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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류옥하다 기자는 스물 넷 의사 기자입니다. 서울 소재 대학병원에서 전공의로 근무하고 있습니다.[편집자말]
"교수가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은?
정답 : 대학원생을 시킨다."


교수 밑에서 공부와 연구를 병행하며 잡다한 일을 처리하는 대학원생의 현실을 풍자하는 '웃픈' 농담이다. 종합병원 '전공의'들도 이들과 사뭇 다르지 않다. 의사의 자격으로 일하면서 동시에 선배와 교수님들로부터 도제(徒弟)식으로 수련하고 평가받으며, 교육을 병행한다.

근래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 3> 속 장동화(이신영 분)나, <닥터 차정숙> 속 차정숙(엄정화 분)이 바로 이들이다. 이런 '전공의' 하면 머릿속에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드라마 속 장동화와 차정숙의 외형은 가운과 청진기, 펜 모양의 라이트 등 전형적으로 우리가 상상하는 '의사'의 상이다.

그러나 이들을 상징하는 물건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전공의의 분신과도 같은 '전자 동의서 태블릿'이다. 이 태블릿으로 환자에게 동의서의 서명을 받는 일은 드라마에서는 자주 생략되는 주 업무 중 하나다. 아마도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가 현대에 의술을 공부한다면 한 손에 '뱀이 감긴 지팡이'와 함께 다른 손에는 '동의서 태블릿'을 들지 않을까.
   
동의서는 왜 받나
 
아마도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가 현대에 의술을 공부한다면 한 손에 ‘뱀이 감긴 지팡이’와 함께 다른 손에는 ‘동의서 태블릿’을 들지 않을까.
 아마도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가 현대에 의술을 공부한다면 한 손에 ‘뱀이 감긴 지팡이’와 함께 다른 손에는 ‘동의서 태블릿’을 들지 않을까.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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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환자 의사 관계는 권위를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서면 동의 없이 환자의 구두 동의만으로 검사나 수술을 진행하는 경우도 많았고, 심지어 동의 없이 전문가인 의사 판단대로 치료가 이뤄지기도 했다.

현대에 들어와서 '환자의 자발적 동의'(Informed consent)가 강조되면서, 여러 법적인 제도가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서도 의료법 제24조의2 제1항에서 '의사(...)는 사람의 생명 또는 신체에 중대한 위해를 발생하게 할 우려가 있는 수술 등을 하는 경우(...) 환자(...)에게 설명하고 서면으로 그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조항을 두고 있다.

이러한 동의서는 수술이라는 환자-의사 간 계약의 근거가 된다. 부작용이나 합병증이 발생하거나 환자가 사망하는 경우 소송의 증거 자료가 될 수도 있다. 얼마나 충분한 설명을 하였느냐에 따라 판례에 따라 수백에서 수억의 보상금이 왔다 갔다 하기도 한다.

누가 동의서에 서명하나

병원에는 손들 힘조차 없는 환자들이 허다하다. 머리로는 검사와 치료에 대해 이해해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환자인 부모님이나 배우자가 힘들어할 때면 건강한 보호자들은 '대신 제가 서명해도 될까요' 말하곤 한다.

그러나 의료법 제24조의2 제1항에서는 설명과 동의의 대상을 '환자(환자가 의사결정능력이 없는 경우 환자의 법정대리인)'로 한정하고 있다. 원칙적으로 의사 결정 능력이 있다면 보호자가 아닌 환자가 서명해야 한다.

그렇다면 보호자가 없는 경우는 어떨까? 응급실에서는 종종 신원을 알 수 없는 의식 불명의 환자들이 구급차에 실려 오고는 한다. 병원에서는 이들을 '무명남/무명녀'로 부른다. 이런 환자일수록 산소나 피를 주는 긴급한 조치가 필요한 경우가 잦다. 이를 위해 응급 상황에서는 의료인 2명의 서명으로 환자의 동의를 갈음할 수 있는 예외 조항이 있다.

마찬가지로 의사결정이 불완전하다 판단되는 14세 미만에게는 부모가 대리인으로서 서명하고, 14세 이상은 부모와 아이 모두에게 동의받는다. 의사결정에 문제가 있는 치매 환자의 경우도 배우자나 자녀와 같은 법정 대리인이 동의서에 대신 서명한다.

이 '대리인' 제도가 시대에 맞지 않다는 지적도 많다. 이성 간의 가족이 아닌 다른 형태의 관계가 보편화 되어가는 현대 사회에서 특히나 그렇다. 흔한 예로 동성 부부나 사실혼 관계가 있다. 이들은 서로 법정 대리인이 아니다. 이 때문에 법정 대리인이 되지 못해 수술이 지연되거나, 남보다 못한 친인척을 찾아 헤매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동의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면

의학은 흔히 술어(terminology)의 학문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모여 개념을 정하고, 그 개념에 말을 붙이고, 서로 소통하는 것이 술어의 핵심이다. 의학을 배우는 것은 마치 영어, 스페인어와 같은 언어를 새로 배우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수 있다.

그렇기에 의사는 아무래도 소통 과정에서 익숙한 '의학의 언어'를 사용하기 마련이다. 개중에는 '술기' 기전'과 같이 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단어들도 있고, 'appendicitis' (충수염) 'carotid artery'(온목동맥)같이 영어로 된 단어들도 있으며, 'r/o' 'f/u'(의심된다, 추적한다)와 같은 약어도 있고, '농양'(고름집), '수지'(손)와 같이 한자 용어들도 있다.

이런 복잡한 용어로 가득한 설명을 듣고 있으면 의사의 말이 외계어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물론 나름의 변명은 있다. 환자의 이해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짧게는 7년에서 10년 가까이 써온 '모국어'인 의학용어의 틀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에 환자의 적극적인 의사 표시가 중요하다. 의사가 어려운 전문용어나 한자어, 영어를 사용한다면 쉬운 말로 설명을 부탁하는 것이 쌍방에게 이롭다. 그림을 그려 달라 부탁하거나, 잠시 함께 인터넷의 사진을 보며 의견을 나누는 것도 도움이 된다.

동의서는 요식 행위가 아닌 환자의 치료 참여 과정

의료법에서는 '진단명, 수술 등의 필요성, 방법 및 내용, 의사의 성명, 후유증과 부작용, 수술 등의 전후 환자의 준수사항'을 반드시 설명하고 동의할 것을 규정해 놓고 있다. 이에 더해 검사나 치료의 효과나 성공률, 치료하지 않을 경우 생기는 위험성, 선택할 가능한 대안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눈다면 금상첨화다.

슬프게도 관례로 많은 동의서가 일방적인 의사의 설명과 환자의 수동적인 서명으로만 이루어지고는 한다. '동의서 태블릿' 속에 서류가 수십 개 쌓여있는 전공의의 입장과, 아프고 정신이 없는 환자의 입장이 서로 맞아 발생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동의서는 단지 서명 하나로 끝나는 요식 행위가 아니다. 검사나 치료 방향을 환자와 의사와 함께 논의하고 결정하는 능동적인 참여의 시간이자, 질병과 같이 싸우는 동반자가 되는 시작점이다.

만약 전공의가 태블릿을 들고 찾아온다면, 서명 전 설명이 충분했는지, 이해가 부족한 사항이 있는지 한번 더 짚어보는 건 어떨까? 새로운 치료의 방향이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태그:#닥터차정숙, #낭만닥터김사부, #동의서, #서명, #류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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