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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연씨가 지난 5년 간 살아온 성남시 시흥동의 움막
 김수연씨가 지난 5년 간 살아온 성남시 시흥동의 움막
ⓒ 송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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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허름한 지방 도시의 변두리에서도 눈에 띄는 '움막'이었다. 1톤 트럭의 짐칸 크기나 될까? 푸르스름한 비닐 천막 위에 판자와 잡동사니들을 얹고 이리저리 끈을 둘러 고정 시킨 위태위태한 구조물이었다.

천막 한쪽을 틔운 입구로 들어가 보았다. 구멍이 숭숭 뚫린 얇은 철재로 사방 기둥과 천장틀을 만들고, 스티로폼과 합판으로 벽을 세운 뒤 김장용 비닐을 여러 겹 씌웠다. 바닥에는 스티로폼을 깔고 녹색 바탕에 붉은 색 꽃무늬가 있는 두터운 담요를 여러 장 덮었다. 철사로 된 옷걸이에 옷가지들을 걸어 사방 벽에 빙 둘러 걸쳤고, 방구석마다 여러 개의 보따리며 박스들을 쌓아 두었다.

5월 하순, 사람들의 옷차림이 부쩍 얇아지기 시작했는데, 저녁이 되자 이곳엔 한기가 느껴졌다. 사람 둘이 앉으면 밥상 놓을 자리밖에 남지 않고, 일어서면 160cm의 여자 머리에도 천장이 닫는 곳. 화장실도 부엌도 없는 이곳이 김수연(53·가명)씨가 혼자 사는 '집'이었다.

경기도 성남시 시흥동. 그러나 이 집엔 더 이상의 주소가 없다. 남의 땅에 허락을 받지 않고 지은 가건물이기 때문이다. 부근 판교의 철거주택에서 지난 2005년 빈손으로 밀려난 김 씨를 위해 옛 동네 주민들이 힘을 합쳐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 사람들도 대부분 판교에서 쫓겨나 김씨 집 인근에서 '깔세'를 사는 처지다. 120만 원 정도의 1년치 월세를 한꺼번에 내고, 매달 10만원씩 '까나간다'고 해서 깔세라고 한단다.

맨 땅에 지어진 구조물에 전기나 수도가 들어올 리 없다. 이웃의 도움으로 간신히 노란색 불이 들어오는 백열등 하나를 켤 수 있게 됐다. 수도는 포기했다. 물을 긷거나 화장실을 써야할 때는 10분 거리에 있는 동사무소로 간다. 동사무소가 문을 닫는 주말과 공휴일에는 반대편으로 10분쯤 걸어야 하는 교회로 간다.

모든 게 불편하기 때문에 물 쓸 일을 최소화한다. 식사는 밥이나 라면을 지어 간단히 밑반찬과 함께 먹거나 교회 등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것을 먹는다. 세간이라곤 버너와 냄비, 밥그릇 몇 개, 숟가락 젓가락, 과일 깎는 칼 정도가 전부다. 여기에 이웃이 가져다 준 밑반찬과 커피 믹스, 과일 같은 게 있다. 냉장고, 세탁기, 텔레비전 같은 건 써본 지 오래 됐다.

난방이 안 되는 이 집에서 제일 무서운 건 겨울 추위다. 첫 해엔 그냥 덜덜 떨었다. 둘째 해부턴 요령이 생겼다. 버너에 뜨거운 물을 끓여 물병을 여러 개 채우는 것이다. 일반 음료수 페트병은 뜨거운 물에 녹아버리기 때문에 2리터짜리 큰 우유병이나 빨래세제 병을 이용한다. 그걸 방바닥 곳곳에 묻고, 이불에 싸서 끌어안고, 빨리 식지 않기를 바라며 겨울 추위와 싸웠다.

보증금도 임대료도 냈는데, 왜 빈손으로 나가야 하는지

김씨가 운영한 '비닐하우스' 소파 공장
 김씨가 운영한 '비닐하우스' 소파 공장
ⓒ 송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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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판교개발이 본격화하기 전까지만 해도 김씨는 자신이 이렇게 추락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그녀는 한때 허름하나마 변두리 가구공장에서 '사장님' 소리를 들었고, 열심히 노력하면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판교 개발이 시작되면서 모든 게 끝났어. 내 사업도, 가족도, 인생도..."

그녀는 1999년 무렵부터 판교에서 소파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가구 공장을 했다. 1997년 외환위기로 남편 사업이 무너지고, 갈등 끝에 이혼한 뒤였다. 그 때는 판교에 개발되지 않고 방치된 넓은 땅이 많았다. 그곳에 많은 사람들이 비닐하우스를 짓고 가구 공장이며 화훼 단지 등을 하고 있었다. 김씨는 보증금 1000만 원, 월세 60만 원에 80평짜리 비닐하우스를 임대해 가구공장을 차렸다.

손재주가 좋았던 김씨는 전국의 술집, 단란주점 같은 곳에 소파를 납품하며 사업을 조금씩 늘려갔다. 80평짜리 공장이 110평으로 늘었다. 살림은 방 두 칸에 마루가 있는 주택을 보증금 1000만 원, 월세 40만 원에 얻어서 살았다. 아들, 딸과 가끔 외식도 할 수 있었던 이때는 정말 살 만했다고 한다.

그런데 2002년 무렵, '판교 개발로 비닐하우스 공장이 철거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소속을 알 수 없는 경비업체 사람들이 비닐하우스를 둘러보고 가는 일도 생겼다. 그러더니 성남시에서 불법건물 철거 고지가 나왔다. 처음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보증금 내고 임대료 내고 써온 내 공장이 왜 순식간에 철거대상이 되는지, 왜 빈손으로 나가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세든 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곧 철거되니 비워 달라고 했다.

불법 건축, 증축물인 비닐하우스는 보상 대상도 되지 않았고, 세든 집을 비우는 것에 대해 한국토지주택공사가 거주이전비용으로 700만 원을 준다고 했다. 그러나 이 돈으로 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받고 나면 공장도, 집도 모두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대아파트 입주라는 대안도 제시되긴 했다. 신도시가 건설된 후 1억 5000만 원의 보증금을 끼고 월세 48만 원에서 60만 원을 내면 24평에서 30평짜리 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그 아파트에 5년을 살면 분양권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쥐어짜내려 해도 그런 돈은 없었다. 보증금 1000만 원짜리 집에 살던 김씨에게 1억 원이 넘는 아파트 보증금은 언감생심이었다.

이곳이 유일한 생업의 터전인데, 갈 데 없는 사람들을 이렇게 쫓아낼 수가 있는 거냐고 따졌다. 동네 사람들과 뭉쳐서 '갈 곳을 마련해 달라'고 시위도 했다. 그러나 2003년 12월 굴착기가 밀고 들어왔다. 보상을 받은 사람들은 이주를 시작했고, 경비업체 직원들이 남은 사람들을 몰아붙였다. 김씨는 그래도 버텼다. 2005년 4월, 한국토지공사가 철거용역업체 600여 명을 동원해 남아있던 주민들을 모조리 끌어냈다. 그 자리에 배치된 전투경찰들은 용역업체 직원의 폭력을 묵인하다 못해 돕기까지 했다고 김씨는 몸서리를 쳤다. 

"용역 직원들이 집집마다 다니며 쇠파이프로 살림살이를 부쉈어. 소방호스로 물을 뿌리고, 주민들을 밟고 때렸어. 그 때 나도 입술이 찢어지고 어깨를 다쳤지. 트럭이 와서 부서진 가재도구를 다 싣고 갔어."

김씨는 무지했던 자신을 한탄하고 책망했다. 사람들이 판교 신도시에 대해 웅성거릴 때, 개발이 되면 좋다고 생각했다. 병원도 들어오고 생태공원도 생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주택 세입자이자 불법 건축 공장주였던 그녀는 '떠나 주어야 할' 존재였을 뿐이었다.

내 형편 때문에 아들도 결혼 취소 당해

 비닐하우스가 있던 자리에는 성남시 아파트가 들어섰다.
 비닐하우스가 있던 자리에는 성남시 아파트가 들어섰다.
ⓒ 송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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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 함께 버티던 옆집 아주머니가 용역들의 쇠파이프에 쫓겨 성남의 월 20만 원짜리 고시원에 들어가고 난 후, 결국 김씨도 성남시 시흥동, 이 곳 움막으로 거처를 옮겼다. 소파공장을 할 때만 해도 월 300만 원 수입은 됐지만, 공장이 철거되면서 소파 납품 대금을 떼이고 자재 값은 빚으로 남아 무일푼에 1억 원의 부채만 안게 됐다. 쫓겨나지 않으려 버티는 과정에서 아들딸은 서울 친척집으로 보낸 뒤였다.

김씨는 다시 일어날 기력을 잃었다. 남편과 이혼하기 전에도 갖은 풍상을 겪었지만, 절망하지 않았던 김씨였다. 열일곱에 부모를 모두 잃고 네 동생을 거느린 소녀가장으로 양장점 생활을 했을 때도, 남편과 갈라선 뒤 살아 보겠다고 시작했던 구멍가게와 세탁소가 잇달아 망했을 때도 일어섰던 그였다.

하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키웠던 소파공장을 철거당하고, 살던 집에서도 쫓겨 나온 뒤엔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친척집을 떠돌다 우울증이 생겨 군에서 귀대조치까지 된 아들, 고등학교만 마친 채 친구집 신세를 지고 있는 딸에 대해서도,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질 뿐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아들은 최근 결혼을 하려 했는데, 여자친구 집에서 김씨의 형편을 알고는 취소해 버렸다고 한다.

김씨는 어렸을 때 결핵을 앓아 폐가 제 기능을 못하고 기관지 천식도 있는데 움막 생활을 하면서 몸이 더 나빠졌다. 하지만 의료보험이 없으니 어지간해선 병원도 못 가고, 아주 심할 때만 남의 보험을 빌려 치료를 받았다. 가벼운 감기도 한 번 걸리면 2~3개월 콜록거리며 그냥 버티기 일쑤였다고 한다. 손목과 팔꿈치 관절에도 이상이 있어 라면 상자 하나를 통째로 들지 못한다. 남의 공장에서 재봉 일을 하면서 근근이 생활비를 벌고 있지만, 호흡기 등에 무리가 와 한달 40만 원 수입을 넘기기 어렵다. 강제 철거를 당하고 움막 생활을 하는 동안 주민등록이 말소돼, 기초생활수급자 신청도 하지 못하고 있다.

"재개발로 잘 살게 해준다던 정치인들 다 어디 갔어? 땅 있는 놈들은 수십억, 수백억을 벌었다는데 돈 없는 사람들은 있는 것마저 빼앗기고 쫓겨나는 게 재개발이야? 그래도 판교 개발 전에는 살 만한 시절이 있었다구......"

김씨는 끝내 목이 메었다.

지금도 어딘가 또 다른 '움막생활'이... 

지난 11월 초, 김씨에게 다시 연락했을 때 깜짝 놀랄 변화가 있었다. 지방선거로 7월에 시장이 바뀐 뒤, 성남시가 김씨의 딱한 사정을 헤아려 임대주택을 마련해 주었다는 것이다. '매입임대주택' 즉 한국토지주택공사가 기존 주택을 사들여 임대하는 연립의 반지하층을 월세 5만4000원에 살 수 있도록 해 준 것이다. 비록 햇살이 잘 들지 않고, 스무 평도 안 되는 낡은 집이지만 김씨는 지난 9월부터 아들(29)과 딸(26)을 불러들여 함께 살 수 있게 됐다.

엄마가 지어주는 밥을 먹으며 아들은 우울증이 많이 나아졌고, 대학에 복학도 했다고 한다. 딸은 과학실험도구를 만드는 회사에 취직해 월 80만 원을 받으며 이 집의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한다. 김씨는 주민등록이 회복됐고, 기초생활수급대상자로 지정됐다. 성인 자녀가 있고 딸에게 수입이 있어 현금 지원은 못 받지만 쌀값과 가스 전화료 등을 대폭 할인받는다. 김씨는 재봉틀을 마련하고, 의자 커버 입히는 일감을 받아오는 등 다시 일어서겠다는 의지로 충만해 있었다.    

"예전 살던 집은 그대로 두고 왔는데, 모르지, 누가 들어가서 사는지도...... 거긴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가족과 모여 살 수 있는 집 한 칸이 한 인생을 나락에 떨어뜨릴 수도, 되살릴 수도 있다는 것을 김씨가 겪은 세월이 웅변하고 있었다. 김씨는 '움막 생활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면서도 이 말은 꼭 하고 싶다고 했다.

"지금도 곳곳에서 재개발 한다고 난리잖아. 첨단 도시니 하는 허황된 말로 부추겨서. 돈 버는 사람은 엄청나게 챙겨도, 없는 사람들은 밀려나서 죽잖아. 그래도 개발에 눈이 멀어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본 척도 안 하고 있잖아......"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태그:#철거민, #철거, #재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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