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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의 나이로 최근 판타지 소설 <제국의 고백>을 써낸 이지수 학생
 18세의 나이로 최근 판타지 소설 <제국의 고백>을 써낸 이지수 학생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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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래 훔쳐봤던 순정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 덕분일까. '베르사이유'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무래도 로맨스 쪽에 가깝다. 그런데 사뭇 다른 생각을 했던 '작가'가 있었던 모양이다. 베르사이유 궁전을 보면서 독재자 루이 16세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초등학생.

주인공은 최근 <경향신문사>가 출판한 판타지 소설 <제국의 고백>을 쓴 이지수 양이다. 현재 미국에서 유학 중인 그의 나이, '겨우' 열 여덟 살. '젊은이들의 뜨거운 모험과 사랑'만 제대로 그리기도 벅찰 나이, 소설을 읽기 전 로맨스 판타지를 예상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판타지 소설 <제국의 고백>, 모티브는 '제국의 차별'

<제국의 고백> 표지. 이 책에 실린 그림 역시 10대 소년화가인 곽성민 군이 그렸다
 <제국의 고백> 표지. 이 책에 실린 그림 역시 10대 소년화가인 곽성민 군이 그렸다
ⓒ 경향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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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와 같은 '뻔한' 선입견은 소설을 읽어 나가며 여지없이 깨져 나갔다. 정치와 사회 제도에 대한 만만찮은 통찰이 곳곳에서 엿보였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인상적이었던 미실과 덕만의 정치 논쟁, 이를 연상시키는 다음 대목이 특히 그러했다.


"폐하, 제일 얻기 쉬운 것도 어려운 것도 민심입니다. 군중의 심리를 아시옵니까. 폐하, 서운하게 한 채 오래도록 내버려두면 뼛속까지 증오하는 것처럼 굴다가도 조금만 달래주면 금세 든든한 아군이 되어 주는 것이 백성입니다. 수없이 많은 이가 조금의 친절로 폐하의 편에 서게 되는 것이옵니다."


소설 <제국의 고백>을 끌고 가는 힘은 '로맨스'가 아니다. 그보다는 독재정치 대 민주정치란 정치 이데올로기의 충돌이 강하다. 그렇다고 선악의 이분법적 논리를 독자에게 강요하는 식도 아니다. 그보다는 주인공들의 '상처'를 납득시킴으로써, 독자가 판단할 수 있는 여지를 넓히는 방법을 취한다.

특히 주인공들의 '상처'가 차별로 생긴 것이란 설정이 눈에 띈다. 소설에서 독재자 수제헌이나 그 상대편 반란군 수장의 아들인 주노, 모두 장자 왕위 계승 제도의 희생자들이다. 여주인공 차아나는,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자신이 아닌 또 다른 누군가가 되어야만" 뭔가 할 수 있는 남녀 차별의 문제점을 대변한다.

"나쁜 사람에게도 그 나름의 사연이... 소설 주인공 모델은 연산군"

<제국의 고백>을 읽으면서 궁금증은 그래서 증폭됐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내공'은 어디에서 비롯됐으며, 또 말 그대로 꽃다운 나이의 저자가 선택한 판타지는 왜 로맨스가 아니었는지. 왜, 하필, '차별'을 주요 모티브로 삼았는지. 22일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저자 이지수 학생으로부터 직접 들어봤다.

"2005년 엄마와 유럽여행을 갔을 때였어요. 프랑스에서 베르사이유 궁전을 보면서, 루이 16세와 같은 독재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좋은 평가를 받는 왕도 많은데 왜냐고 묻자) 보통 99% 이야기는 주인공이 착한 사람이잖아요. 그런 것말고, 보통 시각으로 보면 참 나쁘다고 하는 사람한테도, 나름대로 사연과 역사가 있게 마련이잖아요. 그걸 조명하고 싶었어요."

'이야기꾼'다운 기질이 엿보였다. 독자는 '루이 16세 = 독재자'란 등식보다는, 왜 그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흥미를 느끼기 마련이니 말이다. 어려서부터 역사와 글쓰기를 좋아했고, 글감이 떠오르면 바로 기록을 하는 습관 등, '모범 답안'도 나왔다. 그리고 이야기는 연산군으로 이어졌다.

"악역을 주인공으로 삼고 싶다고 생각하고 소설 모델로 삼은 왕이 연산군이었어요. 폭군으로 가장 유명했던 왕이잖아요. (광해군과의 차이를 묻자) 광해군은 왠지 정이 가서요(웃음). 연산군보다는 나름의 정치를 했잖아요. 인목대비가 쓴 소설 때문에 광해군은 나쁜 왕이란 이미지가 박혔다고 생각도 하고요."

단지 주류와 다르다는 이유로... "가장 무서운 것은 차별"

이지수 학생
 이지수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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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세상이 나를 보는 시선은 언제나 변함 없이 뾰족하더구나. 내가 아무리 학문을 익히고 무예를 다져도 나는 호색한 아버지에다 부정한 여인의 소생으로, 내가 아무리 노력한들 주어진 태생을 바꿀 수는 없었다." (소설 본문 중 독재자 수제헌의 고백)

- 여태까지는 주로 폭군 이야기를 했지만, 소설을 읽어보니까 중요한 모티브는 '차별'인 것 같더라고요.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요?
"예, 예, 맞습니다."

- 그래서 궁금하더라고요. 여고생이잖아요. 그럼 아무래도 로맨스 쪽으로 많이 쓰고 싶어하지 않을까, 그렇게 흔히 생각하기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왜 하필 차별을 중요한 모티브로 삼았는지.
"로맨스도 나와요(웃음). 물론 처음부터 차별을 주제로 쓰자, 이렇게 한 건 아니에요. 그런데 캐릭터 설정을 하다 보니까, 이들이 걸어온 길에 대한 이유를 찾다 보니까, 모두들 상처가 있고, 그건 차별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들이 사회로부터 받은 상처를 설명하는데 가장 좋은 것이 차별이라고 봤어요."

- 그러면 차별이란 것,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네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공동체에 속하고자 하는 열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동질감이나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게 사람의 본질인데, 차별은 주류와 다르다고, 그 사람이 사회에서 설자리를 잃게 만드는 거잖아요. 사람을 굉장히 외롭게 만들고, 프랑켄슈타인이 증오를 가지게 된 이유도 바로 외로움 때문이었잖아요. 무리에 속하고픈 사람의 본질 자체를 차단시켜 버리는 것, 그래서 차별이 가장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해요."

남녀 차별 "아무리 약자 쪽에서 발버둥 쳐도 안 바뀌는 슬픈 현실"

"이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부모 밖에 모르고 살다가 나이가 차면 정해진 상대에게 시집을 가 그와 평생을 함께 하며 아이를 낳고, 아이가 장성하면 그의 혼사를 맺어 주는 것이 유일한 일거리가 되는 것이 소인에게 주어진 생입니다."

- 소설에서 차아나의 말이잖아요.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얼마나 차이가 있다고 봐요?
"아직도 꽤 많은 분들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여자는 시집만 잘 가면 된다, 이런 말 심심찮게 쓰이잖아요. 또 남녀에게 똑같은 상황이 벌어져도 사람들이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남자가 돈 많은 여자와 결혼했다고 하면 능력 좋네, 그러고, 여자가 돈 많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면, 된장녀라고 하잖아요. 이런 편협한 시선으로 보는 경우가 남자보다는 훨씬 많은 것 같아요."

- 지금 미국에서 유학 중인데, 우리나라 남녀 차별 문제를 미국과 비교한다면?
"그런데 미국도 우리나라처럼 신데렐라 스토리 류 영화, 소설, 드라마가 굉장히 많아요. 지금 제가 다니는 학교를 봐도 남자 선생님들이 여자 선생님들보다 (보수가) 더 높더라고요. 정말 놀랐어요. 그래서 남녀 차별은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 세계 어디 가든지 남자가 여자보다 좀 더 우월한 위치에 있다, 사회적으로 강자라고 생각해요."

- 남녀 차별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이유에 대한 생각은?
"아무래도 자기가 좀 더 편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그 상태를 바꾸고자 하는 인센티브가 없을 거 아니에요. 강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지금 상황을 타개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면, 아무리 약자 쪽에서 발버둥을 쳐도, 그 상황이 바뀌기는 굉장히 힘들 거라고 생각해요. 슬픈 현실이죠."

"우리 교육 현실, 영어 소설로 쓰고 싶어요"

이지수 학생
 이지수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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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머릿속에 그린 그림은 꿈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아닌 또 다른 누군가가 되어야만 하는 여자였습니다 … (중략) … 동전던지기처럼 쉽게 결정되는 성별이 차별의 근원이라면, 그 사회는 계급제임이 분명했습니다." (제국의 고백, 저자의 말 중에서)

그렇다면, 저자는, 이지수 학생은, '슬픈 현실'에서 '자신이 아닌 제국의 고백'을 통해 무슨 말을 전하고 싶을까. 그는 "소설에서 다루는 차별의 문제는 물론 옛날 이야기이긴 하지만, 지금도 우리나라나 미국에서 볼 수 있는 문제"라며 "사람들이 차별 문제를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앞으로의 포부도 이어졌다. 그는 "경제도 중요하지만, 문화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서 "우리나라를 세계에 더 알리려면 문화가 알려져야 한다고 본다. 나중에 소설을 또 쓰게 된다면, 우리나라 고유 문화유산이나 유적지 등을 소재로 글을 써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

"우리나라, 코리아 하면, 공부만 한다는 인식이 굉장히 강한 것 같아요. 학교에서도 한국 애들은 공부밖에 안 하냐는, 삶이 없다고 여기는 미국 애들이 많더라고요. 어느 정도는 사실이잖아요. 야간 자율학습 굉장히 오래 하고, 학원도 많이 다니고, 수능에 목매달고 하니까.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배경이나 사연을 소설로 쓰고 싶어요. 영어로."

루이 16세와 연산군을 주목했던 이유와 맞아떨어지는 말이었다. 나름대로 역사와 사연이 있게 마련이라는, 그런 이야기를 조명하고 싶다던 그의 말. 우리나라 교육현실을 고발하는 영어 소설, 천상 '이야기꾼'다운 그의 근사한 포부가 부러웠다.

"<제국의 고백> 원고 대부분 중학교 때 완성"
<제국의 고백> 초고 노트. 이지수 학생이 초등학생 시절에 썼다고 한다
 <제국의 고백> 초고 노트. 이지수 학생이 초등학생 시절에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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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본관이 어디냐고 물었다. 상대로서는 황당했겠지만 나름 이유는 있었다.

<제국의 고백> 등장인물들의 옛 말투가 '고딩 작가'의 그것이라고 하기에는 무척 자연스러웠던 데다가 심심찮게 등장하는 한자 또한 '난이도'가 높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까지만 한국에서 마쳤음을 감안하면,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던 대목이기도 했다. 일종의 '테스트'성 질문이었던 셈이다.

대답은 곧바로 나왔다. "전주 이씨"에 "덕천군파"란 답이 이어졌다. 다만 "한자는 아빠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옛 말투는 "스스로 창작한 것도 많지만, 어렸을 때부터 역사를 좋아해 사극을 많이 본 영향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어 "<리진>이나 <덕혜옹주>등 역사 소설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관련 지식이 자연스레 쌓인 것 같다"고도 했다. 마침 내심 기대했던 답이 나왔기에, 공격적인 질문을 던졌다. 알게 모르게 그런 책에서 영향을 받은 것 아니냐는,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일종의 표절 가능성을 제기한 셈이다.

그러자 이지수 학생은 잘라 말했다. "그 책들을 읽은 것은 소설을 거의 완성하고 나서라서 영향을 받은 건 없다"고 말이다. 이어 더욱 놀라운 말도 했다. <제국의 고백> 마지막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원고는 "이미 중학교 때 완성했다"는 것이었다. "6학년초부터 3년 동안 써놨던 원고를 올해 초 겨울방학을 이용해 다듬었다"는 설명이었다.

드라마 <선덕여왕>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민심론'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해 봤다. "고등학생 수준의 창작이라고 하기에는 잘 믿기지 않는다"고 하자, 그는 "정치 이데올로기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며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전문도 다 읽어봤다"고 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에라스무스의 정치론도 술술 나왔다. 이들의 이론을 각 등장인물에 대입시키는 설명도 빼놓지 않았다.

끝으로 글솜씨 비결을 물었다. 그는 "지금 보면 부끄럽지만, 습작 형태로 혼자 쓴 책들이 두 권 정도 있다"면서 "<제국의 고백>은 학교 다녀와서 매일 저녁 한두 시간씩 시간을 내서 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덧붙인 "그냥 내가 좋아서 한 것"이란 말이 그가 내놓은 '정답'이었다.


제국의 고백 - 아제국 이야기

이지수 지음, 곽성민 그림, 경향신문사(2011)


태그:#이지수, #판타지, #소설, #제국의 고백,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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