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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치유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입니다. 20대(Z), 30대(M), 40대(X)까지 총 6명의 여성들로 이뤄진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편집자말]
입으로 음식을 삼키는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마저 도를 닦을 수 있는 곳이 있다. 그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는 고요한 공간에서 내 앞에 놓인 넓은 그릇과 마주하고, 수저를 들어 밥 한 숟갈, 나물 한 젓가락 소중하게 담아 입에 넣다보면 저절로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거를 수 없이 치르는 '식사'인데도 이곳에서는 은근히 낯설면서 특별하다.

템플스테이에서의 하룻밤. 일상에서의 쉼표를 찾아 잊고 있던 자신과 오롯이 마주하고 싶거나, 사소한 깨달음이라도 얻기 위해 혹은 모든 걸 비워내기 위해 절로 향하곤 한다. 사실 내 목적은 매우 세속적이다. '공양'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시간표 위에 머물기 위해. 이 글은 템플스테이 소개도, 체험기도 아니다. 마음이 너그럽게 물드는 순간들을 적은 문장일 뿐이다.

밥이 목적이었으나
 
이런 풍경을 매일 보면 어떤 느낌일지
▲ 삼화사에서 맞았던 아침 이런 풍경을 매일 보면 어떤 느낌일지
ⓒ 조성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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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절에 가면 무료로 밥을 준다는 소문을 들었다. 게다가 사찰 음식은 자연의 맛을 추구하는 가장 건강한 음식이라고 하니 더욱 궁금했다. 그러나 뱃속부터 교회에 다녔던 내게 불교 문화는 등불로 비추어 보는 먼 미지의 세계 같았다.

어쩌다 사찰 초입의 사천왕을 보게 되면 무시무시한 도깨비라도 만난 듯 심장이 조여왔다. 대웅전이니 극락전이니 뜻 모를 이름의 오래되고 무거운 공간과 어둠 속 잠잠히 앉아 있는 커다란 불상은 괜히 으스스했다.

그 무서움이 오래가진 않았는데, 뒷산에 절이 있는 동네로 이사한 덕분이었다. 경내를 감싸는 잔잔한 템포의 목탁 소리를, 울창한 자연이 주는 신선함을 좇다보니 어느 사이에 마음이 가뿐해졌다.

'점심 공양'이 쓰인 안내 표지도 실제로 마주쳤지만 이 절에 다니지 않는 신도는 거절 당할 것만 같아 발걸음을 돌렸다. 익숙한 듯 합장하며 공양간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몹시 부러워하면서.

그러다가 드디어, 내게도 기회가 왔다. 단돈 오 만 원에 절에서 숙박하며 밥도 세 끼나 준다는 템플스테이를 알게 된 것이다. 첫 목적지는 순천의 선암사. 버스에서 내려 선암사까지 이어진 뜨거운 한여름의 긴 숲길을 엄마와 걸어올라가는데, 갑자기 새하얗게 천둥 번개가 내리치며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폭우가 시원하게 쏟아졌다.

숙소에 도착해 나눠주신 법복으로 갈아입자마자 그 가볍고 까슬까슬한 감촉에 속세의 짐을 벌써 벗어던진 것처럼 개운했다. 그리고 공양간으로 향했다. 신발을 벗어야 하니 양말은 꼭 챙겨 신고.
 
엄청난 사찰음식을 보고 속세의 욕심이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 진수성찬 엄청난 사찰음식을 보고 속세의 욕심이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 조성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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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음식 만들어 주시는 분들을 뭐라고 불러드려야 하는지도 몰랐다. 구김살 없는 말간 얼굴에 쪽머리를 하고 분주하게 반찬통을 채우고 계신 분들. 멋쩍게 집게를 잡는 나에게, 마음껏 먹으라고 건네주신 인사 덕분에 식판 가득 음식을 담아올 수 있었다.

언뜻 보기엔 우리 집 식탁에 놓인 것과 다름없는 평범한 나물이고 김치인데, 한 입 먹는 순간 방앗간에 참기름 짜는 장면이 절로 그려지는 깊은 고소함에 눈이 번쩍 뜨였다.

공양 시간도 수행의 일부라 말로 나눌 순 없었지만, 온 몸으로 물개박수를 치며 '와, 진짜 맛있다'를 남발할 수밖에. 이게 말로만 듣던 사찰음식이구나. 맞다, 공양간 어머님, 보살님이라고 부르는 건 조금 지나서야 알았다.

그 이후 전국 각지의 사찰로 작년에만 네 번 템플스테이를 다녀왔다. 남편과 함께 두 번, 미국에서 온 엄마 친구와 함께, 프랑스에서 온 사촌언니와 함께. 공양간 가득 메운 경건함 속에서 혀 끝을 감싸고 지나가는 고급스러운 맛에 집중하느라 고기 반찬은 생각도 안났다.

직접 기른 싱싱한 재료들과 옹기종기 모여있는 장독에서 꺼낸 장으로 맛을 낸 귀한 음식이, 이렇게 거저 먹을 수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젓가락을 들 때마다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평소 '식사'를 얼마나 가볍게 여겼는지도.

손쉽게 먹을 수 있는 맵고 짜고 단 음식, 그 어설픈 음식마저도 집중하지 못한 채 영상을 보며 삼켜버리는 현대인의 삶이 얼마나 안쓰러운 건지. 아침 공양을 먹기 위해 새벽 다섯 시에 번쩍 일어나고 다음 공양을 기대하며 느적느적 걸어다니는 호사스런 하루를 즐긴다. 이런 하루도 있을 수 있다.

밥만 먹게 되지 않는

너무 먹는 얘기만 했나. 템플스테이에서의 행복한 순간은 공양간 밖에서도 여전히 이어졌고, 저녁 공양 후 사찰 산책하기는 그 중 최고로 꼽고 싶다. 방문객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절에 머무는 사람만 돌아다닐 수 있는 시간. 늦은 오후 태양이 사라지기 직전 온 세상이 붉게 번지며 나무와 기와지붕이 물드는 고즈넉한 순간.

아무도 없는 텅 빈 마당을 걷다가 주황색 천을 두른 주지스님이 저 멀리부터 걸어오실 때면 어설픈 합장을 드려야 하나 아니면 못 본 척 옆길로 갈까 고민하게 된다. 머뭇거리는 새 이미 마주친 눈빛으로 머쓱하게 웃으며 두 손을 모아 서투른 인사를 해 본다. 더욱 단정히 받아주시는 어른의 모습에서 저절로 따뜻해지는 마음.
 
기림사에서 마주친 사랑스러운 풍경
▲ 지붕 위 물들어가는 핑크빛 노을 기림사에서 마주친 사랑스러운 풍경
ⓒ 조성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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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번 템플스테이를 할 사찰을 찾다가 국어사전에 문득 '취미'를 검색해봤다. 첫 번째는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 두 번째는 아름다운 대상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힘. 그리고 마지막은 감흥을 느끼어 마음이 당기는 멋. 그렇다면 내 취미는 완벽하게 '템플스테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푸르른 자연과 이야기를 가득 머금은 법당과 탑, 그리고 정성이 가득 담긴 사찰음식과 공양간 앞마당을 빼곡히 메운 장독대까지. 언제든 가볍게 수행자가 되어 너그러움을 먹고 올 수 있는 곳, 그런 곳이 있다는 생각만으로 충분히 든든하다.

절밥을 노리는 세속적인 욕심에 하나 더 덧붙여도 될까. 전국 145개의 템플스테이를 도장 깨기 하듯 모두 방문해서 사찰마다 제 각기 다른 멋과 맛을 발견하고 감상하고 싶은 바람이 생겼다. 어쩔 수 없는 목표지향적 속세인인가 싶어 쑥스럽기도 하지만.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
태그:#나의 취미, #템플스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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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문장들로 나를 설명하기 위해 여백의 시간을 즐기는 30대 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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