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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7일 오전 서울 송파구 배명중학교에서 열린 '학교폭력 자정 결의대회'에서 학생들이 학교폭력 추방을 다짐하며 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다.
 지난 2월 7일 오전 서울 송파구 배명중학교에서 열린 '학교폭력 자정 결의대회'에서 학생들이 학교폭력 추방을 다짐하며 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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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공문이 내려왔다. 감사원이 요청한 것으로, 지난해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이하 자치위)에서 심의한 사안들을 보고하라는 것이다. 자치위의 결정에 따라 징계를 받은 학생들이 몇 명이며, 징계 사유와 처분의 내용까지 보고하도록 돼 있었다.

참고로 자치위는 피해 학생의 보호, 가해 학생에 대한 선도 및 징계뿐만 아니라 양측의 분쟁 조정 등 학교폭력 문제 전반에 걸쳐 의사결정을 하는 법적 기구다. 최근 학교폭력 문제가 사회적으로 크게 부각되면서 학교 내에서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

지난해, 우리 학교는 단 한 번도 자치위가 열린 적이 없다. 아이들 간의 주먹다짐이야 왜 없었겠느냐마는 해당 학생들끼리 화해하고, 또 그들의 보호자들끼리 원만하게 합의한 까닭에 굳이 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가해 학생에 대한 처벌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선도위원회를 열어 교내 봉사를 시키기도 하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상처가 큰 경우에는 며칠 동안 보호자와 함께 사회봉사를 보내는 등 엄하게 다스린 경우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아침마다 교문에서 등교하는 친구들을 대상으로 학교폭력 근절 피켓을 들고 캠페인 활동을 벌이도록 한 적도 있었다.

원칙만 운운하는 교육청... 답답하다

나는 학교폭력을 이유로 공문에 예시하고 있는 종류의 징계 처분을 한 적은 있지만, 자치위를 연 적은 없으니 보고하기가 애매하다고 교육청에 문의했다. 그랬더니 교육청은 조언을 해주기는커녕 폭행이 있었는데 학교가 사회봉사 같은 징계 처분을 내렸다면서 왜 자치위를 열지 않았냐고 되레 면박을 줬다.

또, "규정 상 경미한 사안은 교내 선도위원회나 학교폭력전담기구에서 담당하게 돼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랬더니 교육청은 "일단 학교폭력이 발생하면 자치위를 여는 게 원칙"이라고 잘라 말했다. 자칫 학교가 폭력 사건을 은폐하려 한다며 오해할 수도 있으니,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자치위에 맡기는 게 '안전'하다는 말맛이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학교마다 하루에 몇 차례씩 자치위를 열어야 한다. 아니면 학교에서 교직원회의 하듯 1주일에 하루는 자치위 정기 회의일로 정해 그동안 누적된 사안을 일괄 처리해야 할지도 모른다. 학교마다 크고 작은 학교폭력 사건, 곧 아이들끼리의 싸움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원들이 모이란다고 다 모일까. 자치위를 자주 연다는 주변 학교들의 사례를 들어보면, 개회를 위한 정족수 조차 채우기 빠듯하다고 한다. 자치위는 학교폭력과 관련해 전문성을 확보한다는 이유로 해당 학교 교사와 경찰, 변호사, 의사 등 지역의 전문가 집단 위주로 꾸려졌기 때문이다.

특별한 소명 의식을 지닌 게 아니라면 변론문 쓰다 말고, 환자를 보다 말고 달려올 변호사와 의사가 누가 있을까. 결국 지난해 말 학교폭력이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정부는 소집 요건을 완화해 학교폭력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로 학부모들이 자치위의 과반수가 되도록 시행령을 개정했다. 결국 '시간 많은' 학부모들에게 손을 벌린 것이다.

아무리 학부모들이라 해도 학교로부터 급여를 받는 것도 아닌데 매번 회의에 출석해 안건 검토하고 논의한 후 징계 수위를 결정하고 분쟁 조정해달라고 요청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정부와 교육청이 사안마다 다짜고짜 자치위를 열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영혼 없는' 규정 타령이거나 면피용 발언일 수밖에 없다.

자치위 앞에서 학생부장은 더 이상 교사 아니다

대개 학생부장이 겸하게 되는 학교폭력 담당교사의 경우는 실무자로서 자치위가 열릴 때마다 수업하는 게 사치일 만큼 해야 할 일이 많다. 우선 소집통지서를 발송하고, 위원들에게 제출할 사안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며, 회의가 시작되면 회의록을 작성해야 하고 심의·의결된 사항은 처분결과를 정리해 즉시 학교장에게 보고해야 한다.

그 전에 해당 학생들로부터 자술서를 받고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그들 주변 친구들을 만나는 일, 해당 학생들과 그들의 보호자에게 출석을 통지하는 것, 처분장을 제작해 그들에게 등기우편으로 발송하는 것, 심지어 자치위가 열릴 회의실에 의사봉과 명패 등을 비치하는 것조차 모두 학교폭력 담당교사, 곧 학생부장의 몫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자치위가 열리기 전에 육하원칙에 따라 개요를 적은 보고서를 교육청에 제출해야 하며, 처분 결과를 적은 보고서 또한 자치위가 끝나자마자 보내야만 한다. 이것들은 정부와 교육청이 그토록 강조하는 자치위가 열릴 때마다 해야 할 일들이니 누구 말마따나 학교에서 학생부장은 더 이상 '교사'일 수 없다.

학생부장은 다른 업무에 비해 출장과 연수가 많아 그렇지 않아도 수업 결손이 많다. 상황이 이런데 자취위에 집중하라고 하면, 아예 수업을 포기하라며 다그치는 격과 같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수업 결손이야 나중에 보충한다 치고, 늘어난 업무야 퇴근해 밤을 새워서라도 해낸다고 치자. 과연 자치위가 피해 학생 보호와 가해 학생 선도라는 운영 취지를 제대로 구현하고 있을까.

결국 선도와 교육은 오롯이 학교 몫인데도...

영화 <돼지의 왕>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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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자치위는 학교폭력의 죄를 물어 징계를 정하는 기구일 뿐 선도하고 교육하는 기능은 사실상 없다. 출석 정지나 전학은 말할 것도 없고, 징계로서 사회봉사를, 특별교육 이수를 명한다고 해도 위원들이 사회봉사시설과 특별교육기관마다의 특성은 고사하고 무엇이 있는지조차 잘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선도와 교육은 오롯이 학교의 몫으로 돌아오게 된다.

주위 학교 교사들의 말에 따르면, 자치위의 결정에 따라 출석 정지 처분을 받거나, 특별교육 이수를 받은 가해 학생들 중 '새 사람'이 돼 학교로 돌아온 경우는 거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자치위가 아니라, 징계 받은 학생을 맡아 교육하게 되는 기관의 역량이 문제라는 지적이다.

거칠게 말해서, 전문 기관에 맡겨봐야 갱생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일시적인 격리 조치의 의미라면 모를까, 불과 며칠 동안 낯선 아이들을 교화시키기란 사실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처벌하는 목적이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에만 있다면, 그건 교육 행위라 할 수 없다. 자치위의 부인할 수 없는 현실적인 한계다.

전문가 집단 위주든 학부모 위주든 외부인들로 꾸려진 자치위가 아이들에게 '겁박'의 효과가 있을지는 몰라도, 결과만 놓고 보면 학교 내 선도위원회나 학교폭력전담기구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교내 기구에 맡기면 학교의 명예 운운하며 은폐할 우려가 있어 만든 기구라는 것인데, 한 마디로 학교폭력에 관한 한 학교를 믿지 못하겠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왔다갔다 하는 교육청의 방침, 혼란스럽다

그런데도 일부에서는 자치위가 유명무실하다며, 학교폭력에 속수무책인 양 왜곡하고 있다. 대놓고 더 강력한 대책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자치위에서 결정된 처분을 따라야 하는 것과는 별개로, 징계의 구체적인 내용을 생활기록부에 기록하라는 세부 규정까지 명시됐는데도 말이다.

주지하다시피 학교의 생활기록부는 향후 50년 간 보존해야 할 영구 장부다. 거기에 다른 것도 아닌 학교폭력 가담자라고 기록하라는 건, 패자부활이 애초 불가능한, 곧, 한 번 찍히면 그걸로 끝인 우리 사회에서, 아이들에겐 그야말로 평생 지울 수 없는 '주홍 글씨'다. 과연 그러한 낙인 효과로 학교폭력이 줄어들까.

'옥상옥' 자치위의 실적을 보고하라는 공문을 보노라니, 학교가 더 이상 아이들을 '교육'하는 곳이 아닌, 점점 '처벌'하는 곳이 돼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규정이 미비해서, 가해자 처벌이 미약해서 학교폭력이 늘어나거나 거칠어진 것이 아닌데, 오로지 일벌백계만을 외치는 것 같아 씁쓸하다.

한편에서는 '생활지도'라는 말조차도 비교육적이라며 '생활교육'이라는 용어로 대체하라는 지침을 내리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학교폭력 가해 학생에게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식이니 교사로서 혼란스럽다. 가해 학생을 두둔할 수는 없지만, 어찌 됐건 그도 우리가 품어 안고 이끌어야 할 아이들 아닌가.


태그:#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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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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