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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눈이 떠졌다. 며칠 푸근한 날이 이어지니 봄이 발밑에 와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성급하다. 봄맞이 할 준비는 한 것인가. 지난겨울은 어땠는지 돌아볼 겨를 없이 이렇게 봄인가 싶은 마음에 오늘은 어디라도 나가야 할 것 같다.

멀리 꽃구경 나가기엔 좀 이른 감이 있다. 남도의 꽃소식이 가끔 들려 오나 아직 군산은 꽃샘추위 여전한 아침저녁이어서 선뜻 나서기 주저해진다. 오랜만에 새벽시장에 한 번 나가기로 한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나선 시각이 새벽 6시 45분이다. 차로 15분 남짓 가면 새벽시장인데 이미 주차할 곳이 없다. 멀찌감치 골목길에 차를 주차하고 장바구니 한 개 챙긴다. 오늘은 봄을 가득 담아 오리라.

'나 좀 보소' 손짓하는 봄나물들
  
봄나물인 미나리, 냉이, 쑥, 방풍나물, 시금치를 펼쳐 놓은 장터 모습
 봄나물인 미나리, 냉이, 쑥, 방풍나물, 시금치를 펼쳐 놓은 장터 모습
ⓒ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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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골목은 각자 물건을 진열해 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상인들과 장 구경을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특별히 살 것 없으면서도 또 뭔가 살 것 많은 것 같은 요즘이다. 봄이라서, 봄이 부르는 손짓이 강렬해서다.

서둘러 나온 봄나물 몇 가지 사다 냄새도 흡입하고 정갈하게 무쳐 맛보며 봄기운을 받아야 제대로 된 봄맞이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신체적 요구가 나를 부른다.

냉이와 쑥, 시금치와 쪽파를 가지고 나온 할머니한테 가격을 묻고 돌아서면 다른 할머니 앞에 똑같은 나물이 복사한 듯 펼쳐져 있다. 요맘때 나오는 채소 작물이 거의 비슷하다. 쪽파가 어마어마하게 많이 나오는데 서둘러 뽑아내야 쪽파 뽑은 자리에 다른 봄 작물을 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쪽파 실허고 좋아. 내가 얼매나 애지중지 키운 중 몰러. 겁나 맛나니께 한 단 사서 파김치도 담고 부침개도 해 먹어봐. 싸게 줄틴게 사."

꼬부랑할머니가 나를 붙잡는다. 더구나 깨끗하게 다듬은 쪽파다. 저걸 다듬느라 얼마나 어깨를 수그리고 허리 굽히며 끙끙거리셨을까. 정갈하게도 묶어 놓았다. 사지 않을 수 없다.

"근디 나 말여 지갑을 안 가지고 나왔응게 돈대로 현찰로 주면 안 되까. 거스름돈도 못 챙기게 생겼으니 말여. 에이 뭔 생각허고 지갑도 못 챙겼으까 참. 새벽으로 나올라면 얼매나 바쁜 중 몰라. 깜빡해부렸네! 고만."

본래 새벽시장에 가려면 현금을 챙겨야 한다. 되도록 천 원권도 넉넉히 준비해야 물건을 조금씩 살 때 거스름돈 때문에 애먹지 않는다. 이른 시간일수록 그렇다.
  
반짝 열리는 새벽시장은 물건의 규모가 작다. 주로 나이드신 분들이 버스를 타거나 근처 밭에서 가져 오기 때문에 많은 양을 가져올 수 없다.
 반짝 열리는 새벽시장은 물건의 규모가 작다. 주로 나이드신 분들이 버스를 타거나 근처 밭에서 가져 오기 때문에 많은 양을 가져올 수 없다.
ⓒ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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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는 게 없다고 손사래를 치지만

어물전 골목으로 들어서니 이곳은 사람이 더 많다. 물건의 가격대도 크고 흥정도 더 활발한 것이 얌전하게 땅에 붙어서 손길을 기다리는 채소에 비해 생선과 각종 해물은 나무 상자나 함지박에 담겨 좌판을 이루고 수산물 파는 상인들은 벌떡 일어서서 마구잡이로 외친다.

"오늘 방금 잡은 주꾸미, 멍게, 해삼 있습니다!"

청년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이른 아침을 활짝 열어젖힌다.

"언니 이 아구(아귀) 좀 보소. 기가 멕히게 싱싱햐. 한 마리 만 원여. 내가 손질 다 해놨응게 언니는 토막만 쳐서 끓이면 돼!"

장바구니가 차오른다. 이것저것 봄을 담는다. 누군가 말했다. '장터는 원시적 거래 장소라고. 땅바닥에 물건을 놓고 엉덩이를 붙이면 그만이고, 그런 노점이 장터가 되었다'고.
  
서해안의 손꼽히는 생선인 마른 박대와 조기가 손길을 기다린다.
 서해안의 손꼽히는 생선인 마른 박대와 조기가 손길을 기다린다.
ⓒ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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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 적당히 반말도 오간다. 불쾌하지 않다. 사람 간의 예의가 정으로 묻어나고 넉넉하지 않으나 거래하며 즉석 소통이 가능한 건강한 삶으로 뭉쳐있기에 그렇다.

너나없이 흥정에 열을 내도 구경나온 사람이 많으니 딱히 바쁜 것 없는, 장이 주는 매력이다. 남는 게 없다고 손사래를 치지만 선뜻 물건을 건네고 돈을 치른다. 벌써 다 팔고 요것밖에 없다고 눙치던 손끝에서 시금치 보따리가 새로 풀려 나와도 그러려니 하면서 발길을 옮기는 게 장터의 순기능이다.

이곳 새벽 시장은 소위 번개시장이다. 새벽 4시쯤 열고 오전 9시면 닫는다. 순식간에 정리되어 말끔해진 시장 골목을 보면 그 많던 사람과 물건은 다 어디로 갔는지 경이롭기까지 하다. 아침에 잠깐 섰다가 파장하는 번개시장이라는 이름에 걸맞다.

사람들의 에너지로 충만한 곳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춥거나 더운 날도 삼백예순 날 시장은 열린다. 어제 아침처럼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새벽에도 수많은 상인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새벽을 나섰으리라. 아침 밥을 먹으면서 남편이 한 마디 한다.

"이렇게 비가 와도 시장은 열리겠지."

시골에서 농사지은 걸 조금씩 가지고 나오는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은데 비가 내리니 불편하겠다며 마음이 쓰이는 눈치다. 그러다가 또 까마득하게 잊고 산다. 날마다 열리니까. 늘 거기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니까.

우리가 쳇바퀴 같은 붙박이 일상을 사는 것처럼 새벽시장도 어김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끝없이 움직이며 정직한 계절을 살아낸다. 장터를 지키는 사람의 얼굴이 간혹 바뀌어 있기도 하지만 장터는 언제나 살아 꿈틀거린다. 주어진 자기 일과 삶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새벽시장은 기꺼이 살아내려는 사람들의 에너지로 충만하다. 누구라도 열심히 살아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쑥과 냉이,미나리도 총총 썰고 쌀뜨물에 된장 풀어 끓인 냉이국이다.
 쑥과 냉이,미나리도 총총 썰고 쌀뜨물에 된장 풀어 끓인 냉이국이다.
ⓒ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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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담은 장바구니가 제법 무겁다. 쪽파를 샀고, 냉이와 쑥을 샀다. 아구(아귀)탕에 넣을 미나리도 조금 샀다. 달래를 샀으니 달래장도 만들어야겠다.

쑥 한 줌 넣은 냉이된장국을 끓였다. 구수하게 퍼지는 봄 냄새가 봄비 소리와 제법 잘 어울린다. 이수복 시인의 〈봄비〉가 떠오르는 아침이다.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 봄비, 1연


새벽시장에 다녀온 후로 내 몸과 마음에 봄이 훅, 들어왔다. 분주하게 움직여 몇 가지 봄 반찬을 만들어 먹고 나니 비로소 봄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 늘 오는 봄이었으나 봄을 맞는 기분은 언제나 다르다. 얼어붙었던 대지에 물오르니 봄이 부푼다. 뭔가 새롭게 시작해보려는 마음을 추동하는 봄이다. 힘껏 한 발 내디뎌 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에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봄나물, #새벽시장, #먹거리, #봄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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