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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 준다.'
'기다려도 안 되면 생긴 대로 살게 한다.'

 
독일의 교육철학은 기다림에 있다. 타고난 아이의 잠재력이 자연스럽게 발현되길 도와주며 기다린다. 그러다 안 되면(대학 입학에 대한 기대) 생긴 대로 살게 한다. '생긴 대로 살게 한다'는, 타고난 능력을 대학 입학으로 연결 짓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저마다의 잠재력을, 대학 졸업장이 아닌 다른 것으로 평가받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타고난 능력에 우위를 정하거나 서열화하지 않겠다는 사회적 합의일 수도 있다.
 
기다림도 길지 않다. 초등학교 입학 후 4년 내 끝장을 본다. 초등학교 4학년 2학기에 인문계와 실업계로의 진학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독일 학부모들은 자녀들의 인문계와 실업계에 대한 조기 결정을 큰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
 
그럼 인문계와 실업계 진학 비율은 어느 정도일까? 이것은 국가별 고등교육(전문대 및 대학) 이수율(중도탈락 포함)로 확인할 수 있다.
 
국가별 고등교육 이수율
▲ 국가별 고등교육 이수율 국가별 고등교육 이수율
ⓒ OECD,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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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표에 따르면 2020년 독일의 25세~34세 고등교육 이수율은 34.9%로 OECD 평균(49.5%)과 한국(69.8%)에 비해 매우 낮다. 이것을 역으로 되짚어보면 독일 청년들의 약 65% 이상이 대학 졸업장 없이도 '잘 살고 있다'는 의미이자, 실업계 진학 또는 대학 졸업장과 별개의 직업교육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독일 대학엔 등록금이 없다. 그럼에도 대학 졸업장에 매여있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경제적 부담이 없음에도 독일 부모들은 왜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려고 바둥대지 않을까?
 
그것은 임금 수준이 습득한 기술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기업과 학교가 연계한 직업교육을 통해 기술을 익히고 거기에 맞는 임금과 일자리가 잘 매칭되어 있는데다 장인(마스터)과정을 거치면 학력과 상관없이 사회적 존경과, 그에 걸맞는 성과를 임금으로 보상받기에 가능한 일이다.
 
THE HRD REVIEW의 이슈분석(한국직업능력연구원, 독일 대졸자와 전문대졸업자간의 임금 격차, 16권 3호, 2013) 자료에 따르면 독일의 고졸 학력자와 대졸 학력자 간의 임금 격차는 한국과 비슷한 수준인 약 40% 수준이다. 그런데 고졸자 중 직업교육을 통해 높은 숙련도를 갖추면 노동시장에서 그에 상응하는 임금으로 보상을 받아 대졸자와 고졸자 간의 임금 격차를 낮춘다고 한다. 그만큼 기술적인 분야에 대한 일의 전문성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독일에선 전문대와 종합대학졸업자 간의 임금 격차도 크지 않다. 아래 표는 교육 수준별 전일제 상용 근로자의 상대적 임금지수(OECD 교육지표, 2017)를 보여준다. 이 표에 따르면 전문대 졸업자의 임금지수는 독일의 경우 153으로, OECD 평균(122)보다 높으며 115인 한국보다는 매우 높은 편이다. 거기다 전문대 졸업자의 임금은 대졸자(158)의 임금과도 별반 차이가 없다. 이것은 독일 대학 시스템과 관련이 깊다. 독일의 전문대는 실무에, 대학은 이론에 중점을 두고 서로의 분야와 활동 영역을 존중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전일제 근로자의 상대적 임금지수
▲ 전일제 근로자의 상대적 임금지수 전일제 근로자의 상대적 임금지수
ⓒ OECD 교육자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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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학력 간 임금 격차가 크지 않은 현실적 이유로 대학교육을 받으려는 수요가 억제되어 청년들과 학부모들은 대학 졸업장에 매이지 않는 삶을 산다. 바꾸어 말하면 독일의 상당수 학생들 스스로 대졸 학력을 고집하지 않는 이유는 전문 기술, 즉 실무능력을 갖춘 직업교육 이수자에 대한 우대하는 시스템 때문이다. 이것은 곧 전문적 기술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 일이 갖는 사회적 기여도를 높이 평가함을 의미한다.
 
이제 눈을 한국교육에 돌려보자! 먼저, '기다려 준다'에서 기다림의 선부터 정리해보자! 기다려준다, 언제까지? 특목고와 자사고 입학의 분기점인 중학교 3학년까지? 아니면, 철나면 제대로 발동 걸릴 수 있다는 한 가닥 희망의 끈을 붙잡고 고등학교 때까지?
 
초등 4학년에 결정되는 독일에 비해 한국 부모의 기다림은 너무 길다. 그 끝이 언제일지 모르는 그 기다림 속에 부모들은 지쳐간다. 끝없는 기다림 속에 부모의 희망을 사교육비에 담아 쏟아붓는다. 교육 대상인 아이들의 지침과 고통 또한 말할 것도 없다.
 
이런 현실을 인정도 부정도 못 하며 갈등하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 나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에 조금은 위로가 되면서도 그런 내 모습에 스스로 측은하기까지 하다. 독일에서는 말도 안 되는 고민을 한국에서는 당연히 해야 하는 셈이다. 생긴 대로 살게 하자는 다짐을 하루에도 수십 번 하지만, 그 신념은 주어진 현실 앞에 수백 번, 수천 번도 더 흔들린다.
 
ʻ남들은 없는 능력도 사교육을 통해 만들어 가는데, 우리는 아이들을 위해 무슨 노력을 쏟고 있는 거지?ʼ, ʻ이렇게 아무것도 안 시키는 것이 부모로서의 직무유기는 아닐까?ʼ, ʻ사교육을 의지하면 아이의 성적이 좀 오를 수도 있을 텐데 언제까지 안 하고 버틸 건데?ʼ
 
이런 고민과 갈등 속에 부부싸움의 주된 내용은 아이들의 교육 문제가 대부분이다. 따라가고 싶지 않은, 또 따라갈 수도 없는 사교육 때문에 부부 사이는 한참 더 벌어진다. 가끔씩 흔들리는 마음을 남편에게 이런 조바심으로 드러내 본다.
 
"옆집 아이는 학원을 몇 개 다니는 줄 알아?", "하루에 영어단어를 100개씩 외운대!", "전교 1등인데도 과외를 받는다잖아?" 등등의 팩트와 정보를 쏟아낸다. 이런 내게 돌아오는 건 여지없는 남편의 버럭 뿐이다.
 
"독일 교육을 보고 와서도 그래? 알면서도 그럴 거면 말도 꺼내지 마!"
 
주어진 현실 속에 아이들이 무방비로 서 있다는 것, 내면적 갈등 속에서 방어하느라 지쳐있다는 것 정도만 알아줘도 좋으련만... 
 
엄마는 현실 앞에 속 터지고, 아빠는 곁눈질로 상황과 결과를 예의주시하고 있음에 속상하고 답답할 뿐이다.

태그:#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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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키일대학(Christian-Albrechts-Universitat zu Kiel)에서 경제학 디플롬 학위(Diplom,석사) 취득 후 시골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2021년, 독일 교육과 생활의 경험을 담은, 독일 부모는 조급함이 없다(이비락,2021)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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