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17 13:37최종 업데이트 23.05.17 17:09
  • 본문듣기

아라카와 강변에서 해설하는 니시자키 마사오. 패널을 들고 있는 사람이 니시자키 ⓒ 그룹 봉선화 제공

 
*1편(https://omn.kr/23wn6)에서 이어집니다.

니시자키는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의 면담을 통해 신문에 보도된 것보다 풍부한 증언을 모아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의 손에는 1923년에 만든 '안부조사표'도 들려 있었다.


이 자료는 <동아일보>가 1923년 9월 14일부터 10월 8일까지 6회에 걸쳐서 만든 자료다. <동아일보>는 편집장 이상협을 특파원으로 파견해 동포의 피해를 조사했는데 교통과 통신이 마비된 지라 여의치 않았다. 이상협은 동포들의 생사를 묻는다며 일본 신문에 광고를 냈다. 이를 통해 연락해 오는 사람과 조선총독부 도쿄출장소에서 확보한 생존 유학생의 명단까지 참조해 안부조사표를 만들었다.

조선에서는 학살 사건이 알려지며 공기가 험악했다. 생사 확인을 위해 가족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것조차 막아 분노가 터져 나왔다. 그런 상황에서 나온 안부조사표는 중요한 현지 조사였고 이 조사표에 대한 관심은 말할 수 없이 컸다.

한국과 일본 넘나들며 모은 자료와 증언

니시자키는 마이크로필름으로 된 5569명의 자료를 일본으로 가지고 가 혼자서 분류 작업을 했다. 컴퓨터도 없는 시절이니 이름별로 하나하나 카드를 만들었다. 출신지를 알 수 없는 사람을 제외하니 5160명, 이중 경상남도가 3할, 경상북도가 2할, 전라남도가 1할을 차지했다. 이들의 이름 밑에는 대개 '노동'이라고 적혀있었다.

1차 조사에서 만난 사람이 주로 유학생이었으니 2차 조사에선 농민, 노동자를 만나고 싶었다. 니시자키는 1985년 다시 한국 땅을 밟는다. 그때 만나 사람이 경남 사천군 윤수상씨다. 여기서 대접받은 삼계탕 맛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윤수상의 증언 또한 생생하다.

"나는 14살에 3.1운동에 참가했다. 보통학교 4학년으로 학교에서 친구들과 태극기를 만들어 운동장에서 독립선언서를 읽었다. 일본 교장이 눈물을 흘리며 막았으나 이를 뿌리치고 거리로 나갔다. 출동한 군대에 잡혀 3주간 구류를 살았다. 이후 진주농업학교에 들어가 일본인 교장 배척 운동을 하다 퇴학당한 나는 1923년 1월에 일본에 갔다. 시모노세키(下関)에서 도쿄까지 20시간 넘는 기찻길, 외로움을 달래려고 하모니카를 불었다. 시끄럽다고 핀잔을 들어 엉덩이에 하모니카를 감추었는데 그만 잊고 내렸다.

처음에는 요츠타니(四谷)에서 신문 배달을 하다가 그 후 혼소임정(本所林町)의 고학생 기숙사에 들어가 나초를 팔면서 연수관에 다녔다. 신주쿠(新宿)의 신문 보급소로 옮긴 것은 지진이 나기 일주일 전. 점주는 타케다 코쥬로(武田孝十郎)였다. 처음 겪는 지진에 정신없이 피난자의 대열에 끼어 야스쿠니 신사로 갔다.

여진이 가라앉아 타케다의 집으로 돌아가는데 한 대의 차가 멈추더니 출신이 어디인가라고 물었다. 조선의 경상남도라고 하니 다짜고짜 카구라자카(神樂坂) 경찰서로 끌고 갔다. 이미 40, 50명의 조선인이 잡혀 있었다. 다음 날 오전 11시 타케다씨가 와서 신원 인수서를 썼다. 타케다의 집에는 한국인이 5명이나 있었다.

나는 5년 뒤 고향으로 돌아와 동향 사람 9명이 희생된 것을 들었다. 이들은 오사카로 갔다가 일이 없어서 지진 나기 얼마 전 도쿄로 가 일자리를 찾아 떠돌다가 그만 화를 당했다. 일인 당 200엔을 위로금으로 받았다. 유족이 '뜨거워 뜨거워'라고 외치는 꿈을 꾸곤 했다."
 
 

관헌과 자경단에게 쫓기는 조선인. 초등학생의 기념화집(<太陽>1977년 2월호) 실제 그림에는 오른쪽 상단에 나카야마(中山)라는 지명이 적혀 있다. ⓒ 1923역사관 제공

 
니시자키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추도 모임의 조사는 1986년의 3차, 1989년의 4차로 이어진다. 더 많은 노동자와 농민의 증언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추도 모임의 3차 조사 때에 재일조선인 유학생이 안내를 했지만 연고자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지방에 가 읍 터미널에 내리면 약국으로 들어갔다. 약사는 학력이 높고 약국이 동네 사랑방 노릇을 하기 때문이었다. 들어가 취지를 설명하면 약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여기저기 전화를 돌렸다. 약사의 안내대로 물어물어 가면 나중에 순경이 쫓아오기도 했다. 당시 한국은 버스 안이나 대합실, 논 한가운데에도 '간첩 신고는 113'이란 표어가 붙어있던 때였다.  

이렇게 한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모은 자료와 증언을 가지고 추도 모임은 1992년에 <바람아 봉선화의 노래를 전해다오>(風よ鳳仙花の歌をはこべ)라는 책을 냈다. 기누타 유키에, 오치아이 히로오(落合博男), 야노 교코(矢野恭子), 구와야마 슈헤이가 함께 썼다.

책 제목에 '봉선화'가 들어간 것은 1988년 추도식 때 조선인 여성 한 명이 어린 봉선화 나무를 가지고 와 강변에 심은 게 계기였다.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재일 조선인이 사랑한 노래였다. 그 후 추모제 때마다 봉선화 씨를 아라카와 강변에 넓게 뿌렸고 이 꽃은 풍성하게 자랐다. 마치 둔치에 묻힌 영령이 꽃으로 피어나는 듯했다. 덕분에 책 이름에 봉선화를 넣게 되었다.

이 책에는 앞서 이성구나 윤수상의 증언 외에도 학살에서 돌아온 많은 사람, 특히 농민의 이야기가 담겼다.
 
선산군에서 갔던 사람 44명 중 메구로(目黒) 수용소에 잡혀있던 31명이 돌아왔다. 이 수용소에는 스가모(巣鴨) 경찰서와 센주(千住) 경찰서로 연행된 사람이 수용됐었다. 돌아온 사람은 이성덕, 이성기, 김원국, 김기병, 임안출, 박돌석 등이고 친족이고 사촌 간이었다.

김원국의 동생 말에 의하면 형은 21세에 갔는데 당시 해평면에 흉작이 들어 먹고 사는 게 막막했다. 일본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해서 한 집에 한 명꼴로 갔다. 밀항도 하고 함바집에서 일을 거든 사람도 있다. 주로 시모노세키, 오사카, 도쿄로 갔다. 지진 소식이 해평면에 전해졌을 때 모두 걱정하며 울었는데 다행히 다친 사람이 없었다.

이성덕은 도쿄에 2~3번 갔는데 메구로 수용소에서 돌아왔을 때 형사가 불만을 늘어놓는지 수시로 감시했다. 그러면서 일본에 대한 비판이나 학살 이야기를 하면 다음부터 도항 증명서를 내주지 않음은 물론 붙잡혀 갈 거라고 했다. 그런데 이성덕은 학살을 경험하고도 일본으로 다시 갔다. 조선에선 농사로 먹고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끔찍했던 학살 현장에서 살아왔건만 그 불구덩이로 다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성덕, 어쩌면 그 시대 동양척식주식회사나 일본인 지주에게 소작료로 5할 이상에 농지세에 수립조합비에 거의 8할 가까이 빼앗기던 신세에다 그마저도 언제 소작을 떼일지 모르는 가련한 처지였으니 그 선택이 가슴 아리다.

이 책에는 이렇게 소중한 기록이 많이 담겼다. 어찌 보면 한국의 역사학계, 언론계가 먼저 했어야 할 일인데 추도 모임이 이를 한 것이고 책까지 펴냈으니 고맙고 부끄러울 뿐이다.

니시자키는 '봉선화' 책 초판의 집필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가 1985년에 중학교 영어 교사로 발령을 받은 데다가 주말 특별활동인 축구 교실의 지도까지 맡았기 때문이다. 초임 교사로서 부담도 있고 이런저런 잡무에 주말 특별활동까지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연스레 추도 모임의 문헌반 활동을 하기 어려웠고 한국 조사를 다녀오긴 더욱 힘들었다.

니시자키는 한동안 추도 모임과 거리를 두게 된다. 늘 마음에 두었다가 다시 돌아온 것은 1992년, 교사 생활이 조금 자리를 잡아 일과 후나 주말에 시간을 낼 수 있게 되면서부터다.

추도비를 세우자
  

2009년 세운 그룹 봉선화의 추도비. 회원들은 이렇게 추도비 부근을 단장한다. ⓒ 니시자키 마사오 제공

 
1992년 니시자키가 돌아왔을 때 새로운 사업 방향으로 추도비 건립이 논의되고 있었다. 이미 1991년에 에도구(江戸区) 정심사 주지 노무라 모리히코(野村盛彦), 히가시 코마가타(東駒形) 교회의 아메미야 에이이치(雨宮栄一) 목사 등이 정식으로 제안한 터였다. 아메미야는 91년 추도식에서 "기억은 계속 희미해지나 추도비는 어떤 풍파에도 남아서 조선인의 슬픔과 일본인의 죄를 기억한다. 이런 상징물이 들어서면 추도식 때만이 아니라 언제든지 찾아와 의미를 새길 수 있지 않겠느냐"며 간곡히 호소했다.

회원들은 추도비를 당연히 아라카와 강가에 세우고 싶었다. 니시자키와 회원들은  건설성과 교섭에 나섰다. 건설성은 하천법을 들어 추도 모임의 요청을 외면했다. 하천법에 따르면 둔치나 강둑에 어떤 시설물도 만들 수 없다. 태풍이 와서 강물이 불었을 때 시설물에 나무 등이 걸려 강물의 흐름을 막으면 주민의 안전이 위험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건설성이 거부한 후 추도 모임은 2000년 관할 지자체인 스미다(墨田) 구의회에 '조선인 순난자 추도 사업'에 관한 진정을 냈다. 스미다구에선 "(학살은) 역사적으로 분명치 않다", "(비 건립은) 공공성이 없다", "구가 설치자가 되어야 할 근거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어찌어찌 구의회에서 표결까지 갔으나 다수 표를 얻지 못했다.

결국 추도 모임은 둔치를 포기하고 스미다구 차원의 공식 건립도 포기하고 아라카와 강둑 밑 주택가나 야히로(八広)역 일대에 땅을 구해 자신들의 힘으로 추도비를 세우기로 한다.

이때 니시자키 마사오는 교사직을 그만두기로 마음을 먹는다. 추도비를 세우는 게 워낙 큰 사업인데 누군가 매달려야 추도비 건립이라는 과제를 이뤄낼 것 같았다. 사무국을 두어 상근 활동가에게 월급을 줄 수도 없는 처지. 주변에서 말렸지만 그는 결심했다. 15년 넘게 교직 생활을 하면서 모은 돈을 조금씩 헐어서 생활하면 못 할 것도 없었다.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결혼을 하지 않아 돌봐야 할 가족도 없었다. 한동안 추도 모임을 떠나있던 것도 마음의 빚이었다.

니시자키의 마음과 추도 모임의 정성이 통해서인가? 추도비를 세울 수 있는 터가 나왔다. 해마다 추도식 후 뒤풀이 장소였던 선술집 주인이 추도 모임의 뜻을 헤아려 자기 집을 팔겠다고 나섰다. 마침 술집 옆에는 열다섯 평 정도 되는 빈 땅도 있었다. 이 땅에는 추도비를 세우고 술집은 조금 손질해서 자료관으로 쓰면 될 터, 위치도 강둑 바로 아래여서 추도식장과는 2차선 제방도로만 건너면 되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문제는 비용. 명색이 도쿄이고, 야히로역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땅과 주택이니 무시못할 금액이었다. 조사해 보니 추도비를 세우는 데만 한국 돈으로 7천만 원 정도가 필요했다. 땅과 주택을 살 돈은 다행히 뜻있는 사람이 보태주었고 추도비 건립 비용은 회원들과 시민의 기부금으로 해결했다.

2009년 9월 드디어 도쿄도 스미다(墨田)구 야히로 6-31-8에 추도비를 세웠다. 한 편에는 10평 안팎의 조그만 자료관까지 열었다. 추도비 뒤편 담에는 무궁화를, 양 옆으로는 에워싸듯 여러 그루의 봉선화를 심었다. 철쭉도 빼놓지 않았고 금귤, 수국, 남초목, 조팝나무까지 심었다. 추도비의 '도(悼') 글씨는 호센카의 대표이사 오치아이 히로오가 썼고 추도비에 들어갈 비문은 회원 모두가 돌아가며 읽고 마음을 담아 확정했다.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일본 군대 경찰 그리고 유언비어를 믿은 민중에 의하여 많은 한국 조선인이 살해당했다. 동경 시타마치 일대에서도 식민지 지배의 고향을 떠나 일본에 건너 온 사람들의 귀한 목숨이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채 빼앗겼다. 이 역사를 마음에 새겨 희생자를 추도하면서 인권회복과 양 민족의 화해를 위하여 이 비를 건립한다.
 
벅찬 감동속에 추도비 제막식을 하고 600명이 참석한 기념 콘서트도 열었다. 문제는 추도비의 관리였다. 혹시 극우단체의 공격이 있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다시 스미다구의 문을 두드렸다. 지자체 차원에서 공식 관리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일본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역사에 책임을 지라"는 촉구이기도 했다. 스미다구 쪽은 "증거 자료가 없다"며 이 요구 또한 거부했다.  
   

추도비 옆 자료관. 니시자키는 추도비를 지키기 위해 여기서 먹고 잤다. ⓒ 니시자키

 

결국 니시자키는 추도비를 지키기 위해 살던 집을 나와 자료관에서 먹고 자기로 했다. 추도비를 건립하고나서부터 그는 정말 산소 지기가 되었다. 자료관은 선술집 건물이어서 난방도 시원찮고 잠자리도 불편했다. 니시자키는 기꺼이 감수했다. 다만 손빨래까지 하긴 어려워 세탁기는 들여놓았다.

니시자키는 묘지기를 하면서도 스미다구가 공식 관리하는 방안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마침 <한겨레> 도쿄 특파원이었던 김효순 기자가 다리를 놔 줘 니시자키는 회원들과 함께 2012년 문석진 서대문구 구청장을 만났다. 스미다구와 자매결연 관계이니 서대문구에서 스미다구에 추도비 관리를 요청해 달라고 부탁했다.

문석진 구청장은 '양 구청이 문화 교류와 친선을 위해 자매 결연을 맺었다, 추도비 관리는 정치적인 문제여서 민감하다'라면서도 청해보겠다고 답했다. 안타깝게도 스미다구의 변화는 없었다.

그는 추도비 옆에서 7년여를 먹고 자다 2014년 12월 시묘살이를 끝냈다. 극우단체의 공격이 한  차례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기간 도쿄의 신오쿠보에서 혐한 시위가 일어나고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는 SNS에서 관동대지진 때와 같이 "조선인을 조심하라"라는 유언비어가 퍼져 걱정이 많았지만 별 탈이 없었다.

문제는 산소 지기를 하는 동안 니시자키의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진 점이다. 50대에 접어든 중년 남자가 자료관에서 혼자 끼니와 잠자리를 해결해야 하니 그 형편이 오죽했겠는가? 식비를 아끼겠다고 편의점 도시락조차 안 사 먹고 스스로 해 먹었지만 빵으로 샌드위치를 만드는 게 고작이었다. 이렇게 자기 몸을 돌보지 못했으니 유전력으로 고생했던 녹내장에 백내장이 겹치고 2014년에는 급성심근경색까지 앓게 되어 한때 위험했었다.

책을 펴내고 

그런 몸을 돌보지 않고 자료관에서 먹고 자며 니시자키가 새롭게 시작한 것이 <관동대진재 조선인 학살의 기록 - 1100가지의 증언>이란 책을 펴내는 작업이었다. 추도비가 세워지니 이곳은 꼭 들려야 하는 역사탐방 장소가 되었다. 그는 자료관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소중한 얘기를 나누고 놓칠 수 없는 증언도 접했다.

이때 니시자키의 머리에 떠오른 게 '문자로 남겨진 모든 증언'을 모아 보자였다. 사이타마나 지바, 가나가와현까지는 못 미친다 해도 도쿄와 관련된 기록은 모두 모아 책으로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는 도쿄에 있는 23개 구의 모든 도서관을 샅샅이 돌았다. 자서전, 일기가 중요했다. 특히 어린이가 남긴 글에는 생생함이 있고 왜곡이 없었다. 복사를 뜨고 자료관에 돌아와서 타이프를 쳤다. 1982~83년까지 문헌반 활동을 할 때 야마다 쇼지 선생에게 배운 게 있다. 역사는 추측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료를 꼼꼼히 따져봐야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 사료를 끈질기고 정성껏 쌓아 가는 야마다의 자세를 떠올리며 이 작업을 했다.

녹내장으로 고생하며 4~5년이 걸려 2016년에 현대서관에서 두툼한 책으로 냈다. 물론 작업은 니시자키 호주머니 돈을 털어했다. 걱정도 많았다. 백 년 전 일이고, 부끄러운 과거를 파헤치는 어두운 글인데 책을 사볼까? 뜻밖에도 2020년 9월에는 보급판도 나왔고 2023년 현재 초판이 거의 다 나간 상태다. 이 책에는 귀중한 증언이 1100개나 담겼다. 추도 모임의 소개 팸플릿에도 나온 내용이다.
 
"아라카와역(현 야히로역) 남쪽에 온천지(温泉池)라는 큰 연못이 있었어요. 헤엄도 칠 수 있는 연못이었고요. 쫓기던 조선인 7, 8명이 거기에 뛰어들어갔는데 자경단이 총을 가지고 쐈단 말이에요. 그쪽에 가면 그쪽에서 이쪽에 오면 이쪽에서 쏘고 마침내 죽여버렸습니다."

"그건 3일날 점심 때였지. 아라카와 요쓰기 다리 하류에서 조선인을 몇 명이나 묶어 데려와 자경단 사람들이 죽인 것은 너무나 잔인한 방법이었어. 일본 칼로 자르거나 죽창으로 찌르거나 철로 된 봉으로 찔러 죽였어요. 여성 중에는 배가 부른 사람도 있었는데 찔러 죽였어요. 죽이고 나서는 소나무 장작을 가져와서 쌓아 시체를 놓아서 석유를 뿌려 태웠습니다."
 
조선인 대학살 100주기인 9월 1일을 앞두고 요즘 니시자키의 하루는 바쁘다. 강연과 인터뷰, 현장 설명 등 할 일이 많다. 그는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의 운영위원이면서 100주년 관련 여러 실행위원회에서 역할을 맡고 있어 회의도 자주 가야 한다.

그는 100주년은 특별하지만 일본 정부의 태도가 바뀌지 않을 것이기에 100주년을 넘어 이 활동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추도 모임의 이사 신민자씨가 말했듯, "죽이지 말자, 죽여지지 말자, 죽이게 하지 말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재일조선인인 한 회원도 비슷한 말을 했다. 나와 내 아이, 내 손자가 죽으면 안 되기 때문에 나는 이 일을 한다고. 이것은 기누타 유키에가 추도 모임을 만들면서 했던 말과 통한다. 그는 "단 한 명이라도 열정이 있으면 운동은 만들 수 있다"며 "어떤 경우에도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게 해서는 안된다"며 호소했었다.

젊은 세대가 희망이다
  

아라카와 강변에 모인 젋은 답사팀. 보라색을 입은 이가 니시자키 마사오 ⓒ 니시자키 마사오 제공

 

다행이라면 추도 모임에 젊은 세대가 모이는 것이다. 학살 현장을 돌아보는 현장 답사 덕분이다. 이번 백주기 행사는 이렇게 모인 젊은 세대가 실무를 맡기로 했다. 기쁘고 고마운 일이다. 니시자키는 이제 증언을 직접 들은 '현장성'을 간직하고 있는 세대로 '기억을 이어주는' 노릇에 자기 자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니시자키는 산소 지기 생활을 끝냈을 때 치바현 이치카와시에 전셋집을 얻었다. 가족은 열네 마리의 고양이. 아침이면 한 마리씩 이마를 어루만져 주고 집을 나온다. 자기에게 들어가는 식비보다 녀석들의 사료비가 더 들어 통장에서 돈 빠져나가는 소리가 쉭쉭 들린다.

하지만 60대 중반의 중늙은이가 고독한 마음을 달래기에 이보다 더한 친구가 있을까? 한 마리로 시작한 동거, 녀석이 계속 친구들을 데려왔고 마음 약한 니시자키는 이를 내치지 못했을 터이다.

니시자키는 외부 일정이 없으면 늦은 저녁에 자료관 문을 닫는다. 골목길에 어둠이 짙어지고 추도비에 살짝 걸쳐있던 노을 한 자락도 자취를 감출 때다. 그는 작은 오토바이에 시동을 건다. 40분을 가야 하는 길,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갈까? 끼니 생각만 하면 머릿속이 복잡하다.

부릉부릉 소리를 내니 어디선가 야옹이 녀석들이 달려올 것 같다. 니시자키가 떠난 자리. 그새 어둠은 짙어진다. 둑길 너머 아라카와에서 신음인지 읊조림인지 알 수 없는 물결 소리가 커지고 추도비를 지키는 봉선화는 붉은 핏빛을 토해내고 있다.
덧붙이는 글 1) ‘관동대지진 때 학살당한 조선인의 유해를 발굴하고 추도하는 모임’과 일반사단법인 ‘호센카’는 한몸이면서 조금씩 다른 활동을 하고 있다. ‘추도모임’은 1982년 발족해 현재도 존속하고 발족시 취지에 맞게 활동하고 있다. 그룹 호센카는 1993년에 발족해 2010년에 해산했다. 스미다구 사회교육 관련 단체로 등록했는데 스미다구 내에서 활동하기 좋은 단체를 만들었던 것이다. 일반 사단법인 호센카는 2010년에 발족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즉 '그룹 호센카'를 해산하고 그 대신 '일반사단법인 호센카'를 설립한 것이다. 법인화한 이유는 추모비 유지관리는 장기적인 사업이기 때문에 법인으로서 모두가 책임감 있게 관리해 나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모임의 스탭은 '추모하는 모임'과 '호센카'의 양쪽에 소속되어 있다. 왜 두 개의 단체가 필요하냐면 '호센카'는 추모비 유지 관리에 특화된 단체이기 때문에 그 밖의 다양한 사업을 수행하는 '추모하는 모임'이 별도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2) 선산군은 지금 구미시에 통합되었고 시 동부 지역을 이루고 있다.

3) '봉선화' 노래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반역자 홍난파의 작품이다. 니시자키와 추도 모임은 이를 알고 있지만 '자이니치'의 한과 슬픔을 위로해 준 노래여서 일본 현지에서의 의미를 살리고자 했다.

4) 선술집 주인은 자신이 빈 땅을 먼저 사서 추도모임에 이를 되팔았다. 자칫 빈 땅의 주인이 추도비 건립 계획을 알면 땅을 안 팔 수도 있기에 본인이 필요하다며 땅을 구입해 줬다.

5) 비문에 있는 시타마치란 표현은 서민층 구역을 말한다.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96,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