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08 11:26최종 업데이트 23.02.08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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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중 작전 중인 한국군 ⓒ 책 ‘파월한국군 전사 사진집’

 
한국 법원이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에 대한 대한민국의 책임을 최초로 인정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68단독 박진수 부장판사는 피해자 응우옌 티탄 씨가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대한민국은 3000만 100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승소판결을 선고했다.

법원은 손해배상금에 대한 지연이자 청구의 일부를 기각했다. 한편, 원고가 제시한 청구액인 3000만 100원보다 많은 4000만 원이 적절한 위자료라고 평가했다. 그렇지만 원고가 청구한 범위를 벗어나는 판결을 내릴 수는 없으므로 3000만 100원 지급을 선고했다. 형식상으로는 일부 승소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전부 승소로 볼 수 있는 판결이다.  


응우옌 티탄은 남베트남 정부군과 베트콩(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내전으로 베트남 전쟁이 발발한 1960년에 출생했다. 그가 학살 피해를 본 것은 이 전쟁이 국제전으로 비화한 뒤인 1968년 2월 12일이다. 중국 하이난섬 북쪽인 통킹만에서 미군 함정들이 공격을 받았다고 발표된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1964년 8월 7일 미군이 북베트남을 폭격하고 9월 11일 한국군이 파병돼 대규모 전쟁의 양상을 띠게 된 이후였다.

1968년 2월 12일이란 시점은 그해 1월 30일 구정 공세(설날 공세)로 북베트남과 베트콩이 우세를 점한 상태였다. 한국 군인들이 꽝남성 디엔반현 퐁니촌에서 민간인 70여 명을 학살했고, 여덟 살 된 응우옌 티탄은 이 때문에 다섯 명의 가족을 잃었다. 그의 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그와 오빠뿐이었다.

그는 한국 정부가 외면하는 것은 물론이고 베트남 정부도 협조하지 않는 가운데, 학살의 진상을 알리고 가해자에게 책임을 물리기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 한국 시민사회의 협력으로 전개된 이 투쟁은 52년 만에 승소 판결로 이어졌다. 2020년 4월 21일 추미애 법무부 장관을 법률상 피고로 해서 서울중앙지법에 소송을 제기한 지 근 3년 만의 일이다.

한국 법원의 용기 있는 판결

외국 국가권력을 상대로 힘겨운 투쟁을 전개해 1심 승리를 이룬 응우옌 티탄도 대단하지만, 대한민국의 책임을 인정한 한국 법원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 법원은 한국에서 전개되는 위안부나 강제징용 소송보다 훨씬 힘든 조건에서 용기 있는 판결을 내렸다.

이전의 농업경제시대 때도 민간인들이 전쟁 중에 학살을 당하는 일들이 있었지만, 그 시절의 왕조 권력들은 상대국 농민들을 끌고가 자국 농토에 배치하거나 상대국 영토를 점령해 그곳 농민들에게서 조세를 받는 데 주력했다. 상대국 노동력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왕조시대 국가권력들도 민간인 피해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런데 오늘날의 전쟁에서는 상대방 국민들의 신병을 확보해 자기 나라로 끌고 갈 필요성이 현저히 감소했다. 또 무기 발달로 인해 전투 현장 밖의 민간인들이 피해를 볼 가능성도 훨씬 커졌다. 그래서 인권의 가치가 중시되는 속에서도 전쟁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의 위험성은 왕조시대보다 커졌다고 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참상이 잘 보여주듯이 전쟁으로부터 민간인을 보호할 필요성이 더욱 커지는 시점에서 서울중앙지법이 이번 판결을 내렸다. 1심 판결이기는 하지만, 베트남 전쟁 피해구제뿐 아니라 여타 전쟁의 피해 구제에도 힘을 실어줄 만한 판례다.  

그런데 이번 소송은 전시 민간인 학살뿐 아니라 한·일 식민지배 문제에도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이 소송의 핵심 쟁점들은 이번 판결이 위안부나 강제징용에 관한 판결인 듯한 느낌을 줄 만하다.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의 부속협정인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해 식민지배 문제가 해결됐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2012년 5월 24일 한국 대법원이 전범기업인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선고했을 때도 강조했듯이 이는 사실이 아니다.

청구권협정은 식민지배 문제가 아닌 일반 민사채권관계를 다루는 것이었고, 이로 인해 피해자 개인의 청구권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도 소멸되지 않았다고 대법원은 밝혔다. 이 협정에 의해 불법적 식민지배문제가 청산됐다고 하려면 일본의 불법행위 시인이 선결됐어야 하는데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게 대법원이 제시한 근거 중 하나였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한국 정부 배상책임 인정, 피해자와 영상통화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인 응우옌 티탄씨가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대한민국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1심 선고 공판에서 일부 승소한 뒤 영상통화를 통해 소감을 말하고 있다. ⓒ 유성호

 
응우옌 티탄 사건에서 한국 정부는 '한국이 베트남 및 미국과 체결한 군사실무약정이 있기 때문에 원고는 한국 정부에 대해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베트남 전쟁 중에 체결된 한월 군사실무약정과 한미 군사실무약정에 따라 한국은 배상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한국 정부는 한국 군인들이 현지인들에게 끼칠 손해에 대한 법적 책임을 부담하지 않기 위해 1965년 2월 7일 한월 군사실무약정을 체결하고 다음날 한미 군사실무약정을 체결했다. 이에 관한 협상이 계속되면서 약정은 한국에 유리한 쪽으로 개정돼 나갔다.

그런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1966년 7월 13일 자 <동아일보> 1면 우하단 기사다. 이 기사는 "이 실무약정서는 주월한국군 장병들이 월남 민간인에 대해 (1)비전투시에 끼친 손해배상은 한미 간의 합의에 따라 미군 측이 보상 전액을 부담하고 (2)전투시에 끼친 손해에 대한 배상은 한미 간에 협의 후 보상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전투 중에 끼친 손해는 보상하지 않고 비전투 중에 끼친 손해는 미군이 보상하기로 했던 것이다. 어느 경우든 미국과의 협의나 합의를 거치되 한국은 책임을 지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법률신문> 보도에 정리된 바에 따르면, 응우옌 티탄 사건에서 서울중앙지법은 이런 약정과 관련해 '베트남 국민 개인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청구권을 행사할 권리를 배제하는 법적 효력은 갖기 어렵다'는 취지로 판시했다. 약정 당사자가 아닌 개인 피해자가 그 약정 때문에 청구권을 상실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지는 국가가 타국과의 협정에 의해 자국민의 권리를 소멸시킬 수 없다는 것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다. 국민 개개인과 국가는 법적으로 별개이므로 법적으로 '남'인 국가가 국민의 권리를 임의로 소멸시킬 수 없음은 당연하다. 전시 학살이건 식민지배 문제건 다를 바 없다.

그런데도 청구권협정에 의해 개인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일본의 주장은 그 자체가 거짓이기도 하지만, 개인과 국가는 법적으로 남남이라는 이치에도 맞지 않는다. 응우옌 티탄 판결은 그런 이치를 상기시켜 주고 있다.

국민 개인과 국가는 법적으로 '남'

식민지배 문제에서 일본이 오랫동안 내세운 또 다른 논리는 시효 완성이다. 1991년 8월 3일과 4일 도쿄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지역 전후보상 국제포럼'에 참석해 한국인들의 피해를 증언한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양순임 상임이사가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분통을 터트린 것도 시효를 내세우며 배상을 거부하는 일본의 태도 때문이었다. 그는 일본 법무성을 상대하다가 겪은 일을 이렇게 소개했다.
 
법무성에 징용자들의 미지급 임금 공탁금 1조 5천억 원을 돌려달라고 하니 '56년 시효가 끝났고 66년에 공탁금 문서를 소각하라고 각 지방 법무성에 지시해 이미 소각된 것도 있을 것'이라며 애매하게 대답했다.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들은 한국인 피해자들이 귀국한 뒤 이들에게 임금 청구의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랬는데도 "왜 이제 왔느냐?"며 책임 이행을 기피했던 것이다.

이번 응우옌 티탄 사건 재판부는 "정부가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권리 남용에 해당한다고 봤다"며 "응우옌 티탄은 소송을 제기할 무렵까지도 객관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 사유가 있었다"라고 판시했다. 이런 사안에는 시효 완성을 주장할 수 없다고 못을 박은 것이다.

이번 판결이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뿐 아니라 일제 식민지배 문제에도 시사하는 점이 있다는 점은 한국·베트남 정부뿐 아니라 일본 정부도 이번 판결문을 꼭 읽어봐야 할 필요성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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