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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아래밭에서 농사짓는 아이들
▲ 농사풍경 학교 아래밭에서 농사짓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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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앞에 있는 논에 모내기하는 모습
▲ 모내기 풍경 실상사 앞에 있는 논에 모내기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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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이었다. 내가 <한겨레> 신문에 실린 '실상사작은학교' 교사모집 광고를 보았던 것이. 그 때 나는 한 3년 정도 '탈서울'을 위한 이런 저런 준비를 한 후 서울을 떠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나를 오라는 곳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농사로 내가 먹고 살 재주는 없는 것 같은데,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도 분명치 않은 채 '탈서울'이라는 결론을 나는 내리고 있었다.

나의 '탈서울 프로젝트'

그 와중에 막연하게나마 꿈꾸고 상상한 것이 시골 어딘가의 대안학교 교사로서 살아가는 삶이었다. 그러던 차에 '실상사작은학교 교사모집'이라는 활자는 강력하게 나를 끌어들였다. 며칠 남지 않은 서류 제출 기한을 늦춰줄 수 있는지 묻기 위해 나는 처음으로 실상사작은학교(아래 작은학교)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그렇게 나의 '탈서울 프로젝트'는 엉겹결에(?) 원래 계획보다 훨씬 앞당겨서 진행되기 시작했다. 

지금 와 돌아보면, 아마도 서울 생활 15년 정도를 넘어서면서 나는, 아스팔트 틈바구니의 풀처럼 문득문득 힘들어했고, 생존 본능에 가까운 마음으로 탈서울을 꿈꿨던 것 같다. 만원 전철 안 짓눌리는 출근길에서 자전거로 15분이면 되는 출근길을 꿈꾸었고, 결재 라인을 통해 하달되는 지시를 받으며 구성원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어떤 공감과 일치의 기쁨을 꿈꾸었고, 높은 빌딩들 사이로 보이는 좁고 뿌연 하늘을 보며 자연의 선과 색을 꿈꾸었다. 그런 꿈 같은 곳이라면, 내가 좀 더 살아있다고 느끼면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그런 꿈결같은 세상을 그리워했다.

작년 5월 지리산 둘레길 개통 즈음 아이들과 조를 나눠 2주간에 걸쳐 둘레길을 완주했다.
▲ 지리산 둘레길 작년 5월 지리산 둘레길 개통 즈음 아이들과 조를 나눠 2주간에 걸쳐 둘레길을 완주했다.
ⓒ 이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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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의 나의 소비 수준이 그다지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계속 돈을 써야만 살아갈 수 있는 도시생활 자체가 나를 지치게 했다. 나의 소비생활이 자연과 타인들에 대한 무수한 '폐끼침'의 결과로 가능해진 것이라는 사실이 항상 가슴 속 체기로 남아있었다. 소비의 유혹이 처음에는 신기한 매력이었다면, 점점 피로와 권태의 대상이 되는 느낌이었달까?

그래서, 당시 나를 면접했던 학교대표 샘(선생님)이 첫 6개월간 월급이 50만 원, 그 이후엔 70만 원인데, 받아들일 수 있겠냐고 물었을 때 주저없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안 쓰고 살면 되지 뭐~ 이런 자신감과 도전정신으로. 이런 나의 용기가 실현될 수 있을지 궁금한 마음에 처음 한 달은 가계부를 써봤다. 집값이 들지 않는 상황이기도 했고, 학교와 집을 오가며 살았더니 한 달 생활비가 10만 원 조금 더 들었다.

그렇다고 인간 이하의 삶(?)은 절대 아니었다. 소비 수준이 극단적으로 낮은데, 결핍감이 느껴지지 않았달까? 물론 지금은 여기저기 사회생활(?)도 하는 등등의 이유로 소비 수준이 많이 올라가긴 했지만, 여전히 소비가 내 삶의 기반이란 느낌으로 살아가진 않는다. 그리고, 소비의 많은 부분이 이 지역에서 만들어진 것들이기도 하고, 생산자의 정성과 제품의 질에 대한 믿음으로 소비를 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물론 아직까지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하는 나는 꽤 많은 농산물들을 그저 고맙게 얻어먹는 경우도 많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소비량은 낮아졌지만, 소비의 질은 월등히 높아졌다고 자부한다.

내가 꿈꾸는 건강한 연령분포도   

언제부턴가 내 삶의 키워드라 할 만한 것 중 하나가 '자연스러움'이 되었다. 인위적, 인공적인 것들의 오만함에 대한 반발감이 그 시작이었으리라. 내가 회복하고 싶어하는 자연스러움의 구체적인 내용은 뭘까에 대해 아직까지 깊이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떠오르는 것은 3~4세대가 함께 살아가던 옛 가족들의 삶의 모습이다.

작은학교의 역사가 10년이 되어가던 2010년 즈음부터 작은학교의 존재 이유에 대한 물음이 다양한 이유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또 지난해부터 학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우리를 돌아보아야 하는 상황을 맞고 있다. 이 와중에 교사들 중 누군가가 "나이 많고 오래된 교사들이 이젠 물러나야 되나봐"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알바니 프리스쿨의 창립자이자 30여 년 이상 그 학교에 몸담고 있는 <프리스쿨>의 저자 크리스를 떠올렸다. 그의 책을 읽는 동안 저자의 깊은 성찰과 따스함을 한껏 느끼며 행복했고, 나이가 든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새로운 느낌을 갖게 되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늙음이라는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 젊음의 긍정적 이미지에 밀려 부정적인 것이 되어 버렸고, 그래서 서둘러 폐기되는 것이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작은학교 교사회는 현재 13명의 30~40대 상근교사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나이든 70대의 교사부터 20~30대의 젊은 교사가 함께 하는 미래의 작은학교를 꿈꾼다.

그럴 수 있으려면, 아이들과 함께 하는 삶에 진정으로 감사하고 이곳에서의 삶 속에서 하루하루 깊은 성찰을 하면서 살아가는 교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또, 작은학교라는 공간이 당장의 효율에 갇히지 않고 세월 속에 녹아난 깊은 지혜와 넉넉함에 대해 진실된 존경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곳이어야 할 것이다.

아이들의 명대사

마늘까기 일을 하다가 마늘을 머리에 꽂은 1학년 친구
▲ 마늘여인 마늘까기 일을 하다가 마늘을 머리에 꽂은 1학년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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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그것을 눈치채진 못하겠지만, 이곳에서 살아가는 순간순간 아이들의 행동과 말이 내 가슴에 와닿아 새겨질 때가 있다. 작년이던가 아이들 몇 명이 술을 마셨고, 그 책임방안으로 실상사 농장에 가서 며칠간 일을 했었다. 일을 한 아이들의 얼굴이 꽤 밝았다. 한 친구에게 어땠냐고 물었더니 좋았다고 한다. 뭐가 좋았냐고 했더니 그 친구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땅이 좋았어요"라고 대답했다. 이 짧은 대화가 나에게는 아직까지 깊이 남아 있다. 나의 10대 시절도 그랬고, 요즘의 10대 아이들 중에 누가 흙을 느끼면서 그 속에서의 노동에 흡족해할 수 있을까 싶다.

또 하루는 내가 기숙사 당번으로 학교에서 생활하던 때였다. 잠자기 조금 전 한 친구랑 수다를 떨다가 그 친구가 "저에게 잊혀지지 않는 한 순간이 있는데요. 제가 작은가정(아이들 약 5~6명과 교사가 함께 생활하는 마을의 집)에서 절에 가는데, 저쪽 편에 아이들 한 무리가 절에 가고 있더라고요. 나도 모르게 걔들보다 빨리 가보려고 막 걸음을 재촉하면서 걸었어요. 그러다가 문득 "내가 왜 쟤들을 이겨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까 편안한 마음으로 그냥 걷는 것을 즐기면서 걸을 수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아, 우리가 이것저것에 끄달리며 살아가면서도 자신을 바라보고 멈춰설 수 있는 힘들을 키워가고 있구나란 생각을 하면서 그날 밤 행복했다.

물론 아이들과 거의 매일을 부대끼며 살아가다보면, '어휴 이 밉상~!' 그런 맘이 들 때도 꽤 있다. 하지만, 이런 마음 역시 어느 정도는 자연스런 현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미워하지 않으려고 서둘러 반성하기보다는 그 미움의 마음을 인정하고 잘 살펴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것이 나의 잠정 결론이다.

불안을 함께 끌어안고 걸어가는 도반이기를 기도하며

실상사 절에서 2학기 시작하는 모임을 가지면서 서로 안마해주던 모습
▲ 안마해주기 실상사 절에서 2학기 시작하는 모임을 가지면서 서로 안마해주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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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지구적으로, 국가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본질은 어느 정도 불안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혈기왕성했던 20대 때는 미래가 나름 명확했고 나의 앞으로의 삶의 방향 역시도 명확했다. 물론 그것은 직업의 명확함이 아니라 옳고 그름, 옳은 집단과 그른 집단, 그리고 그 중 내가 선택할 진영(?)의 명확함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꼭 그렇지는 않다. 내 개인적으로도 나의 미래는 불투명하고, 전 지구적인 운명도 몹시 불안하고 불투명하다.

미래를 계획해보고 그려보고 그 어떤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우리의 현재를 구성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풍요로울 수 있는 현재가 오지 않은 미래의 힘에 밀려 왜소해져 버리는 것을 나는 많이 보아온 듯하다. 대안학교의 경우 앞으로의 삶에 정해진 코스가 없기에 그 불안은 더 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대안교육의 주요 임무가 사회 주류의 코스를 대체하는 대안적인(?) 코스를 제시해 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회의 변화에 무감각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는 내면의 힘을 키우는 것, 멈춰 서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을 갖는 것, 그리고 불안을 함께 견딜 도반들을 만나는 것이 대안교육의 존재 이유가 아닐까 한다.

지리산에 안겨 살아온 지 7년을 넘어선 지금, 나는 서서히 이 곳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마당에 내리는 따스한 햇살, 언제나 그곳에서 나의 하루를 축복해주는 듯한 웅장하지만 부드러운 지리산의 풍경, 에너지 넘치는 아이들과의 수다와 기싸움, 마을 저자거리에서의 사람들과의 만남.... 이런 자연에 둘러싸여 나는 조금씩 행복해지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이 행복은 무언가 정답을 향해가고 있다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조금씩 풍요로워지고 있다는 느낌에서 오는 것이리라. 


태그:#지리산, #대안교육, #실상사작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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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겨울밭, 붉은 동백의 아우성, 눈쌓인 백록담,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소리와 포말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제주의 겨울을 살고있다. 그리고 조금씩 사랑이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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