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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세에 늦깎이로 등단하여 성공한 작가, 박완서를 모르는 이는 우리나라에서 거의 없을 것이다. 문학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인기 많았던 그의 소설 제목 한두 개쯤은 들어봤음직 하다. 몇 편은 드라마로 제작되어 사랑받았다 하니 문학계는 물론 대중문화에도 큰 족적을 남긴 작가였음이 분명하다. 헌데, 내가 박완서의 글을 처음 만난 건 공교롭게도 그의 소설이 아닌 그림책을 통해서였다.

수년 전 아이들에게 읽어줄 요량으로 선조의 지혜와 해학이 담긴 옛이야기 그림책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굴비 한 번 쳐다보고>란 책이 눈에 띄었다. 굴비를 매달아 놓고 자식들에게 인생공부를 시키는 자린고비 이야기인데, 옛이야기에 현대적 통찰을 버무려 뒤틀은 줄거리가 재미있었다. 지은이를 보니 바로 박완서였다. 소설가로만 알았지, 아이들 그림책까지 내신 줄은 꿈에도 몰랐던 터라 깜짝 놀랐다.

그림책을 지을 만큼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고 동심을 잊지 않는 작가구나 싶어 참 반가웠던 기억이다. 그렇게 작가에게 호감이 생긴 이후에야 서점에서 그의 소설집들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흥미롭게 읽은 여러 소설들 중 내 마음에 쏙 들어온 첫 작품은 '너무도 쓸쓸한 당신'이었다.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시골 초등학교 교장부부의 행태에서 나와 내 남편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방적으로 자기 말 하는 걸 좋아하고, 그러면서도 가장의 고단한 의무를 등한시하지 않는 면이 남편같았다. 세상 똑똑한 척 하나 사실은 세상살이에 변변치 못한 그의 아내는 또 어찌나 나같던지... 가부장적 마인드와 속물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안쓰럽게 늙어가는 중산층의 중년부부를 어쩜 그리 잘 묘사했는지 작가의 안목에 내내 감탄했더랬다. 소설들이 좋아지자 개인적으로 어떤 삶을 사신 작가인지에 대해서도 점점 궁금했다.

엄청난 다작 작가 박완서
 
인터뷰집 <박완서의 말> 중 박완서 작가 사진
 인터뷰집 <박완서의 말> 중 박완서 작가 사진
ⓒ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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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2018년에 출간된 <박완서의 말>이란 책이 좋은 안내가 된다. 이 책은 박완서 작가가 1990년대에 인터뷰한 여러 내용들을 사후 그의 딸 호원숙이 정리하여 펴낸 책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은 그의 개인사와 작품세계를 작가의 목소리로 직접 설명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인터뷰어들도 시인 고정희, 문학평론가 정효구, 소설가 공지영, 여성학자 오숙희 등 쟁쟁한 분들로 당시 그분들의 일면을 엿보는 재미가 있다. 

책을 읽으며 놀란 사실은 박완서가 엄청난 다작 작가라는 점이었다. 1970년에 소설 <나목>으로 등단한 이래 40년 동안 15편의 장편소설과 80여 편의 단편들, 17편의 산문집, 10여 편의 동화집 등, 2011년 81세로 타계하실 때까지 끊임없이 쓰셨다. 정말 타고난 이야기꾼이셨구나 싶었다. 도대체 어디서 그 많은 이야기들이 쉴 새 없이 샘솟았던 건지 당연히 궁금했고, 인터뷰어들도 그 점을 콕 찍어 물어보았다.

"늘 머릿속에는 구상이 몇 개씩 비축되어 있어요. 발효의 시기가 끝나면 하나씩 꺼내서 쓰지요... 항상 제 나름의 그물을 치고 있는데, 거기에 걸려드는 부분이 경험이 만날 때 어떤 영감을 부여한다고 할까요."(38쪽)
"차오를 때까지 기다렸다는 게 지금까지 오래 글을 쓸 수 있게 하는 거 같아요. 경험이 누적돼서 그것이 속에서 웅성거려야 해요."(143쪽)
"기차 타고 서울에 오고 중일전쟁, 2차 대전, 가난, 쌀 배급, 해방, 6.25. 나를 스쳐 간 문화의 부피를 생각할 때 500년은 된 것 같아요. 우리 할머니에 비하면 엄청난 체험 부피가 자꾸 울궈먹고 싶게 하거든요."(144쪽)


그의 말대로 영감의 원천은 지나온 격동의 세월이지만, 그에 맞물린 개인적 내력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작가는 1931년 개풍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읜 후 어머니를 따라 서울에서 자랐다.

6.25 전쟁으로 오빠를 잃었고, 본인은 대학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신여성이 되라는 어머니의 바람을 만족시키지 못한 채 반대하는 결혼을 강행하여 4녀 1남의 자녀를 키우다 20세의 꽃 같은 아들을 불의의 사고로 잃는 비극을 맛보기도 했다.

그만큼 증언하고 싶은 시대상과 상처들을 곱씹으며 켜켜이 쌓인 생각들을 가둘 수 없었음이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살아낸 시절이 제 아무리 수상하고 겪은 비극이 아무리 사무친다 해도 누구나 그 체험을 글로 남기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자신의 일상과 몸담은 세상을 허투루 흘리지 않고 의식적으로 기억하고 챙겨두었던 덕분이다. 그 힘은 그가 독서광이었음은 물론 천상 감수성 높은 작가의 촉을 지녔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싶다.

"이념보다 개인이 먼저"인 작가

인터뷰어들은 특히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주목받는 몇몇 작품들에 대해서 질문한다. <엄마의 말뚝>, <서 있는 여자>,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등이 대표적인데, 문학평론가 정효구는 이들의 집필 동기가 페미니즘적 의도였는지를 묻는다.

작가는 현대사회에서 유독 가족윤리만은 그 변화나 붕괴의 속도가 매우 더디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그저 당대를 살아가며 여성으로서 보고, 듣고, 체험한 내용 자체가 자연스럽게 소설로 이어졌을 뿐이라고 답한다. 

한국 사회에 페미니즘이 태동하기도 전부터 자연스럽게 여성주의 시각이 묻어나는 여러 작품들을 생산해 낸 작가이기에 당시 평론가들로부터 자주 받던 질문이었던 것 같다. 소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를 두고서 남녀 성대결처럼 작위적으로 보인다는 평론가 김경수의 비평에 대해서도 작가는 자신의 작가적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는데 이 부분이 또 인상적이다.

"저는 이념이 먼저인 작가는 아닙니다... 억지로 무슨 주의를 붙이자면 난 그냥 자유민주주의자예요. 개인주의자구... 자기 일을 남에게 존중받고 싶고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것만큼 남을 대접하는 게 옳고, 남에게 당하기 싫으면 남한테 그러지 않는다든가 하는 아주 기본적인 개념 있잖아요.. 내가 중하니까 남도 중한 거지, 전체를 위해서 나 개인을 희생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는 사회가 싫은 거죠. 남자가 여자를 억압하는 사회도 싫고, 여자가 남자를 억압하는 사회도 싫어요."(90쪽)

소박하면서도 포괄적 인본주의의 향기가 묻어나는 답변이 아닌가 싶다. 작가가 의도한 것은 아닐지 몰라도 작가의 작품들이 후대의 여성 작가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건 사실이었다.

소설가 공지영도 여성 문제에 대한 박완서의 좋은 글들이 자신과 동료들을 길러냈다고 책에서 밝히고 있으니 말이다. 여성주의 시각을 담은 작품으로든, 늦깎이로 성공한 여성 작가로든 작가가 우리 나라 여성들에게 오랜세월 든든한 길잡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박완서의 말> 중 피천득 선생과 박완서 작가 사진
  <박완서의 말> 중 피천득 선생과 박완서 작가 사진
ⓒ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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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책에 실린 여러 인터뷰 중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대담은 바로 피천득 선생과의 대화이다. 자연스럽게 늙음을 받아들이는 것과 종교의 본질과 형식 사이의 간극, 사랑하는 이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대해 나누는 두 문학인의 순수하고 명랑한 대화를 대하고 있자니 찌든 영혼이 맑게 정화되는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작가는 부재하지만, 그의 육성을 접하니 그의 존재감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의 작품들과 말들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며,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누적된 경험이 속에서 웅성거려 쓴다는 작가의 말을 귀담아 들으며, 그의 글을 아끼는 이들과 소박하면서도 진솔한 그의 삶의 태도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 <박완서의 말>이다. 

박완서의 말 - 소박한 개인주의자의 인터뷰

박완서 (지은이), 마음산책(2018)


태그:#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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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궁금한 게 많아 책에서, 사람들에게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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