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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은 자연 미인이었다. 실크 같은 피부에 길고 쭉 뻗은 다리, 매혹적인 눈은 몹시 돋보여서 길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스무 살이 되던 해 그녀는 우연찮게 직업 모델의 길에 들어섰는데, 타고난 얼굴과 몸매 그리고 세련된 감각은 그녀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 톱모델의 자리에 오르게 했다.

매끈한 캣워크에서 아름다움을 뽐낼 때마다 빛을 머금은 수백 대의 카메라들이 그녀를 담아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녀는 그저 걷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매달 있는 각종 잡지의 화보촬영에서 그녀는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색색의 드레스 혹은 파리의 어느 유명 디자이너가 만들었다는 오트 쿠튀르 의상을 입은 채 포즈를 취했다. 그저 포토그래퍼의 주문대로 웃고, 자세를 바꾸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헤어담당 디자이너는 이연의 맨 얼굴을 보면서도, 감지 않은 머리카락을 만지면서도 "너무 예쁘다"를 연발하곤 했는데 이연은 그 말에서 아무런 감흥도 느끼질 못하였다. 예쁘다는 말은 그녀에게 그 흔한 인사말보다도 익숙했기에. 그래서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무표정으로 응수하고는, 자신의 최신형 터치식 핸드폰을 꺼내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톡톡톡 문자 메시지를 작성하곤 했다.

남자가 여자를 꽃이라 함은 꺾기 위함이요, 여자가 여자를 꽃이라 함은 그 시듦을 슬퍼하기 때문이다. -괴테.
 남자가 여자를 꽃이라 함은 꺾기 위함이요, 여자가 여자를 꽃이라 함은 그 시듦을 슬퍼하기 때문이다. -괴테.
ⓒ 변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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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은 예쁘다는 이유로 자신을 편애하는 디자이너들이 우스웠다. 타고난 외모 덕에 잡지표지를 찍고, 무대에 서 많은 돈을 버는 자신이 너무 쉽게 사는 인간이 아닌가 싶어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그래서 어느 날은 화려한 의상 대신 치마길이가 무릎까지 오는 회색 정장을 입고 한 중소기업에 면접을 보러가기도 했다. 희끗희끗한 머리의 회사 간부는 이연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자기 친척조카가 모델에이전시를 하는데 모델로 일해보지 않겠냐고 했다.

회사를 빠져나온 이연은 근처 일각의 패스트푸드점으로 들어가 더블 치즈버거와 튀김감자를 먹으며 콜라를 두 번이나 리필했다. 이연은 양껏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이었다.

막 치즈버거를 다 먹어 가는데,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쓴 정장차림의 남자가 쭈뼛쭈뼛 다가와 이연 앞에 섰다. 아까 면접장에서 본 남자였다. 이연은 콜라를 마시며 남자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는 -미안하지만-너무도 흔하게 생긴 얼굴이라 개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보였다. 남자는 이연의 눈을 똑바로 보지도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저⋯ 초면에 이런 말씀을 드리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이연은 콜라의 얼음을 씹어 먹으며, 그녀의 검정색 토드백 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 쪽을 처음 본 순간, 저는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를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이연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남자의 창의성 없는 멘트가 이 매력 없는 남자를 더욱 더 무생물처럼 느끼게 만든 것이다. 이연도 하루키의 그 소설 정도는 알고 있었다. 100퍼센트의 여자아이 운운하며 이연에게 작업을 걸어온 남자가 한둘이었던가. 그들의 말이 맞다면, 나는 수십 명의 남자에게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라는 건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당신은 제가 30년을 살며 줄곧 찾아왔던 100퍼센트의 여자가 확실하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이 온전히 담겨있지 않은 말투. 이연은 핸드폰 액정을 톡톡 두드려 남자친구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방긋 미소를 지었다. 오늘 저녁 집에 오겠다는 그의 문자였다.

"그러니까⋯ 옛날에 한 소년과 소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열여덟 살이고 소녀는…"

남자는 이연의 무관심에도 굴하지 않고 미동 없이 선 채 애써 그 소설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이연은 먹은 자리를 정리하고는, 백과 쓰레기가 담긴 쟁반을 들고 일어섰다. 쟁반을 정리대에 두고 1층으로 내려가는 이연의 모습에 남자는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뿌리를 박은 듯 그 자리에 선 남자는 자신이 그녀에게는 1%의 남자도 아니란 사실을 깨달아야만 했다.


태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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