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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답사를 떠나기 전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실제 학살현장에 가면 아무 것도 없고 평범한 장소일 뿐이다. 그게 사실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상상하는 것이다. 그 앞에서 몇 십 년 전 일어났던 끔찍한 사건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 말이다.”

 

   나는 역사의 현장 앞에서 얼만큼 상상하고 감응할 수 있을까. 또 대학생으로서 내 공부는 어떠해야 하나하는 고민을 얼마나 치열하게 하고 돌아올 수 있을까. 저마다의 고민을 안고선 우리는 5시간을 달려 벌교에 도착했다.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끔찍한 역사를 체험하기 위해 온 것을 잊을 정도로 전라도 땅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눈부신 가을햇살이 산천을 씻어주고 그 햇살에 산천은 제 모습을 맑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 곳이 너무 아름다워 아이러니였다. 여순사건 당시 붙잡힌 좌익계열들이 모두 처형당하고 묻힌 ‘형제묘’ 에서는 눈부신 여수 앞바다가 보였다. 아름다운 바다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형제 묘에서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을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였다.

 

   1948년, 제주도 4.3사건 토벌을 위한 출병을 거부한 14연대 군인들이 여수와 순천지역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좌익계열이 많던 14연대 군인들은 이승만 정부를 거부하고 그 과정에서 지역 주민들도 개입한다. 이에 정부가 토벌을 시작하면서 수많은 전라도 사람들이 죽었다. 끔찍한 학살이 일어났다. 이게 60년 전 여순사건이다. 여순사건이후 한국엔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지고 전라도 사람들은 ‘빨갱이’로 낙인찍혔다. 피해자들은 고통의 기억에 침묵했다. 그 기억을 안고 사는 노인들이 아직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침묵한 시간만큼 우리의 역사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아무도 나아졌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순천과 여수지역에서 여순사건을 겪었던 증언자들을 많이 만났다. 증언자들이 하나같이 이야기하는 건 ‘좌우도 모르는 무고한 민간인들이 왜 그렇게 죽어야 했나’는 것이다. 광복 이후 가난했던 시기에 민간인들은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밤이면 밤사람(좌익계열)들이 산에서 내려와 밥이며 소며 옷들을 갖고 갔고, 낮이 되면 경찰들이 마을로 들어와서 좌익계열에 밥을 해주거나 옷을 대준 사람들을 추궁하고 죽였다. 이념싸움은 알지도, 관심도 없었던 사람들이 왜 총살당해야 했을까. 민중을 위해서라고 서로 외쳤던 권력들이 진정 위한 것은 민중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무엇 위에 자신의 권력을 세우려 했던 걸까?

 

  아우슈비츠의 끔찍한 학살에 우리는 아직도 경악하지만 정작 한반도에서 일어난 동족끼리 죽고 죽였던 학살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아직 전라도 땅에는 어디에 묻혀있는지도 모를 유골들이 산재해 있다. 비단 전라도 땅 뿐이겠는가. 일제시대를 지나 6.25 전쟁까지 겪으면서 한반도가 드러내지 못한 상처가 얼마나 많을까. 누군가는 현재 한국의 많은 모순들이 일제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말을 한다. 그만큼 한국은 과거에 대한 반성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그걸 은폐하려는 방향으로 여기까지 왔다. 오히려 반성해야 할 자들이 권력의 위치를 계속 지켜왔다. 하지만 역사라는 것은 쉽게 단절되거나 어디선가 뚝 떨어지는 것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부단한 대화로 이뤄진다. 과거의 사건은 끊임없이 현재에 영향을 주고 있다. 잘못된 과거를 긍정적인 힘으로 바꾸기 위해 현재에 부단히 노력하지 않는 이상 과거는 여전히 부정형의 상태다. 과거는 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는 말은 얼마나 폭력적인가. 예수가 말한 용서가 이런 상황에도 유효해야 하는가. 누구도 나서서 여순사건에 대해서 공식사과하지 않았다. 국가도 겨우 진실규명을 위해 노력하는가 싶더니 요즘엔 다시 뒷걸음질이다. 정권이 바뀌면서 피해자들이 증언하는 부침도 심하다고 한다. 

 

 

답사 셋째 날, 우리는 여수중앙초등학교를 갔다. 당시 국민학생이었던 여순사건 유족회 회장님이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주셨다. 마을주민들을 초등학교에 몰아두고 하루 종일 처형을 했다고 한다. 새끼줄을 쳐놓고 손가락총으로 좌우를 갈랐다. 손가락총은 이 사람 빨갱이야 라고 손가락으로 지목하면 곧 총살당한다 해서 만들어진 말이다. 군인들은 몇 명을 총살시키고서는 그 시체를 마을주민들이 이고 구덩이에 묻게 했다. 하루 종일 그 일이 되풀이 됐다. 증언을 해주신 분도 그 날 형님을 잃었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 형의 유골은 찾지 못했다. 형의 유골이 묻혀 있을 곳이라 짐작된다며 가리키는 곳엔 아파트가 서 있었다. 아픈 기억을 시멘트로 발라 버리는 역사에 대한 잔인한 치유방식. 소박한 양복을 입은 유족회 회장님이 담담한 표정으로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는 사이, 쉬는 시간 종이 울렸는지 아이들이 건물에서 쏟아져 나왔다. 엄숙하던 운동장은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로 어느새 활기찼다. 또 다시 느끼는 슬픈 아이러니.

 

  이번 답사를 계기로 나는 내 가장 가까운 곳을 들여다보게 됐다. 피해자들의 증언을 통해 내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살펴보게 된 것이다. 바로 내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험난한 근현대사를 몸소 겪은 산 증인이었다. 내 가족사가 곧 한국사였다. 나 뿐 아니라 모두가 그럴 것이다. 내 할머니의 동생은 무척이나 영리했는데 중학교 때 친구랑 산에 놀러 갔다가 납북이 되셨다 한다. 몇 년 전 북한을 찾아가 그 분의 소식을 겨우 알게 됐는데 이미 돌아가신 뒤라고 했다. 내 할아버지는 6.25 참전 군인이셨다. 그때 전쟁포로로 잡혀 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셨다고 한다. 나는 몰랐다. 시골엘 갈 때마다 왜 할아버지는 아픈 모습으로 작은 방에 앉아만 계셨는지. 난 이제야 알게 되었지만 할아버지는 몇 개월 전 돌아가셨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할아버지에게 당신의 역사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을까. 그 아픔을 공유할 수 있었을까. 당시 학살을 겪었던 많은 피해자들은 이미 돌아가셨다. 피해자 중에서도 여전히 세월로 위로를 받으며 침묵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분들마저 돌아가시면 우리들은 더욱 쉽게 아픈 역사를 망각할지도 모른다.

 

   요즘 뉴스에서는 좌편향적인 교과서 운운하면서 역사 교과서 개정을 주장하고 나서는 이들이 있다. 오늘은 보수 진영이 경제 교과서도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평가절하하고 정부 역할을 과대평가하는 오류가 빈번하다" 며 문제제기 했다는 기사도 떴다. 살아남는 자가 역사를 쓴다는 강자의 논리가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걸까. 아직도 이념을 인간에게 유용한 칼이 아닌 무기로 사용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의 교과서도 민간인들이 정치적 이익과 이념 논쟁에 무수히 죽었다는 사실과 그걸 감응하고 반성할 계기를 주고 있지 못하고 있는데 여기서 얼마나 더 극단적으로 자신의 입맛대로 국사를 구성하려고 하는 걸까.

 

  더 생각해 본다. 어쩌면 사과는 쉽다. 그렇기에 끝까지 그걸 덮어두려고 하는 가해자들은 정말 어리석은 것이다. 특히 주체가 국가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국가가 나서서 사과하고 보상을 하고 기념비를 세우는 일은 상처를 봉합하는 쉬운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기념비 하나로 쉽게 국사에 수렴되는 임시방편 책에는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이 땅에 다시는 학살이 생기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

 

  역사라는 것은 일상들이 덧대어져서 만들어낸 하나의 덩어리다. 하지만 이 덩어리들을 누군가는 쉽게 절단하고 채취해서 단순하게 공식기억으로 만든다. 그저 ‘역사를 위한 역사’인 공식기억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을 꿈꾸기 위한 역사로서’ 개개인의 많은 진실(truths)을 통해 자꾸만 역사들(histories)을 발견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요즘 역사학계에서 구술사에 주목하는 이유일 것이다. 역사의 질곡에 짓눌려 늘 할딱이는 숨으로 살아야 했던 사람들 한명 한명의 치유를 바랄 때, 더디더라도 한명 한명 살펴보며 가는 것이 삶이고 그게 흐름이 될 때 우리가 바라는 긍정적인 역사가 될 것이다. 폭력에 상처를 입고 트라우마가 생긴 개개인들의 옆에 서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우리는 더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고 말할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장윤미씨는 현재 국민대학교에 재학중입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여순사건, #민간인 학살, #과거사, #진상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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