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휴가> 스틸컷

영화 <휴가>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누구에게나 물러서지 못할 자리가 있다. 개인의 꿈이나 이익을 위해서도 그렇고, 대의나 사명을 지키기 위해 마땅히 그래야만 할 때도 있다. 그렇게 자신의 모두를 내던지는 이들의 시간은 그저 곁에서 지켜보는 이들이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얕고 푸르지 않다. 어둡고 혼탁한 물속에 깊이 또 오래 잠겨있는 일에 가깝다. 자신은 물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을 내놓아야 하는 잔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나 하나만 내던져도 괜찮은 상황이라면 그나마 나은 쪽에 속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오랜 시간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는 동안, 가족의 시간과 가정의 안녕 역시 볼모로 잡힌 채 소모되고 만다.

영화 <휴가>는 천막농성을 위해 오래 집을 떠나 있던 아버지 재복(이봉하 분)이 정리해고무효소송 최종 패소 판결 이후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그리는 작품이다. 해고당한 지 벌써 5년, 1800일이 넘는 시간 동안 가정을 떠나 있었던 그는 열흘이라는 짧은 시간의 휴가 기간 동안 그동안 미뤄두었던 가장의 역할을 해내고자 한다. 하지만 두 딸은 그런 아버지가 어색하기만 하다. 돈 한 푼 가져다준 적이 없고, 연락조차 제대로 해주지 않던 그의 갑작스러운 책임감과 따스함을 믿을 수 없다. 무엇보다 그가 다시 천막으로 돌아갈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마음을 열 수 없다.

02.
"재판도 다 끝났고 이제 더 할 것도 없잖아."

재복의 휴가는 지난 5년의 세월이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한 상황에서 주어진다. 패소라는 대법원의 판결이 있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남은 것이라고는 떠나간 조합원들과 다 떨어진 투쟁 경비, 그리고 마지막까지 천막에 남은 이들의 실망뿐이다. 재복 역시 가족을 등지며 농성장을 지키고, 집회를 다니고, 조합원들이 먹을 밥까지 해가며 그 오랜 시간을 투자했는데 절망적인 결과 앞에 네가 뭘 했냐는 메마른 타박밖에 듣지 못한다. 정작 해결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모두가 지친 상태로 힘이 빠져 좋지 못한 소리가 나온 것임은 잘 알고 있다. 열흘의 휴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재충전을 위한 목적으로.

오랜만에 돌아온 집은 엉망이다. 이제 막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는 큰딸과 아직 중학생에 불과한 작은딸 두 아이가 학업과 생활비를 위한 아르바이트에 이어 집안일까지 챙기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고 사는 동안 관계가 서먹해져 버린 것도 문제다. 자신은 나름대로 그동안 미뤄둔 아버지의 역할을 제대로 해보겠다는 심산을 내보이지만 마음만 앞설 뿐 두 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재복의 그런 얄팍한 마음은 큰딸의 대학 입학 예치금 문제 앞에서 산산조각이 난다. 아직 시간이 남아서 등록금은 자신이 해결할 수 있지만, 예치금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큰딸의 현실 앞에서 재복은 난감해지고 만다. 50만 원도 채 되지 않는 금액이지만 지금 당장 자신도 돈을 구할 길이 막막하다. 그제야 미뤄두었던 현실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한다. 지금껏 아버지를 대신해 현실을 딛고 서 있던 두 딸에 의해서.
 
 영화 <휴가> 스틸컷

영화 <휴가>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03.
영화의 시작은 재복의 상황을 중심으로 한 노조의 농성 문제지만 영화가 제대로 바라보고자 하는 자리는 가족의 문제다. 그렇게 가족을 오래 떠나 있던 아버지를 대신해 현실을 살아야만 했던 두 딸의 이야기가 그의 모습에 드리우는 순간, 영화에 의해 재복의 두 다리를 강하게 붙잡히며 현실로 내던져진다. 대학 예치금 문제만이 아니다. 대학을 다니기 위해서는 동생과 함께 살던 집을 떠나야 하는 큰딸의 사정으로 인해, 다시 한번 아버지가 집을 비우게 되면 중학생인 둘째 딸은 혼자 생활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재복이 직시하지 않고 있던 시간의 문제는 본격적으로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딸의 예치금을 구하기 위해 단기 일자리라도 구해 돈을 벌어보고자 하지만 농성을 했던 지난 5년의 시간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오래된 친구 우진(신문섭 분)을 불러 돈을 빌려보고자 하지만, 벌써 주변 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온 터라 그의 신용과 평판 역시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보상금을 받아 갚겠다는 마음은 지금도 여전하지만 이미 재판은 패소로 끝이 났고, 투쟁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다행히 우진이 자신이 일하는 목공방에서 일주일 동안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집으로 돌아와 현실의 문제를 마주하게 되면 될수록 '열흘의 휴가'라는 단어의 의미만 더 선명해지는 듯하다. 휴가라는 단어에는 일정한 기간 동안 행동을 쉰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며, 다시 말하면 지금 잠시 중단되고 있는 농성이 다시 재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부터 재복에게는 집으로 영영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는 뜻이며, 다시 천막으로 돌아가야 함을 말한다.

04.
우진의 목공방에서 발생하는 20살 준영(김아석 분)의 사고는 영화가 오래된 재복의 사건을 통해 말하지 못했던 사회 시스템의 문제와 그 문제가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내러티브가 된다. 특히 사측에 해당하는 친구 우진도 산재 처리와 치료비 청구에 대한 부분을 처리하기 어려워하고 사고 당사자인 준영 역시 일을 크게 키우고 싶지 않다는 뜻을 밝히지만, 기어이 나서 중간에 놓여 있는 재복이 애를 쓰는 모습은 현재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정확히 보여준다. 그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는지, 투쟁을 하는 5년의 시간 동안 변화를 겪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여기에는 자신은 사측에게 오랜 시간 어려움을 당하고 있지만 준영만큼은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그의 바람과 욕망이 투영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오랜 시간 가슴속에 맺힌 그 응어리가 심지어는 그 사측이라는 대상이 자신에게 일자리까지 마련해 준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터져 나오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경미한 사고이기는 하지만 당장 일을 할 수 없는 준영의 자리에 기술고등학교를 다니는 다른 어린 학생이 들어서는 모습은 역시 과거 재복이 회사로부터 쫓겨나던 장면,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을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게끔 만든다.
 
 영화 <휴가> 스틸컷

영화 <휴가>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05.
"아빠, 이제 서울 가지 마."

영화의 후반부에는 아버지와 두 딸, 세 가족이 한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장면이 그려진다. 1시간이 넘는 영화의 러닝타임을 통틀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존재하는 신이다. 열흘의 휴가, 그 마지막 날의 모습. 떨어져 지낸 시간에 비하면 열흘이라는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한 공간에서 함께 머물렀다고 서로의 식탁을 공유하는 이 장면은 녹진하면서도 지긋지긋한 가족의 굴레를 잘 표현해내고 있다. 그 밥상 위에서 오가는 대화는 여전히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이기적이고 무심한 태도와 그에 대한 원망과 슬픔을 쏟아내는 두 딸의 오랜 상처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딸의 부탁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미련한 아버지는 다시 천막으로 돌아간다.

이 글의 처음에서 이야기했듯이, 누구에게나 어떻게든 지켜내야 하는, 결코 물러서지 못할 자리가 있는 법이다. 다만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꾸리고 형성한 가족의 자리마저 등지며 손에 쥐어야 할 무엇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작은 의문이 남는다. 사람의 존엄성을 위해,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할 권리를 위해 사회에 목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주장하겠지만 그 목소리 뒤꼍에서 숨을 죽인 채로 몇 년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 역시 사람이다. 그렇게 잃어버린 가족의 시간은 대신해 목소리를 내어줄 천막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가족을 떠나야만 하는 이의 마음 역시 편할 리 없겠지만, 두 딸은 벌써 5년의 시간을 양보, 아니 떠나보내야만 했다.

06.
가끔 그런 영화들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영화의 주된 시선에 해당하는 인물이 아니라 그 곁에 놓여 있는 인물에게 더욱 마음을 쓰게 되는 작품들. 이 영화 <휴가>의 경우가 조금 그런 면이 있는 것 같다. 영화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은 분명 재복이고, 그가 처한 상황인데 마음이 더 쓰이는 쪽은 그의 두 딸이다. 어쩌면 자신의 선택에 의해 행동하고 결정할 수 있는 그와 달리, 두 딸은 아버지의 선택에 의해 어쩔 수 없는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더 그런 마음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영화가 특별히 하나의 이야기에만 편중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영화를 연출한 이란희 감독은 10년이 넘게 농성 중이던 한 해고노동자가 농성장을 세 번 떠나고 다시 세 번 돌아와 정말 '끝'을 내는 모습을 보며 이 이야기를 완성했다고 한다. 그가 농성을 하는 동안에 농성장 밖에서 보고 들은 것들에 집중하면서 말이다. 감독의 그런 마음은 영화의 끝자락에 놓여 있는 고공 노동자에게 직접 볶은 소시지 반찬을 올려다 주는 장면에 모두 담겨 있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 싸움도 언젠가 끝나게 될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그런 장면에 눈길을 놓지 않으면서도 아버지의 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멈출 수 없는 것은 이 영화의 아이러니한 지점이다. 사람은 서로 기대며 나아간다고 했고, 가족은 더욱 그런 공동체이기에 그의 빈자리를 홀로 메워야 했을, 아직 어린 두 존재에 대한 마음을 쉬이 접을 수가 없다. 지금 이 글에서조차 어떤 선택이 더 나은 것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두 가지 모두를 선택할 수 없는 그의 마음은 훨씬 더 어렵고 험난할 것이다. 여러모로 참으로 어려운 휴가가 아닐 수 없다.
덧붙이는 글 이 작품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한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의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열다섯 번째 큐레이션 ‘영화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때’ 중 한 작품입니다. 오는 2023년 9월 15일까지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무료회원 가입 후 시청 가능합니다.
영화 인디그라운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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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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