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29 20:31최종 업데이트 23.05.29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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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 자전거도로 대나무길. ⓒ 성낙선


국토횡단 이틀째 되는 날, 광주 하늘이 흐리다. 하늘 높이 먹구름이 깔려 있다. 비구름이 애초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다 여행 중에 비를 맞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오늘은 영산강 자전거도로를 달리다가 중간에 일반도로로 올라서야 한다. 지방도로의 경우, 도로가 좁고 갓길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런 도로 위에서 비라도 맞게 되면 조금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게다가 오늘 가야 하는 길이 상당히 힘들고 험한 편이다. 이번 여행에 최대 난관인 백두대간을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약 500미터 높이의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한다. 백두대간을 넘는 고개치고 높이가 비교적 낮은 편에 속한다. 그렇다고 결코 얕볼 수 없다. 이 고개가 이번 국토횡단 구간에서 가장 높은 고개다. 이 고개에 비하면, 앞서 지나온 느러지고개 같은 건 고개 축에도 들지 못한다.

아침 6시가 안 된 시각, 서둘러 잠자리를 정리한다. 그리고 바로 24시간 국밥집을 찾아간다. 오늘은 어떻게 해서든 끼니를 제대로 챙겨먹을 생각이다. 어제처럼 또 다시 주린 배를 안고 달릴 수는 없다. 물론 세상일이란 게 내 맘대로 되는 게 별로 없다. 이렇게 아침 일찍 식사를 할 수 있는 것도 이곳이 광주 시내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어쨌든 오늘 아침은 먹을 수 있을 때 잘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공깃밥 두 그릇을 비우고 일어선다.
 

광주 북구 영산강변 산책로. ⓒ 성낙선

 
자전거도로에서 일반도로로 올라서다

어제에 이어서 영산강 자전거도로 위를 달린다. 상류로 올라가면서 영산강이 폭이 점점 더 좁아지는 느낌이다. 물줄기는 가늘어지고, 둔치로 수풀이 우거진 것을 볼 수 있다. 이른 아침인데도 영산강 둑방 위로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보인다. 대도시 강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중에 하나다. 하지만 이런 일상적인 풍경도 이때뿐이다. 어느 시점을 지나면서부터는 사람을 보는 일이 점점 드물어진다.

날이 흐리고 습도가 매우 높긴 하지만, 금방 비가 쏟아질 같지는 않다. 그나마 다행이다. 어쩌면 날이 쨍쨍해서 땀을 철철 흘리며 자전거를 타는 것보다는 이런 날씨가 훨씬 더 나을 수 있다. 광주시를 벗어나기 직전, 담양이 가까워서인지 자전거도로 위로 느닷없이 대나무 길이 나타난다. 이 대나무길은 영산강 자전거도로이기도 하면서, 광주 외곽을 한 바퀴 도는 둘레길 중의 일부이기도 하다.
 

담양 하천 습지보호구역, 영산강변 대나무군락지. ⓒ 성낙선


이 둘레길은 '빛고을 산들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이곳의 대나무길은 잠시 스치듯이 지나가는 짧은 길에 불과하다. 진짜 대나무길은 담양군에 있다. 굳이 대나무숲으로 유명한 '죽녹원'까지 찾아갈 필요도 없다. 둘레길을 벗어나면서 바로 담양군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담양군으로 들어선 지 얼마 안 돼 자전거도로 위로 '담양하천 습지보호구역'이라고 적힌 푯말이 눈에 들어온다. 푯말 옆으로 대나무숲으로 들어가는 데크길이 깔려 있다.

이곳의 대나무 군락지가 보기 드물게 아름답다. 담양의 대나무숲은 죽녹원이 전부가 아니었다. 대나무숲으로 들어가는 데크길이 경사여서 미끄러워 보인다. 습도가 높은 날은 더 미끄러울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그 외 데크길은 대체로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편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이곳은 람사르 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다. 대나무군락지를 포함해, 멸종위기종인 수달과 삵 등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담양은 확실히 대나무의 고장이다. 담양습지 대나무군락지를 벗어난 뒤에도 자전거도로 위로 대나무길이 또 나타난다. 그 길이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다. 담양의 대나무숲은 영산강 8경 중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담양에서 500년 역사를 자랑하던 죽세공예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든 이후로, 대나무 인기도 시들해진 느낌이다. 하지만 담양에는 대나무만 있는 게 아니다. 담양의 대나무 못지않게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식물이 또 있다. 그게 '메타세쿼이아'이다.
 

담양 시내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 성낙선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보기는 좋지만

영산강에서 오례천을 만나면서 영산강에 작별을 고한다. 이 지점에서부터는 자전거도로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일반도로를 달려야 한다. 영산강 자전거도로는 곧은길과 달리 멀리 돌아가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길이 아름답고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다. 일반도로는 그와는 정반대다. 일반도로로 올라서면서 몸이 바짝 긴장하는 걸 느낄 수 있다. 예상했던 대로 도로 폭이 좁다. 갓길은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담양의 도로는 전체가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타세쿼이아가 도로 양쪽으로 높이 도열해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그런데 메타세쿼이아를 가로수로 심은 도로는 보기엔 좋지만, 자전거를 타기에는 불안하다. 나무뿌리가 자라면서 도로를 침범해 아스팔트를 들고 일어서기 때문이다. 인도도 없는 마당에 갓길마저 침해를 당하면 자전거가 갈 길은 결국 자동차 사이를 파고드는 것밖에 없다.

나무를 베지 않는 한 도로를 넓힐 수도 없고, 왜 이 좁은 도로에 가로수로 메타세쿼이아를 심을 생각을 하게 됐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객쩍은 우려일 수도 있지만, 나중에는 자동차조차 다니기 힘든 도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메타세쿼이아는 성장 속도가 매우 빠른 나무다. 크기도 매우 거대하다. 메타세쿼이아를 심기 전에 인도도 함께 만들고 갓길도 충분히 확보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담양 메타세쿼이아 가로수는 시 경계선에 가서야 겨우 끝이 난다. ⓒ 성낙선

 
담양을 지나가는 자전거여행자의 우려 따위와는 상관없이, 이제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은 명실공히 담양을 대표하는 명소 중 하나가 됐다. 이 가로수길에서 사진 한 장을 남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녀갔는지 모른다. 그러는 사이에 누구나 무료로 드나들 수 있었던 가로수길이 유료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 가로수길 하나로 사람들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 없었던지, 가로수길 인근이 모두 거대한 테마파크로 바뀌어 버렸다.

잘 알려진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을 지나고 나서도 메타세쿼이아 가로수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이 정도 되면, 담양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은 어디가 그 유명한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인지 헷갈릴 수도 있다. 그렇게 한동안 계속해서 메타세쿼이아가 죽 늘어서 있는 도로 위를 달린다. 도로 위로 메타세쿼이아가 도열해 있는 풍경은 담양군을 벗어나 순창군으로 들어서는 고개를 넘어가고 나서야 겨우 끝이 난다.
 

이번 여행길에 처음 만난 터널. ⓒ 성낙선


자전거로 안 되면 두 다리로 걸어서라도

이 고개 위에서부터는 도 경계선도 전라남도에서 전라북도로 바뀐다. 이 고개 위에 어느 대갓집 뒤뜰에나 놓여 있을 법한 장독대가 조성돼 있다. 다른 지역이었으면 이게 뭔가 했을 텐데, 이곳이 순창군이라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후 순창군을 지나가는 동안, 내내 장독대가 눈에 들어온다. 겨우 고개 하나를 넘었을 뿐인데 주변 풍경이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나 싶다.

오후 1시가 돼 갈 무렵, 남원시로 들어선다. 지리산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길이 서서히 고도를 높여가고 있다. 평촌리에서 이번 여행 처음으로 고개 위로 터널을 하나 지나간다. 이름이 표시돼 있지 않은 터널치고는 길이가 꽤 긴 편이다. 길이가 700m가량은 되는 것 같다. 이 터널은 갓길도 없는 데다 오르막길이다. 자전거가 지나가야 하는 터널로서는 조건이 꽤 안 좋다. 그나마 지나다니는 차량이 많지 않아 다행이다.
 

남원시 요천의 자전거도로. ⓒ 성낙선


터널을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고개 정상에 다다른다. 이 고개를 내려와서는 한동안 남원시를 지나가는 하천인 '요천'의 자전거도로를 지나간다. 이 길에서 간만에 긴 휴식을 취한다. 하지만 마음은 그리 가볍지 않다. 조만간 오늘 여행의 대미를 장식할 백두대간 고갯길을 넘어야 한다. 그래서 그런지 강변 벤치에 앉아 있으면서도 하천 풍경이 좀처럼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국토종단을 하던 당시 백두대간을 넘던 기억만 자꾸 떠오른다.

생각만 해도 숨이 찬다. 오늘 넘어가야 할 고개 이름은 '여원치(여원재)'이다. 도로 위로 올라서 어디서부터 고개가 시작되나 싶던 차에, 드디어 눈앞에 '여기서부터 여원치 구간'이라는 교통 표지판이 나타난다. 그 표지판을 보는 순간 다리에 힘이 쭉 빠진다. 도저히 자전거를 타고 넘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지금 내 체력으로 기어 변속 8단에 불과한 미니벨로를 타고, 처음부터 끝까지 백두대간을 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고개를 오르기 시작한 지 얼마 안 가 자전거에서 내려선다. 이대로 계속 자전거를 타다간 진짜 숨이 넘어갈지도 모른다. 할 수 없이 고개 끝까지 자전거를 끌고 올라간다. 등줄기가 땀으로 흥건히 젖는다. 그렇게 고개를 오르기 시작한 지 1시간 40분이나 지나서야 겨우 고개 위에 올라선다. 해발 480m. 수치만 놓고 보면, 그리 높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에 두 다리로 걸어서 넘는 고개치고 낮은 고개는 하나도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남원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고개, 여원재 정상. ⓒ 성낙선

 

여원재 정상, 백두대간 안내도. ⓒ 성낙선

 
지리산 밑에서 멈춰 선 국토횡단 여행

여원재는 영호남을 넘나드는 고개답게 이런저런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고려말 이성계가 왜군을 토벌하기 위해 이 고개를 넘어갔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조선에 원군으로 온 명나라 장수가 이 고개를 넘어갔고, 정유재란 당시에는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이 이 고개 위를 지나갔다. 그런데 역사마다 왜적이 등장한다. 그때마다 이 고개 위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여원재 너머로는 급한 내리막길이 아니다. 인월면(전북 남원) 인월리까지 10km가량 극히 완만한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급격한 내리막길은 이 지역을 지난 뒤에 나온다. 인월리에 도착했을 때가 어느새 오후 7시 무렵이다. 시간이 마치 바람처럼 흐른다. 산 위에서 보내는 시간은 산 아래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훨씬 더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다. 같은 시간을 가도 속도가 느리기 때문이다.
 

인월면 마을 풍경. ⓒ 성낙선

 
인월면을 지나면 바로 경상남도 함양군이다. 웬만하면 이대로 함양까지 내달릴 텐데, 시간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게다가 여원재를 넘느라 이미 체력이 바닥이 난 상태라, 함양을 코앞에 두고 멈춰선다. 인월리는 지리산 둘레길이 지나가는 주요 거점 중의 하나다. 그래서 도보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에겐 꽤 잘 알려진 곳이다. 오늘, 광주시 북구에서 남원시 인월면까지 달린 거리는 약 90km이다. 이 상태로 가면, 이틀 후 포항에 도착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데 아무래도 날씨가 문제가 될 것 같다. 내일부터 폭우가 쏟아진다는 예보가 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일기예보부터 들여다본다. 날씨가 심상치 않다. 오후 들어 돌풍과 함께 이틀 연속 폭우가 쏟아진다는 예보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이런 건 미처 예상을 못 했다. 내가 일기예보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날씨가 급변하는 바람에 애초 기상청 예보에 큰 변동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폭우도 감당하기 힘든데, 돌풍까지 분다니 달리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주저하고 망설일 것도 없이 아침 식사를 하고 난 뒤 바로 버스터미널로 향한다. 여원재만 넘으면 순탄대로일 줄 알았는데, 여행을 중간에 이런 식으로 중단하게 돼 상당히 아쉽다. 자전거여행을 하다가 날씨 때문에 여행을 접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렇다고 국토횡단을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다. 조만간 상황을 봐서, 인월면에서 포항까지 다시 여행을 이어갈 계획이다.
 

인월면, 지리산 둘레길 안내 표지판.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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