비정규직을 소재로 한 영화로 명필름이 제작중인 작품이다. 비정규직 문제를 다루다 보니 집회 장면은 필수적인 부분. 많은 수의 보조출연자가 필요한 상황에서 전문적인 사람들을 섭외하는 대신 실제 집회 현장에서 부딪치는 사람들을 생각한 듯했다. 영화의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더 없이 좋은 선택이기도 했다.

참여한 단체나 개인들을 소개하는 데 상당히 화려했다. '거리의 시인'으로 사회적 약자가 있는 현장을 마다하지 않는 송경동 시인, 이창근 쌍용차 노조 기획실장과 해고 노동자들. 장기간 농성이 진행되고 있는 유성기업과 대형마트 노동자들, 촛불시민 등 200여 명이 어우러져 있었다.

영화 전체로 보면 짧은 장면에 불과해 보였으나 특별한 보조출연자들이 참여하기 때문인 듯 현장에는 제작사 대표 두 사람이 모두 나와 있었다. 촬영현장은 자연스러우면서 익숙한 모습으로 구성돼 있었다. 여기저기 붙어 있는 구호와 소품으로 만들어진 소식지까지 꼼꼼하게 준비됐다. 촬영 대신 모인 사람들이 따로 집회를 열어도 될 정도였다.

촬영 시작 전 이은 대표가 연단에 올라 참석한 보조출연자들에게 직접 감사 인사를 전했다. 보조출연자들에 대한 처우가 안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적어도 <카트> 촬영 현장은 다르게 보였다. 이 대표는 마치 촬영현장 견학 온 사람들에게 설명하듯 촬영장비에 대해 하나하나 이야기했다. 그는 영화 제작 취지에 대해 "2009년 이랜드 투쟁을 보면서 영화를 생각했고, 5년 만에 실행에 옮겼다"고 말했다.

본격적인 촬영에 앞서 주의 사항이 전달됐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우선 일단 평소 하던 대로 하면 된다는 것. 그리고 카메라를 쳐다보지 말라는 것. 엄격히 따지면 연기를 해야 하는 거지만 평소 촛불집회의 모습을 보이면 되니 다들 어려울 게 없다는 표정들이다.

촛불이 나눠졌고 리허설이 먼저 이뤄졌다. 이어지는 촬영. 쌀쌀한 밤 날씨지만 출연 배우들은 두툼한 옷들을 모두 벗고 가벼운 차림으로 대형마트 노동자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레디" 소리와 함께 영화 스태프가 슬레이트를 치고 빠지면 "액션" 소리와 함께 실제와 다름없는 연기가 시작됐다.

열기가 오르던 집회 분위기는 "컷" 소리와 함께 이내 가라앉고 만다. 이날 촬영장에서 가장 반가웠던 말은 "OK(오케이)!". 이 말이 나오지 않으면 반복해서 촬영해야 했으니 감독의 "오케이!" 사인은 당연히 반가울 수밖에. 

첫 장면 촬영이 끝난 후 실제 집회도 잠시 진행됐다. 굴다리 농성을 하던 홍종인 유성기업 노조 지회장이 앞에 나와 인사를 하며 유성기업에사정을 이야기 했고, 송경동 시인은 유성기업 희망버스 계획을 설명하며 관심을 요청했다.

밤 12시부터 1시는 야식시간. 푸짐한 닭죽이 준비됐다. 추위 속 움추렸던 몸을 난로 옆에서 녹이고 있으니 바로 다음 촬영이 시작된다며 각자 자리로 복귀하라는 지시가 내려온다.

 촛불집회 장면 보조출연을 위해 모인 해고 노동자들과 촛불 시민들

촛불집회 장면 보조출연을 위해 모인 해고 노동자들과 촛불 시민들 ⓒ 성하훈


혹한기가 지났다고 해도 새벽 날씨는 쌀쌀했다. 거의 같은 장면이었지만 카메라의 각도가 바뀌고 배우들의 위치와 대사도 들어가는 장면이어서 동일한 연기를 계속 반복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촬영시간보다는 대기 기간이 더 길었다. 잠시라도 틈이 생기면 조금이라도 몸을 녹이기 위해 실내 휴식공간을 찾아 들었고, 그때마다 빨리 촬영 장소로 복귀하라는 스태프들의 다그침이 이어진다.

오전 3시가 넘으면서 발이 심하게 시려왔다. 어떤 사람은 발을 잘라내고 싶을 정도라고 했다. 쏟아지는 졸음도 힘겨운 장애물이었으나 다들 지급된 핫팩과 커피 등에 의지하며 버텼다. 겨울철 밤샘 촬영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장시간 야외 촬영은 역시나 만만치 않았다. 배우들은 촬영 순간에는 옷을 가볍게 입어야 하는지라 더 추울 것 같은데 별다른 내색을 안 한 채 연기에 임했다. 

오전 4시쯤 마지막 장면 촬영이 시작됐다. 이제 한 장면 남았다는 말에 다들 기운을 내며 열심히 임한다. 신나는 장면이라 다들 박수치며 마지막 촬영을 즐기는 분위기였다. 한 번에 끝날 줄 알았는데 아쉽게도 '오케이' 사인이 나오지 않는다. 3번의 촬영이 더 되풀이된 끝에 '오케이' 신호가 나자 다들 환호성이 나온다.

오전 5시. 이날 모든 촬영이 마무리 됐다. 연출자인 부지영 감독이 바로 연단에 올라 "추운 날씨에도 촬영하느라 고생하셨다"며 영화 속 집회 참석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보조출연자의 대표 격인 송경동 시인은 출연자들의 편안한 귀가를 위해 일일이 버스 노선과 하차 지점을 조정하며 분주한 모습이었다.

촬영 끝나자 감사 인사와 함께 일당 바로 지급

 영화 촬영을 끝내고 부지영 감독이 보조출연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있다.

영화 촬영을 끝내고 부지영 감독이 보조출연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있다. ⓒ 성하훈


귀가를 위해 버스에 오르자 바로 일당이 지급됐다. 하얀 봉투에 5만 원이 들어 있었다. 통장으로 입금될 줄 알았는데 현장에서 바로 지급해 준 것이다. 전문 보조출연자들을 불러도 됐을 텐데, 일부러 거리의 노동자들과 시민들을 불러준 제작사의 마음 같기도 했다. 일부 촬영현장에서는 보조출연자들이 소품처럼 취급되기도 한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비정규직을 소재로 한 영화여서인지 영화사의 마음가짐이 다르게 보였다.

명필름은 최근 개봉한 영화 제작과정에서 국내 처음으로 표준계약서를 적용해 주목을 받았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촬영현장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감독과 배우 스태프들을 위해 표준계약서를 만들었지만, 현장에서는 여건에 안 맞는다는 이유로 배척돼 왔다. 

<카트>는 지난 1월 12일 첫 촬영을 시작했고, 3월 말까지 촬영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이 영화는 <변호인><또 하나의 약속> 등 사회성 있는 소재의 영화들이 주목을 받는 가운데, 비정규직 마트 노동자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제작 전부터 관심을 받았다.

제작에 들어가며 제작비 일부를 온라인 펀딩을 통해 모금했는데, 목표했던 5000만 원을 훨씬 초과한 8700만 원이 모일 만큼 영화에 대한 외부의 관심도 높다. 배우 염정아, 문정희, 김강우, 김영애 등이 참여하며 하반기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다.

카트 명필름 비정규직 대형마트
댓글8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