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12 07:07최종 업데이트 24.01.12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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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북한의 서해 해상 완충구역 해안포 사격으로 서해 북단 연평도 주민들이 대피소로 대피해 있다. ⓒ 연합뉴스


평화 활동을 업으로 삼고 있는 탓일까? 공적이든, 사적이든 여러 자리에서 요즘 부쩍 듣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이러다가 전쟁 나는 거 아니에요?'이다. 분단된, 그리고 군사적 적대 관계가 청산되지 않은 한반도에선 익숙한 걱정이기도 하지만, 요즘엔 심상치 않게 느껴진다는 말도 종종 듣는다.

그도 그럴 것이 남북한 지도자와 당국의 설전과 무력시위는 위험 수위를 넘나들고 있다. 9·19 남북 군사합의로 유지되었던 '군사적 거리두기', 즉 완충지대도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있다. 군비경쟁과 군사적 준비태세 강화라는 물리적인 적대와 '건들기만 해봐라'는 식의 심리적 적대감이 상승 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것 역시 심상치 않다.


과거에도 위기는 여러 차례 있었지만, 대화로 반전되는 경우가 많았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대화는 사라지고 대결만 나부끼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남북한의 갈등과 대결을 중재하려는 미국이나 중국 등 국제사회의 움직임도 자취를 감추다시피 하고 있다. 위기는 차곡차곡 쌓이는데 출구는 보이지 않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이 모든 책임이 윤석열 정부에 있다고는 볼 수 없다. 대남 위협과 조롱이 습관처럼 굳어진 북한의 책임은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이다. 하여 북한 지도부가 이 글을 읽는다면, 거친 입부터 다물어달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뿐만이 아니다. 졸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북한이 온다>에서 자세히 다룬 것처럼, 남북관계와 한반도 평화가 무너지고 있는 데에는 문재인 정부의 책임도 결코 가볍지 않다. 전 정부·여당이 보여준 '언행불일치'는 북한이 남한에 근친증오를 품게 된 결정적인 배경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보수 세력의 각성도 절실하다. 선거 때만 되면, 보수 진영은 진보 정권에서 무너진 안보를 다시 세우겠다고 했다. 이번 정부와 여당뿐만이 아니다. 민주화 이후 이 땅의 보수는 '국가안보는 보수가 강하다'라는 신화를 유포하면서 중도·진보 정권보다 국가안보를 잘 챙기겠다고 다짐해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보수 정권 시기에 국민이 느끼는 안보 불안이 더 큰 경우가 많았다. 이번 정부 들어서는 더 심해지고 있다. 많은 이들이 '언제 무력충돌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기가 커지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전쟁 불안감이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국가안보의 정치화'를 빼놓을 수 없다. 공과 과를 구분하지 않는 전임 정부 정책에 대한 맹목적인 거부와 비난과 책임 전가, 국가안보를 선거에서의 유불리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습관, 선거 국면에서 북한 이슈를 이용하려는 정치적인 유혹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4월 총선이 다가오면서 이러한 관행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정부·여당의 주요 인사들이 경쟁적으로 '총선을 앞두고 북한이 도발해올 것'이라고 시민들의 안보 불안 심리를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여당이 유념해야 할 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이러한 정부·여당의 언행이 '선거용 북풍 유도'로 비치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윤석열 정부가 내세우는 북한 도발시 '즉·강·끝'(즉시, 강력하게, 끝까지) 원칙으로 응징하겠다는 말에 안심하기보다는 오히려 불안을 느낀다.

'반전(反戰)'과 '반전(反轉)'의 기회
 

지난 12월 18일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북한의 장거리 탄도미사일(ICBM) 발사와 관련 조태용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열린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에 임석해 상황 보고를 받고 대응 방안을 지시하고 있다. ⓒ 대통령실


21세기 들어 남북관계나 한반도 문제가 선거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친 때는 딱 한 번 있었다. 2018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4·27 남북정상회담과 6·12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이 열리고 이에 힘입어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지지가 역대급으로 치솟으면서 여당이 압승한 사례가 바로 그것이다. 이에 화들짝 놀란 탓인지, 나경원 당시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원내대표는 미국 쪽에 2020년 4월 총선 전에 북미정상회담을 자제해달라는 취지의 요청을 했었다.

보수의 안타까움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남북관계 발전과 한반도 평화 증진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냉전적이고 정략적인 사고에 갇혀 '변화의 기회'를 사사건건 놓쳐왔기 때문이다. 한국의 보수는 이 대목에서 미국의 보수로부터 배울 점이 있다.

미국 민주당 정권이 본격화한 소련과의 군비경쟁 및 베트남 전쟁에 변화를 꾀한 정권은 '냉전의 전사'로 불렸던 공화당의 닉슨 행정부였다. 스타워즈(전략방위구상)를 앞세워 신냉전을 초래했던 공화당의 레이건 행정부도 임기 후반기엔 소련과의 핵군축 협상에 나섰다. 그리고 레이건의 바통을 이어받은 공화당의 아버지 부시 행정부는 전략방위구상을 공식 철회했고 소련의 고르바초프와 함께 냉전 종식을 선언했다.

민주당 정권은 보수파의 안보 공세를 의식해 적대국과의 화해 및 군축에 소극적이었던 반면, 이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공화당 정권은 할 수 있었던 다른 선택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맹목적인 '힘에 의한 안보' 추구가 상대의 반작용을 야기해 오히려 안보와 국익을 저해한다는 깨달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역설적으로 '힘에 의한 안보'의 토대를 크게 강화한 정권은 바로 문재인 정부이다. 남북정상회담에서 '단계적 군축'을 추진키로 합의했음에도, 또 코로나19와 이에 따른 민생 위에도 불구하고 전임 정부·여당은 사상 최대 규모의 군비를 지출했고, 그 결과 한국은 세계 6위의 군사강국으로 올라섰다.

남북관계와 한반도 평화의 토대가 무너진 주된 원인 가운데 하나도 이 지점에 있었다. 문재인 정부는 역대급 군비증강을 하면서, 또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이 중단하겠다고 약속한 한미연합훈련을 재개하면서 '북한의 평화를 지켜주는 것은 핵무기가 아니라 대화와 신뢰'라고 말했다. 그 결과가 어땠는지는 문재인 정부를 향해 조롱어린 배신감을 담은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의 지난 1월 2일 담화에 잘 담겨 있다.

보수의 변화 기회는 이 지점에 있다. 전임 정부에서 이뤄낸 막강한 군사력을 자산으로 삼아 묻지마식 군비증강을 자제하는 것은 그 한 축에 해당된다. 또 하나의 축은 문재인-트럼프 시기에 빈말로 끝난 대규모 한미연합훈련 유예 약속을 되살림으로써 전쟁 예방을 의미하는 '반전(反戰)'과 대화 재개를 의미하는 '반전(反轉)'의 기회를 창출하는 데에 있다. 

보수 정부와 여당이 이런 선택을 한다고 해서 '안보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여론의 지탄을 받을 일은 거의 없다. 이는 보수의 특권에 해당된다. 윤석열 대통령의 아래와 같은 취지를 담은 연설을 기대하고 기다리면서 글을 맺는다.

'우리 정부는 미측과의 긴밀한 협의를 통해 3월로 예정된 대규모 한미연합훈련을 유예하기로 했습니다. 이러한 선제적이고 선의의 조치를 통해 한반도 위기를 예방하고 다가오는 총선을 안정적인 분위기에서 치르고자 합니다. 

또 군사훈련 과정에서 나오는 막대한 탄소 배출을 줄임으로써 정부가 국정과제의 하나로 내세운 그린 데탕트에 시동을 걸고자 합니다. 북한도 하루빨리 대화의 장으로 나와 한반도 주민들이 더 이상 전쟁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데 동참해주길 강력히 촉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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