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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8일(목)

어제 저녁 모텔 주인과 약속한 대로, 가능하면 새벽에 죽변항 수산물 위판장에서 벌어지는 경매 장면과 항구 뒤편 언덕 바닷가에 있는 <폭풍속으로> 드라마 촬영지를 돌아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 너무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위판장에서의 새벽 경매 장면은 볼 수 없었다. 내가 위판장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경매가 끝나고, 차가운 바닷바람만 휑하니 지나갈 뿐이다.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다음에 바로 <폭풍속으로> 촬영지가 있는 바닷가 언덕을 찾아간다. 항구 뒤쪽 마을 안길로 언덕을 올라가면, 왼쪽으로 바닷가 절벽 위에 교회와 일본식 가옥이 올라서 있고 오른쪽으로는 대나무 숲이 등대 아래 절벽 위를 뒤덮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아름답지만, 어딘가 모르게 위태로워 보이는 풍경이다. 드라마를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곳에서 폭풍이 몰아치는 날의 정경이 어떠했을지는 조금 짐작이 간다.

모텔 주인은 남들이 모두 잠든 시간에 가끔 촬영지 절벽 위로 올라가 대나무 숲속을 혼자 거닐며 조용히 음악에 심취하곤 한다고 했다. 그때의 기분이 '너무나 환상적'이라고 하는데, 나는 조금 으스스한 느낌이다. 아마도 촬영지를 비추는 조명이 꺼져 있는데다가 날이 추워서 그런 느낌이 더 강하게 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곳이 음악을 들으며 산책을 하기에 좋은 곳이라는 말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동이 트기 직전, '폭풍속으로' 촬영지 대나무 숲.
 동이 트기 직전, '폭풍속으로' 촬영지 대나무 숲.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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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속으로' 촬영지
 '폭풍속으로' 촬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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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 경비초소에 그려진 '하트' 낙서

하트가 그려진 해안 경비초소
 하트가 그려진 해안 경비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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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변항에서 약 10여 ㎞를 더 가면 그때부터는 삼척이다. 앞에서도 잠깐 얘기한 적이 있지만, 삼척은 동해안에서도 가장 힘든 구간이다. 언덕이 많은 걸로 유명하다. 바닷가 언덕을 오르락내리락 하다 보면 진이 다 빠진다. 그런 까닭에 삼척이 가까워지면서 조금 긴장이 되기 시작한다.

이곳에서는 길을 선택하는 데 신중해야 한다. 가능하면 바닷가에 근접해 있는 도로를 이용하는 게 좋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산길로 접어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같은 언덕이라도 산길보다는 바닷가 절벽 위를 타고 넘어가는 길이 그나마 경사가 낮은 편이다.

울진군을 벗어나기 직전에 나곡리라는 마을의 바닷가에서 조금 기이하달 수 있는 풍경과 마주친다. 바닷가 초소 벽에 누군가 붉은 색 스프레이로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명색이 '군사시설'을 누가 이렇게 해놓은 것인가? 예전 같았으면 근처에 다가가기도 힘든 물건이다. 접근은 물론 사진 촬영도 금지되어 있었다. 그런 시설물이 지금은 폐허처럼 방치돼 있다. 그리고 누군가 그곳에 예쁘게 낙서까지 해놓았다.

경비초소 벽에 낙서를 한다는 건, 나로선 생각하기 힘든 일이다. 바닷가 초소가 어느새 냉전시대 유물이 되어가고 있는 광경이 예사롭지 않다. 하트 모양의 낙서가 도시 뒷골목 담벼락이 아니라, 경비초소 벽에 그려지면서 이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다.

해안 초소가 이런 상태라면, 앞으로 동해 바닷가를 가로막고 선 가시 철망을 거둬내는 날도 그리 멀다고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이 모든 게 예측불허다.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대립과 갈등이 증폭하고 있다. 과거로의 회귀가 무슨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다. 동해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조용하고 평화로운 날이 계속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색다른 풍경을 보여주는 작은 항구, 갈남항

고포마을을 지나면서부터 드디어 강원도 삼척시다. 이 여행도 이제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다. 그런데 삼척시로 들어서는 길이 너무 어수선하다. 신울진원자력발전소 공사 현장을 지나가면서 길을 잘못 들어 공사장 주변 도로를 헤맨 뒤다. 그리고 삼척시로 들어서서는 호산해수욕장 주변 지역을 지나가느라 조금 애를 먹는다.

이곳은 지금 LNG생산기지를 건설하느라 주변 도로가 매우 어수선하다. 그 바람에 월천리 솔숲 주변 풍경이 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게 훼손된 것은 물론이고, 호산해수욕장 주변은 또 앞으로 뭐가 어떻게 들어서려고 하는지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마구 파헤쳐지고 있다. 호산해수욕장은 강원도에서 보기 드문 몽돌해수욕장이다.

삼척을 지나가는 도로. 급커브 주의 표지판.
 삼척을 지나가는 도로. 급커브 주의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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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남항. 항구 안에 자리잡은 작은 바위섬.
 갈남항. 항구 안에 자리잡은 작은 바위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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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신당공원을 오르는 길이 상당히 힘든 편이다. 신남항 뒤로 가파른 산길을 구불구불 돌아 오른다. 웬만하면 걸어서 올라가고 싶은데 자존심이 허락을 하지 않는다. 그 길에서 땀을 흠뻑 흘리고 나면, 언덕 위로 해신당공원 앞 주차장이 나온다. 여기서 잠시 자전거에서 내려 쉬어가지 않을 수 없다. 다리도 아프지만, 엉덩이가 견딜 수 없이 아프다. 계속 달려가고 싶어도 더 이상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해신당공원 앞을 지나 언덕 아래를 내려가면 갈남항이다. 갈남항은 겉보기에 작고 보잘 것이 없는 곳이다. 내리막길 중간에 항구로 내려가는 좁은 샛길이 나타나 그냥 지나치기 쉽다. 관광객이 찾아갈 만한 곳이 아니다. 그런데 그 작은 항구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무척 아름답다. 풍경이 다른 항구 못지않게 다채롭다. 부둣가와 방파제에서 바라다보는 풍경이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멋을 간직하고 있다.

항구 안에 작은 바위섬이 솟아 있다. 항구가 하얀 바위산을 품어 안은 형상인데, 그 모습이 볼수록 매력적이다. 방파제 너머로는 갯바위들이 드문드문 머리를 내밀고 있는 바다에서 해녀들이 자맥질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날이 추운 탓에 초록색 바닷물이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워 보인다. 아직도 차가운 물속을 드나들며 해산물을 채취하는 해녀들이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갈남항 앞바다. 해산물을 채취하는 해녀.
 갈남항 앞바다. 해산물을 채취하는 해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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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남항. 해안 풍경
 갈남항. 해안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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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남항.
 갈남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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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앞에서 약한 모습 보이기 싫어

새천년해안유원지 소망의탑
 새천년해안유원지 소망의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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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남항을 떠나서는 다시 바닷가 언덕 위를 오르내린다. 아무래도 삼척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새천년해안유원지 소망의탑이 서 있는 언덕을 올라가는 길에서 다시 한 번 더 있는 힘을 다해 페달을 밟는다. 언덕이 조금 가파른 편이어서 처음에는 그냥 걸어서 오를까도 생각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언덕 위에서 도보여행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걸어서 내려오는 게 아닌가?

자전거여행자는 이럴 때 참 곤란하다. 언덕을 앞에 두고, 다른 사람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리가 부러지든 말든, 숨이 뒤로 넘어가든 말든 계속해서 페달을 밟는다. 이깟 언덕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평소보다 더 빨리 더 세게 페달을 돌린다. 이럴 때 내가 참 유치하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 이건 뭐 본능에 가까운 행위라 통제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젠장 이놈의 언덕이 밑에서 올려다보는 것하고는 다르게 제법 높고 가파르다. 때는 늦었다. 이제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결국 숨이 가빠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은 지경이 되어서야 겨우 언덕 끝에 오른다. 매번 겪는 일이지만 정말이지 두 번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고통이다. 다행히도 이 길에서는 이후로 이렇게 낑낑대며 올라야 하는 언덕도 이걸로 끝이다.

맹방해수욕장
 맹방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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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암해수욕장.
 추암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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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한 비행기를 UFO로 착각하다

곧이어 동해시로 넘어 간다. 동해시에서는 북평국가산업단지와 동해항을 지나가는 길이 조금 복잡하다. 그리고 동해항을 에돌아가는 도로 위로 자동차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편이다.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길이다. 그렇게 동해항을 지나면서 피로가 밀려온다. 오늘 하루 동해안 최대 난코스 중에 난코스라고 할 수 있는 삼척을 관통한 데다, 동해항을 지나오는 중에 대형차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도로 위에서 조금 헤맨 탓이다.

UFO로 착각한 비행기. 노란 불빛을 내뿜으며 곡선 비행을 하던 작은 물체는 온 데 간 데 없고...
 UFO로 착각한 비행기. 노란 불빛을 내뿜으며 곡선 비행을 하던 작은 물체는 온 데 간 데 없고...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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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동을 지나가는 도로 위의 하늘에서 이상한 물체를 발견한다. 형체를 분간하기 힘든 물체가 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면 지나간다. 그리고 그 주위로 노란 빛을 내뿜은 작은 물체 하나가 곡선 비행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말로만 듣던 미확인비행물체, UFO다. 세상에 인간이 만든 비행물체치고 저런 식으로 날아다니는 물건은 없다. UFO일 가능성이 크다.

잽싸게 카메라를 꺼내 들어 셔터를 누른다. 이게 다 몇 초 안 되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사진을 몇 컷 찍지 않아서, 그 비행물체는 휙 사라진다. 그렇지 않아도 두 달 넘게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여행을 하면서 우주선 한 번 보지 못하고 끝내는가 싶어 아쉬웠다. 왜 여행 중에 우연히 UFO를 목격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지 않나? 이때 역시 여행을 오래 하다 보니, 내게도 드디어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숙소에 들어와서 사진을 확대해서 보니, 그게 그냥 일반 비행기하고 똑같이 생겼다. 그리고 어찌된 일인지 노란 불빛 같은 건 흔적도 없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히 무언가 보았는데 말이다. 허탈하다. 내가 너무 피곤해서 뭘 잘못 봤겠지 생각하면서도, 내가 내 눈을 의심해야 하는 상황이 조금 당황스럽다. 헛것을 다 보고, 내가 오늘 힘들긴 정말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오늘 하루 달린 거리는 97㎞, 총누적거리는 4541㎞다.


태그:#갈남항, #폭풍속으로, #삼척, #죽변항, #새천년해안유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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