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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구의 원혼이 켜켜이 쌓인 묘지

1945년 9월의 어느 날, 키타규슈시의 어느 조그만 항구에서는 80명의 조선인들이 60톤의 목선을 타고 대한해협으로 나가갔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망국의 백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석탄공으로, 군수공장 노동자로, 정신대로 끌려왔던 그들이 아니었던가. 그들은 어머니 품속처럼 따뜻한 내 나라, 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마쿠라자키라는 태풍이 패망한 일본을 향해 와랑와랑 달려들고 있었다. 그들은 내심 불안했다. 저 조그만 목선이 과연 우리를 고향으로 데려다 줄 것인가. 조금만 더 기다릴까. 아니다, 단 한시라도 이 왜놈의 땅에 있고 싶지 않다.

오다야마 묘지 입구
 오다야마 묘지 입구
ⓒ 김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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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들은 기어코 배를 타기로 했다. 6마력의 허약한 엔진에 그들의 목숨을 걸기로 한 것이다. 태풍은 점점 그 기세를 더해갔고, 대형선박들도 속속 항구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할 수 없었다. 패망한 일본은 차일피일 한인들의 귀환을 늦추었고, 시간이 갈수록 노골적으로 귀환활동을 방해하기도 했다. 지난 8월 24일에는 삼천 명의 한인들을 태운 우키시마마루호도 바다 가운데서 폭발하지 않았던가.
 
이 아래에 동포들의 유해가 있다
 이 아래에 동포들의 유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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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들이 탄 일엽편주는 태풍이 몰고 온 해일과 파도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결국 대한해협의 차디찬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그렇게 80명의 강제 한인들은 코발트 블루의 바다 속으로 침몰되었고, 그들의 시체는 조류를 따라 돌고 돌다가 일본의 와카마쯔 해변가로 밀려들었다. 아마도 그들의 시체는 푸르딩딩하게 변했을 것이다. 때론 물고기에게 뜯겨 참혹한 살점을 드러내기도 했겠지.

해변가에 늘어선 조선인들의 사체를 인근 주민들이 겨우 수습했다고 했지. 주민들은 조선인들의 시체를 이곳 오다야마 묘지 빈터에 겹겹이 묻었다고 했다. 화려하게 치장된 일인들의 묘 한구석에, 아무런 비석도 없이 그저 겹겹이 매장했을 뿐이었다. 그게 바로 오다야마 조선인 묘지라고 했다. 채 30평도 되지 않는 좁은 터에 80명의 원혼이 켜켜이 쌓여 있는 묘지인 것이다. 

  오다야마 언덕에 세워진 솟대 

동포넷 방문단은 이틀째 되는 날에 오다야마 묘지를 참배했다. 70명 모두 숙연한 마음을 안고 동포들이 묻힌 작은 언덕으로 올라갔다. 섬나라 특유의 습기는 여전히 는지렁이처럼 온 몸에 달라붙었고, 한 걸음마다 땀방울이 솟구치는 날씨였다. 과연 이들은 왜 일본에 왔을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음습한 묘지를 찾은 것일까? 아마도 그건 연민일 것이다. 아마도 그건 이국에서 잊혀져간 동포들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하늘을 보니 새하얀 구름들이 이리저리 흐르고 있었다. 고향 땅에서 일인들에게 강제로 끌려간 그님들이 입었던 그 순백의 옷처럼, 하얀 구름들은 일본의 하늘가를 떠돌고 있었다.

고향을 향하는 솟대
 고향을 향하는 솟대
ⓒ 김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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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먼저 출발한 1진들의 노력 덕분에 평평한 묘지 터는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부산을 바라보는 솟대 하나가 원래 있던 두 개의 솟대 사이로 살포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더 높이 세우지 못한 것이 안타깝고, 아름답게 치장하지 못한 것이 죄스럽다고 읊조린 어느 시인의 절규를 절로 생각나게 하는 솟대였다.

솟대, 영혼의 그리움, 그리고 저 너머 세상에 대한 희미한 동경. 이번 방문단이 세운 솟대는 그 본래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리라. 저 솟대에 님들의 영혼이 곱게 자리 잡아 한 마디 작은 새가 되어 고향으로 날아가겠지.

 어느 여인의 진혼무

솟대 세우기와 벌초를 끝낸 방문단은 님들의 위령비 앞에 작은 제사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상이 차려지는 동안 몇 몇 어머니들은 벌써 눈물을 훔쳤다. 수정처럼 맑은 눈물이 가엾게 흘러내려 님들의 묘지에 핀 풀꽃 사이로 굴러가기도 했다. 또 어떤 어머니들은 휴지와 수건으로 위령비 안내문과 위령비를 닦았다 그 가녀린 손끝 사이로 어느새 조용한 찔레꽃 가락이 울려 퍼졌다.

아아, 넋이여!
 아아, 넋이여!
ⓒ 김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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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락이 잔잔히 흐르는 가운데, 국악연주단 민들레의 해금 소리가 참석자들의 폐부를 찌르며 솟대위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극단 자갈치의 굿거리장단이 진진하게 어우러지더니 저 먼 데서 하얀 소복을 입은, 극단 자갈치 소속 춤패 이미화씨의 진혼무가 시작되었다. 여인은 엄마를 그리워하는 아이의 표정으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인의 표정으로, 고국산천을 꿈에도 잊지 못하는 동포들의 표정으로 위령비 주변을 돌고 돌았다. 그 여인은 작은 탈 하나 손에 들고 흐느껴 울며 솟대 주변을 돌아다녔지. 눈물, 그리고 아픔. 참석자 모두의 가슴에 깊은 회한이 남겨지는 가운데, 여인은 님들이 묻힌 빈터에 맨 발로 다가가 진혼무를 추기 시작했다.

위령비 전경
 위령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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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두 손을 활짝 펴며, 때로는 두 손을 허공에 올리며 절규하는 모습으로 진혼무를 추는 여인. 그녀의 왼손에 들린 국화꽃이 칠월의 햇살 아래 순백으로 표백되는 순간, 모두의 가슴에는 눈물이 묻어 나왔다. 고향을 향하고 있는 솟대에서도 눈물이 흘러나왔다.

한 마디로 오다야마 묘지에서 한국의 문화패들이 이런 위령제를 지낸다는 것 자체가 경이였다. 한국과 가깝지만 너무나 먼 일본 땅에서, 조선인을 위한 위령제라는 형식에 대해 일본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그들은 과연 이런 위령제를 꿈이나 꾸어볼 것인가. 만약 이 광경을 일본인들이 본다면 그들은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위령제 모습이 일본 TV에 방영된다면, 그래서 일본의 양심들이 움직인다면, 그들은 진정으로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에게 사죄를 할 것이다.

어린이들의 참배
 어린이들의 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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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화 속에 피어난 진혼무는 막을 내리고

여인의 진혼무는 어느새 정점을 치달았다. 무릎을 끓은 채, 절규하듯이 두 손을 하늘로 뻗어 올린 여인의 손에는 국화꽃이 들려 있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여인은 진혼무를 추면서 국화를 한 송이씩 묘지에 뿌렸는데, 그중 어느 국화 하나가 땅 위에 꼿꼿이 서 있지 않은가. 기이한 일이었다. 그 국화 한 송이는 어느 넋의 몸부림일까. 아마도 솟대에 머물던 님의 영혼 하나가 그 국화 속으로 잠시 들어갔을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자신들을 잊지 않고 찾아주는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런가.

님이여, 편히 쉬소서
 님이여, 편히 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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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제가 모두 끝난 후, 사람들은 저마다 위령비 앞에서 절을 올렸다. 어린이들의 묵례에 이어, 단장님을 비롯한 시민단체 회원들, 어머니들, 문화패 일꾼들이 저마다 절을 했다. 절을 하면서 흐느끼는 이들. 님들에 대한 죄스러움과 미안함이 서린 눈물.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비울 즈음. 나는 다시 묘지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휴가묘지 처럼 어디선가 까마귀 소리가 처연하게 들려왔고, 나는 담배 연기를 핑계 삼아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 담배 연기 사이로 후쿠오카 동포 교류협의회의 김정배 선생님 말씀이 들려왔다.

 '이 원혼들이 솟대에 실려 저 멀리 고국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다음에는 더 높이, 더 멀리 솟대를 세웁시다......'

님들의 탈
 님들의 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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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 언젠가는 그의 바람대로 더 크고 더 높은 솟대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언젠가는 빈 곳으로 방치된 저 곳에 수많은 비석과 봉분이 놓일 것이다. 그리고 역사를 그것을 기록할 것이다. 일본이 진정으로 사죄하는 그날까지 역사는 님들의 한 맺힌 이야기를 빠트리지 않을 것이다.   
  
솟대는 그리움을 안고
 솟대는 그리움을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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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국세신문에도 송고함



태그:#오다야마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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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스토리텔링 전문가.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토요일에 떠나는 부산의 박물관 여행>.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저자. 단편소설집, 프러시안 블루 출간. 광범위한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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